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단절 - 18세기말 19세기 초: 영국, 미국 및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시와 시각예술의 선구자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에 의해 "영광스러운 선각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를 설명하는 평가로 적합한 문장이 있다.
“전임자들에 의해 제지되지 못하고,
동시대인들과 같이 분류되지 못하며,
알려지거나 쉽게 추측될 수 있는 후계자로 대체되지 않는 인물”
그의 예술은 전례도 추종자도 없는 독보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그가 추구했던 아름다움이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블레이크는 "일반화하는 것은 바보가 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개별화"된 예술을 추구했다.
그는 <유리즌의 책>(1794)에서 독특한 세계관을 그려낸다. 유리즌은 관습적 이성과 법의 화신으로 우주를 창조하고 제한하기 위해 건축가의 도구 혹은 사람들을 법과 관습에 갇히게 하는 그물을 사용한다. 블레이크는 당시 신격화된 영국의 위인 아이작 뉴턴이 발견한 자연과학법칙과 종교적으로 법제화된 모세의 규범이 인류에게 획일성을 강요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인간을 그 자체로 보는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고, 인간의 사고력을 조망하는 법으로 이성이 아닌 환상을 이용하여 의식을 확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리즌의 책>은 인간 억압의 원인으로 '소외된 이성'을 꼽았고 책의 내용은 창조 이전에서 창조, 그리고 창조 이후에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해 기술한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병들었다! 그는
아들과 딸 모두를 저주했다. 왜냐하면 그는
육체도 영혼도
한순간도 그의 철의 법칙을 지킬 수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 제8장, 4절 (23장 23-26행) -
유리즌이 예언자 로스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는데 자신이 만든 인간들의 타락을 보고 그들을 저주했다. 어느 누구도 그의 빈틈없는 법칙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합리성과 법은 인간의 본능과 거리가 멀어서 그것을 완벽하게 지키기는 불가능하다. 블레이크에게 이성과 종교는 정신을 구속하는 사슬에 불과했다.
영국의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상상력이 풍부한 풍경화와 격렬한 해양화를 주로 남긴 윌리엄 터너는 유화 550여 점, 수채화 2000여 점 그리고 스케치와 드로잉 등을 30000여 점이나 남긴 위대한 화가다. 그는 풍경화를 역사화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가 피터 커닝햄은 다음과 같이 터너를 표현했다.
“몇몇 현명한 사람들에게 풍경 예술을 자연을 길들인
무미건조함에서 끌어올리는 고귀한 시도로 인정받았으며 …
풍경화가 지금 정당하게 찬양받는 효과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멀리 정박된 범선의 실루엣이 고요한 바닷가에 정박해 있다.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의 한편에 보름달이 환하게 어부의 배 한 척을 비춘다. 어부의 배가 있는 곳에만 유난히 거친 파도가 일렁이며 달빛의 복잡하고 화려한 반사를 일으킨다. 불안정한 어부의 배에는 희망의 등불이 빛나고 있다. 이 그림을 전시회에서 본 존 윌리엄스는 감동의 평가를 내린다.
<현재의 전시에서 독창적인 정신의 가장 큰 증거 중 하나이다.
배는 부력이 있고, 순항하며, 물결은 감탄할 만큼 눈을 현혹한다.>
그의 말처럼 배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물결의 일렁임은 어둠 속에서 우리가 이 배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위태로운 배가 달빛 아래에서 휘청이는 모습이 주는 자연 앞에서의 인간의 악착같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앤드류 윌튼은 이 그림이 "18세기 예술가들이 바다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을 요약한 것"이라 평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을 종식하는 워털루 전쟁이 영국 주축의 대프랑스 동맹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림의 왼편 뒤쪽으로 승리를 축하하는 듯한 축포와 같은 빛의 폭죽이 내리고 있고, 오른편 뒤쪽으로는 연기로 가득한 도시의 풍경이 보인다. 횃불을 든 여인들은 무수한 시체 속에서 자신들의 가족을 찾으려는 듯하다. 이 시체에는 아군도 적군도 없다. 터너는 바이런의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그림의 옆에 함께 전시했다.
"친구, 적, 붉은 장례식에 섞여"
터너는 승리의 묘사보다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자 이 그림을 그렸다. 터너는 인권에 대한 정치적 태도를 보이곤 했다.
1823년에서 1838년까지 런던 노예제 폐지 협회가 있었고, 1839년에는 나아가 영국 및 외국 노예제 폐지 협회가 설립되었다. 터너는 노예제 폐지 협회를 지지했고, 위의 <노예선>을 그렸다. 그림의 원제는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를 배 밖으로 던지는 노예 상인들 - 폭풍이 온다>이다. 터너는 노예선에 벌어지는 갖은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림을 통해 인권 운동을 행한 것이다. 그림의 전면에 물에 빠진 노예의 신체 일부와 족쇄들이 보인다. 멀리 노예선은 폭풍에 의해 위태로운 상태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노예들을 바다로 던져버린 것이다. 터너는 1819년 미출판된 시 <희망의 오류>에서 다음과 같이 남겼다.
"모든 손을 높이 들어, 돛대를 치고 밧줄을 묶으세요.
저 멀리 분노한 지는 해와 사나운 구름
티폰이 온다고 선언하세요.
갑판을 쓸어버리기 전에 배 밖으로 던져 버리세요.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 - 그들의 사슬은 결코 신경 쓰지 않는다
희망, 희망, 허황된 희망!"지금 너의 시장은 어디에 있니? “
원제는 <눈보라 - 얕은 물에서 신호를 보내고 납을 달고 가는 항구에서 나온 증기선. 저자는 "아리엘"이 하위치를 떠난 밤에 이 폭풍 속에 있었다>. 터너는 폭풍 속에 있는 배 "아리엘"에 있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터너의 말에 의심을 표하지만 아무도 진실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정신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그림에서와 같이 식별 불가능할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지성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은 <Modnern Painters>(1843)에서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바다의 움직임, 안개, 빛에 대한 가장 웅장한 서술 중 하나>
터너와 함께 영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은 수습생으로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고전작품에 대한 연구와 모방을 하며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 갔다. 그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로는 게인즈버러, 클로드 로랭, 페터 파울 루벤스, 안니발레 카라치, 루이스달 등이 있는데 클로드 로랭의 영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낭만주의 화가답게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 치중한 컨스터블은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은 감정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일 뿐이다.>
그리고 당시 화풍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가장 큰 악덕은 기교를 부리는 미술, 진실을 넘어서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이다."
컨스터블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고자 노력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일 것 같은'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치는 풍경을 그대로 화폭에 담으려 했고, 어떠한 과장된 기교나 빛의 효과는 배제하고자 했다. 그는 최초로 야외에 캔버스를 가져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화가로 이후 바르비종(Barbizon) 파와 인상파의 작업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장에서 그리는 그림은 아틀리에에서 떠올린 풍경과는 다르다. 현장에서 느껴지는 빛의 우연한 번짐, 반사와 따스함은 작업실에서는 선택적으로 재현될 뿐이었다. 컨스터블은 자신이 머무는 서퍽(Suffolk)의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건초 마차>는 서퍽과 에섹스(Essex) 사이의 스투어(Stour) 강의 시골 풍경을 그리고 있다. 오늘날 <건초 마차>는 컨스터블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영국 최고의 그림으로 평가받지만, 1821년 왕립 아카데미에 <풍경: 정오>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을 때 아무도 구매하지 않아 1824년 프랑스 살롱으로 건너가 인기를 얻었다. 당시 최고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 Gericault, 1791-1824)에 의해 극찬을 받고 전시회의 포스터를 본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를 포함한 신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이 전시회에 참석한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 (Marie-Henry Beyle, 필명 Stendhal, 1783-1842)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우리는 이전에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없다. 이 그림의 진실성은 너무나 놀랍다.>
이러한 진실성에 대해 컨스터블은 이렇게 말했다.
<상상 속의 풍경은
결코 실제의 풍경에
근거한 작품을
따라갈 수 없다.>
<건초 마차>와 함께 프랑스에서 인기를 끌었던 <데담 계곡>은 클로드 로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한쪽 모서리에 큰 나무를 배치하고 나무와 하늘 사이에 먼 도시의 모습을 배치한 후 전면에 인물을 두어 풍경에 이야깃거리를 추가하는 방식은 로랭이 즐겨 쓰던 방식이다. 색감과 붓터치에서 로랭의 이상화된 표현과 거리가 멀지만 기본적인 풍경화의 배치 기법은 로랭의 그것을 이어받고 있다.
화면의 1/6 정도만 땅과 바다가 차지한다. 두꺼운 물감의 사용으로 파도와 검은 물결의 질감의 수평성을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수평선의 오른쪽 끝자락에 또렷이 보이는 범선의 모습이 비구름을 향해 가는 위태로운 여정을 떠오르게 한다. 컨스터블은 화면의 구성에서부터 하늘을 그리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는 <(하늘은) 핵심 음표, 규모의 기준, 감정의 주요 기관>이라고 생각했고 그림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비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선택했다. 컨스터블은 자신의 그림이 영국에서 사랑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는 영국인들에게는 흔해 빠진 시골의 풍경을 과장 없이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는 전기 작가 레슬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 제한적이고 추상적인 예술은 모든 울타리 아래,
모든 길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집어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의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이후 20세기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실존주의에 영향을 끼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신학자 코제가르텐(Ludwig Gotthard Kosegarten,1758-1818)에 의해 자연이 신의 계시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프리드리히는 풍경화가 명확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생각에 거부했다. 그는 "풍경화가 교회에 몰래 들어와 제단으로 기어들어간다면 그것은 진정 추측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했다.
거대한 떡갈나무 숲 가운데 무너진 고딕 성당의 잔해가 남아있다. 창은 모두 사라지고 건물의 벽체만 간신히 나무 사이에 서있다. 하늘에는 초승달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고 일군의 수도사 무리가 관을 들고 수도원터로 향하고 있다. 일몰 무렵의 어슴푸레한 분위기에 바닥에 기울어진 십자가는 더욱 황량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두 개의 자그마한 불빛이 이 행렬에 작은 희망이마나 되어주는 듯하다. 프리드리히는 대자연의 영원성에 대비해 유한한 인간의 시간성을 표현하고 있다. 저 떡갈나무 한그루의 시간은 수십 명의 인간의 수명을 능가할 것만 같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천 년의 석조건축물도 자연 속에서는 부서진 폐허에 불과하다. 이렇듯 프리드리히는 인간의 유한성을 자연의 힘, 영원성과 대비시키며 자연의 위대함과 그 속에서의 인간의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얼음 바다>는 얼어붙은 바다에 솟구친 얼음 판들이 기괴하게 솟아오른 생명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자연의 힘은 단단한 얼음 덩어리를 솟구치게 하고 인간이 만든 범선을 아무렇지 않게 삼켜버렸다. 자신만만한 항해를 시작했을 인간의 탐험은 자연의 폭력적인 힘 앞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항해는 모험과 도전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자연의 신들을 정복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영원에 새겨놓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그러한 영웅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겸허하게 자연의 영원성에 존중을 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