끝없는 변혁 - 19세기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전통의 단절'과 함께 큰 변화를 겪는다.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시기를 '종교개혁'과 이 시기,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꼽는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절대다수의 지위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졌다면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적 부분에 있어서의 변화를 촉발했다. 산업혁명 이전에 미술과 공예는 구분되지 않았다. 제작방식이 예술의 한 부분이었고, 뛰어난 장인과 생업을 위한 장인으로 구분될 뿐이었다. 하지만 생산 방식의 변화는 '순수예술'의 등장을 초래했고,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예술가들은 어떠한 쓸모를 위한 제품의 생산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19세기 초 예술가는 교회나 귀족에 봉사하는 이전의 사회적 기능에서 분리되어 온전히 미적 가치를 지닌 자율적 지위를 획득했다. 이로부터 예술가들은 '무엇을 위한 예술'이 아닌 '예술을 위한 예술 (l'art pour l'art)'을 추구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다양한 아방가르드(avantgarde) 운동은 예술과 삶의 분리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고 예술과 공예의 관계 회복을 위한 시도들이었다. 영국에서 벌어진 수공예운동, 독일의 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 등이 대표적 예다.
미술에서는 양식과 기법에 천착해 반복적 생산만을 해오던 도제식 기술전수에서 예술가의 개별적 창작활동의 장인 살롱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러한 장에서 예술가 개인의 경험과 세계관이 보편성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예술가들은 비평가들과 의뢰인들, 그리고 대중들의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된다. 비평가들의 과도한 비난을 무릅쓰고 예술가들의 의지가 승리를 거두고 등장한 것이 인상주의 화가들이다.
건축은 산업화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분야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화된 대도시들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하고, 모여드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수많은 건물들이 지어진다. 하지만 이 시기에 생겨난 건물들은 제각각의 양식을 띠게 된다. 건축주들은 이전 시대의 양식을 반복하는 지루함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이 원하는 다양한 양식들을 선택적으로 취합하기를 원했다. 1802년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건축이론가 장 니콜라 루이 뒤랑(Jean-Nicolas-Louis Durand, 1760-1834)은 <Précis des leçons d'architecture>에서 건축 이론과 실무의 통합으로 체계적 설계 방법론의 기초를 마련했다. 뒤랑은 건축 요소들을(기둥, 보, 벽, 지붕 등) 상세히 설명하고 이들이 어떻게 조합되어 건축물의 전체적인 형태와 기능을 이루는지 분석했다. 이러한 기반에서 다양한 양식의 조합을 통한 개별적 건축물의 설계를 상상할 수 있었다. 19세기 이전의 다양한 양식은 이제 새로운 건축을 위한 자원(ressources)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잡한 양식적 조합은 고전의 어설픈 흉내내기를 벗어나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주변 건물들과의 조화로움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이러한 절충주의(eclecticism)는 단시간에 많은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나, 영국의 퓨진(August Welby Northmore Pugin, 1812-1852)은 산업화와 전통의 단절에 반대하였고, 고딕부흥(Gothic-revival)을 통해 당시 만연한 신고전주의가 기독교 국가에 맞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는 찰스 배리경을 도와 1834년 불타버린 웨스트민스터 궁전과 빅밴의 재건을 위한 작업에 참여했다.
1834년 화재로 소실된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대한 재건이 1840년 결정된다. 찰스 배리(Charles Barry, 1795-1860) 경의 고딕부흥 양식으로 지어진 웨스트민스터 궁전은 고딕 건축의 특징인 수직성이 강조된 외형을 띤다. 산업화와 대도시화를 거치며 여러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던 런던에 종교심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로 전통과 학문의 전통성을 수호하고, 낭만주의에 대항하고자 한 앵그르는 '라파엘레스크' 양식으로 호평을 받았다. 1801년 로마상을 수상하고 1802년에 살롱에 데뷔하여 착실히 명성을 쌓았다. 앵그르는 역사화에 관심이 많았으나 유명세는 초상화로 얻게 되었고, 1803년 나폴레옹 전신 초상을 그리는 5인에 포함되었다. 1806년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를 완성하지만, 신고전주의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권력자에 아부한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앵그르는 고전 미술의 특징인 뚜렷한 윤곽선과 분명한 광원을 특징으로 하는 화풍을 보였고, 해부학을 기반으로 한 세밀한 신체 묘사에 주력했다.
앵그르는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에서 자크 루이 다비드가 완성한 인물의 신격화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왕좌에 당당히 앉은 나폴레옹의 근엄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은 피디아스가 남긴 올림포스의 제우스의 신성한 모습을 모티브로 삼았다. 화려한 장식과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는 문양, 세속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왕홀, 월계수 왕관 등은 위엄 있는 황제의 모습을 신의 모습에 비견될 정도로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다.
앵그르는 나체의 여신을 여러 점 남겼는데 <오달리스크>는 하렘의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의 작품으로 뒤돌아 누워있는 여성의 신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다. 목욕하는 여인과 오달리스크에서 각각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는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한 자세다. 오달리스크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훨씬 상반신에 가깝게 위치하도록 그려졌다. 마찬가지로 목욕하는 여인의 오른 다리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어색한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앵그르는 인물의 자태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왜곡된 신체를 만들어냈다.
앵그르는 말년에 <터키식 목욕탕>을 완성한다. 원래 이 그림은 원형의 프레임 톤도(Tondo)로 제작되지 않았으나 이후 톤도로 바꾸어 완성했다. 고전주의 화가들이 시도했듯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자세를 한 점의 그림 속에 표현하고 있고, 선명한 외곽선과 전체적으로 밝은 조명을 특징으로 한다. 1911년 잡지 <Kunst>에서 비평가 알베르트 드라이푸스(Albert Dreyfus, 1859-1935)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터키식 목욕탕' [...]은 그의 젊은 시절 그림인 1806년과 1808년의 '목욕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표현과 같다. 여기에서 그의 평생을 사로잡았던 문제가 마침내 해결되었다. 바로 동양 복장을 입은 고대의 평온함이다. 목욕하는 사람과 오달리스크 그림 모두는 그가 아주 늙었을 때 그린 그림에 대한 예비 연구와도 같다. 터키식 목욕탕은 그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 필요한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
앵그르는 평생을 고대인들로부터 전해지는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애썼고 <터키식 목욕탕>에서 그가 인식한 "고대의 평온함"을 그려냈다. 앵그르는 고대인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아름다움의 비결을 찾고 표현하고자 했다. 앵그르는 고대인들의 아름다움은 진실의 표현에 있고, 고대인들의 업적은 아름다움의 '인식'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의 비결은 진실을 통해 발견되어야 합니다. 고대인들은 창조하지 않았고,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인식했을 뿐입니다.”
앵그르의 라이벌로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와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콰트로첸토, 신고전주의로 이어지는 앵그르의 계보에 대응하는 베네치아 르네상스, 바로크, 낭만주의의 계보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를 기점으로 불씨가 점차 꺼져간다. 들라크루아는 신고전주의 화풍에서 강조하는 윤곽선과 명확성, 형태보다는 색상과 움직임에 초점을 둔다. 시인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들라크루아는 열정에 열렬히 사랑에 빠졌지만, 가능한 한 명확하게 열정을 표현하기로 냉정하게 결심했다.>
들라크루아는 많은 인상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변화하는 조명 조건의 정확한 관찰을 기반으로 혼합색과 반사광에 의한 색조의 변화에 주목했다.
7월 혁명의 내용을 담고 있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들라크루아의 화풍의 정점을 보여준다. 화포와 총의 연기로 자욱한 7월 파리의 모습은 수많은 시체와 분노한 시민들로 가득했다. 총, 칼을 든 화난 민중의 진격은 연기로 가득한 공기를 뚫고 나아갔고, 이 행렬을 이끄는 것은 자유에 대한 그들의 열망이었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는 1831 뤽상부르궁의 전시에서 이 그림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모든 [3,000] 개의 그림 중 들라크루아의 7월 혁명만큼 눈의 띄는 색상은 없다. 바니쉬와 반짝임의 부재는 회색 거미줄처럼 인물을 덮고 있는 총 연기와 먼지 … 이 모든 것이 그림에 진실을 부여하고 … 그리고 7월 그날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한다. “
화가는 연기의 자욱함에 가려지는 인물들의 모습을 애써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의 진정한 모습은 자욱한 연기에 의해 진실로 드러난다. 들라크루아의 강렬한 표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 Géricault, 1791-1824)다.
제리코는 색채를 분위기에 맞게 조절하여 비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뗏목의 뒷부분과 선두의 천을 흔드는 남성을 잇는 대각선 구도는 화면에 역동성을 부여하여 탑승자들의 간절함을 배가시킨다. 어디에서 비치는지 모를 빛들은 특정 신체에서 반짝이며 독특한 색조를 만들어낸다. 들라크루아는 <단테의 배>에서 제리코의 배와 같은 방향성을 재현한다. 단테가 두른 붉은 천은 왼편에 죽음의 도시의 불길을 반향하고 있으며 오른편의 플레기아스의 푸른 천과 대조된다. 단테의 작품 <신곡>의 8장에 등장하는 대목을 묘사한 그림으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고통받는 영혼을 헤치고 스틱스강을 건넌다.
배에 매달린 밝게 빛나는 인물들의 피부에 맺힌 물방울은 하나의 색이 아닌 최소 네 가지 색의 조합으로 표현되었다. 물방울의 색과 반사광의 색은 주변과 감응하여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바르비종(Barbizon)파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코로는 자유롭지만 촘촘한 구도와 차분한 색채의 풍경화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화가다. 바르비종파는 인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는데, 프랑스의 바르비종에 모인 테오도르 루소, 샤를-프랑수아 도비니, 쥘 뒤프레,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1830년에서 1870년 사이에 캔버스를 들고 아틀리에를 벗어나 풍경을 직접 관찰하며 자연의 빛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야외에서 그림을 완성하고자 시도했다. 그 가운데 코로는 로랭과 푸생의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에 매료되었고, 그들의 자연 관찰의 세심함과 고전적 풍경의 간극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미술사학자 피터 갈라시는 코로의 화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코로는 클로드와 푸생을 깊이 존경했고, 그들의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의 관점에서 자연을 바라보았다. 로마에 도착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그는 야외 회화의 경험적 신선함과 고전적 풍경 구성의 구성 원칙 사이의 격차를 메운다는 목표를 실현했다.”
코로는 자연광에서 작동하는 빛의 번짐과 그림자에서 불분명해지는 사물의 형태에 주목했다. <나르니의 다리>에서 빛이 비치는 곳과 그림자인 부분에서 색의 면으로 표현되는 부분은 강렬한 빛에 의해 형성되는 색의 영역과 음영으로 인해 생기는 색의 영역에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1825년에 로마로 여행을 떠난 코로는 3년간 머물며 풍경화들을 남겼다. <파르네제 정원에서 바라본 로마>는 토스카나 지역의 강렬한 태양을 받은 황토색의 건물들이 자연광에서 어떻게 색의 면들을 형성하는지 잘 드러난다. 로랭이 즐겨 사용하는 화폭의 모서리를 음영이 진 나무로 채우는 방법도 원경의 로마에 대한 집중을 높이는 구도를 만들어낸다. 번지는 빛의 효과는 전체 화폭에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코로의 후기작 <모르테퐁텐의 기념품>은 풍경에 몽환적 분위기를 잘 살려낸다. 화면의 대부분은 오른편의 큰 나무가 지배하고 있다. 전체적인 조도를 낮추어 왼편의 밝은 부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왼편의 휘어진 한줄기 나무에 두 손을 뻗고 있는 여성과 두 아이는 신화 속의 한 장면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인상주의적 특징을 일부 공유하는 코로의 그림은 확대하여 보는 것보다 멀리서 본 그림이 더 선명해 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나타낸다.
바르비종파에 속하면서 동시에 사실주의 화가인 밀레는 에콜 드 보자르(École de Beaux-Arts)에서 학습하고, 루브르에서 만테냐, 조르조네, 미켈란젤로와 푸생을 습작하며 연구하여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켜 나갔다. 1830년대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가족들과 함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여러 풍경화를 시도하게 된다. 밀레는 시골의 풍경을 그리곤 했는데 그가 남긴 걸작 <이삭 줍는 사람들>은 단순한 시골 풍경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화면의 전면에 세 여인이 추수가 끝난 밭에서 간혹 있을지 모를 이삭을 줍고 있다. 그녀들은 허리를 펼 여유도 없이 땅에 남겨진 이삭을 찾고 있다. 화면의 뒷부분에는 높이 쌓인 짚단과 추수된 식량들이 쌓여있다. 오른편 뒤에는 현장을 감독하는 듯한 말 위의 인물이 보인다. 평론가 에드멍 아부(Edmund About, 1828-85)는 밀레의 작품에 자세한 설명을 남긴다.
“밀레는 단순한 주제를 엄숙하고 간결하게 그립니다. 그는 종말의 끝을 알 만큼 자연을 면밀히 연구하지만, 미묘한 관찰자의 죄책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말하고 싶은 유혹을 피하고, 당신은 그에게서 이 다양한 의도, 므소니에의 작품에서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이 세세한 것의 낄낄거리는 소리를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나 1857년의 이삭 줍는 사람들(Les Glaneuses)은 뛰어난 재능의 표시이자 대가들의 공통된 특징인 절제가 풍부하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과 구별됩니다. 그림은 웅장함과 평온함의 분위기로 멀리서도 당신을 매료시킵니다. 나는 그것이 마치 종교적인 그림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조용하고 그림에 흠집도 없고 반짝이는 색도 없습니다. … 밀레의 태양은 밀을 익히게 하고 사람들을 땀나게 하는 진지한 별입니다. 그리고 농담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 캔버스 바닥에는 풍족한 수확자들이 호화로운 짚단과 주인의 재산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전경에는 세 명의 이삭 줍는 사람이 잊힌 옥수수 이삭을 하나씩 수집하고 있습니다. … 그는 그들에게 눈물을 흘리는 가난의 불쌍한 얼굴 표정도, 시기하는 비참함의 위협적인 몸짓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세 여인은 자애나 증오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에 나무를 모으듯이, 가을에는 포도주를 위해 애쓰십시오. 이러한 적극적인 체념은 농민의 미덕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불행한 일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지나쳐도 그들은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 보장된 기회의 구호품을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넣습니다.”
밀레는 프랑스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노동자임을 상기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노동자의 비참함을 감정적으로 호소하거나, 성경적 경건함을 통해 노동을 신성시하는 표현을 하지도 않았다. 밀레는 전면에 드러난 빈곤과 햇살이 비치는 곳의 풍성함을 냉정하게 대조시킬 뿐이다. 그는 여느 대가들과 같은 '절제'를 통해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1840년 부모님의 요청으로 파리대학 법대를 진학한 쿠르베는 루브르 및 다른 미술관에서 스페인, 네덜란드의 거장들의 작품을 습작하며 미술을 접했다.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를 존경하여 1841년부터 자화상 작업을 시작했고 1844년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회화에 전념한다. 그는 샤를 보들레르,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등과 친분을 쌓으며 사실주의 운동(Realism)에 동참했다.
쿠르베는 자신의 개성을 끌어낸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의 자화상에서 최대한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알프레드 브루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당신이 아는 이 웃는 가면을 통해 나는 뱀파이어처럼 가슴을 사로잡는 비통함, 괴로움, 슬픔을 숨긴다.”
쿠르베는 스스로의 눈으로 고대와 당대의 거장들의 작품을 평가하고 학습했으며, 스스로의 비판 없이 타인의 작품을 모방하지 않았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냉정하고 냉소적이다. <오르낭의 장례식>은 종교화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서 엘그레코는 백작 뒤에 참석한 인물들의 얼굴을 수평으로 배치한다. 인물들의 표정은 검은 옷에 대비되어 확연히 드러난다. 렘브란트는 당시 플랑드르에서 유행하던 초상화의 풍습을 따른다. 등장인물들이 각출하여 제작하는 방식인 '더치페이'로 각 인물들의 얼굴이 동등하게 그려져야 불만이 없다. 물론 렘브란트는 일부 인물의 비중을 작품의 분위기를 위해 희생했기에 비난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쿠르베는 이러한 선배들의 업적을 일부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림의 왼편에 홀로 우뚝 선 십자가가 풍기는 종교적 색채를 강조하지 않는다. 매장을 위해 파낸 바닥의 옆에 보이는 해골 역시 신성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쿠르베는 종교적인 듯 해석될 수 있는 장치를 미리 보여주고, 관찰자의 기대를 냉정하게 외면한다. 미술 평론가 샹플뢰리(본명 쥘 플뢰리, Jules Fleury 1821-1889)는 이 작품의 소시민적 사실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쿠르베는 장례식을 통해 아무것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시민들에 의해 마지막 안식처로 안내되는 시민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화가는 우리에게 작은 마을의 가정생활을 보여주기를 좋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추함에 관해서는 과장된 것이 없습니다.>
이 작품에는 성스러운 죽음도, 유명인의 죽음도 없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애도와 슬픔에 빠진 비통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슬퍼하고 누군가는 무심한 일상적 의례로서의 장례식을 눈에 보이는 대로 전할 뿐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이 그림이 품위와 적절성이 없고, 선과 색, 구도, 깊이의 그라데이션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쿠르베는 훈련받은 관찰자의 기대를 실망시킴으로써 학문적 장르의 표준에 반대하고자 했다.
쿠르베는 몽펠리에로 가는 길에 그의 후원자 알프레드 브뤼야스(Alfred Bruyas)가 하인과 개를 데리고 그를 만나는 장면을 그렸다. <봉주르, 쿠르베 씨>에서 왼편에 녹색옷을 입고 기품 있는 자세로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알프레드 브뤼아스이고, 그의 하인은 주인의 인사에 맞춰 목례를 하며 예술가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예술가의 복장과 태도는 의아함을 자아낸다. 옷차림은 방랑객의 그것이며 치켜든 턱은 으스대는 듯하다. 비평가들은 이 때문에 이 작품을 "괴물 같은 자존심의 표현"이라고 비난했다. 이 그림은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로 알려졌으며 부자들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당당한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이 작품에 영감을 준 것은 <방랑하는 유대인>의 모티브다. 이 유대인은 13세기 유럽에 퍼지기 시작한 신화 속 인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조롱한 죄로 다음 재림까지 땅을 걷는 저주를 받았다. '죽음'을 잃었기에 목숨을 잃을 수 없는 '방랑하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21장 22-23절을 참고한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너희가 상관하겠느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삶의 세 가지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돈후앙의 '즐거움(쾌락)의 길', 파우스트의 '의심의 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망의 길'이 그것이다. '절망의 길'은 "죽을 수 없는 것, 그러나 이곳에는 삶의 희망이 남아있지 않으며, 절망은 마지막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끝없이 방랑하며 목적 없이 죽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방랑자'로서의 길을 예술가의 삶과 유사하다고 쿠르베는 느꼈던 것 같다. 예술은 전통과 단절되고 끝없는 변혁의 과정을 겪고 있다. 쿠르베는 새로움을 자신의 개성에 대한 발견에서 찾고 싶었고, 그 표현을 위해 편견 없이 모든 시대의 미술을 바라 보고자 했다.
“나는 어떤 체계와 편견 없이 고대 미술과 현대 미술을 연구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복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모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전통에 대한 전체 지식으로부터 나 자신의 개성에 대한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느낌을 끌어내고 싶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