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단절 - 18세기말 19세기 초: 영국, 미국 및 프랑스
18세기말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기점으로, 곰브리치는 "공통된 기반"이 무너지는 시기라고 불렀다. 1775년에서 1783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독립 전쟁은 신대륙의 새로운 독립 국가의 탄생을 알렸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구질서(ancien régime)의 붕괴와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공언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세는 미술에서의 새로운 움직임을 다양한 방식으로 강제했다. 기존 기득권의 몰락과 새로운 기득권의 등장은 그들의 취향에 맞는 새로운 예술의 등장을 요구했고, 새로운 사상의 등장과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관점을 장착하게 했다.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변화 속에서 등장한 예술사조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와 낭만주의(romanticism)이다. 신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원형으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적 요소가 다시 채택되는 특징을 갖는다. 건축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건축에 팔라디오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 건축의 요소를 포함시킨다.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그랜드 투어 (grand tour)' 열풍은 고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고, 신고전주의는 과학적, 합리적, 실증적 방법으로 고대, 고전의 결과물을 연구하고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반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산업화에 대항하여 주관성, 상상력,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움직임이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독일의 요한 요하임 빙켈만 (Johann Joachim Winkelmann, 1717-1768)은 고대 그리스의 조각을 <edle Einfalt und stille Größe(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 으로 표현했다. 낭만주의는 괴테의 'Sturm und Drang (질풍노도)' 문학을 통해 시작되는데 인가의 합리성만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표현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 1774)>가 있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예술가의 감정이 그의 법"이라는 말로 낭만주의를 정의한다.
미국의 3대 대통령(1801-1809) 토머스 제퍼슨은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한 지식인으로 건축뿐 아니라 다양한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1779년부터 1781년까지 버지니아의 주지사를 역임했고 이 시기에 주의사당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1819년에는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는데 힘을 썼고, 대학 건물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며 1825년 총장을 역임한다. 1768년 그는 버지니아에 '몬티첼로(작은 산)'을 만들어 자신이 거주할 집을 설계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건축은 나의 즐거움이며, 세우고 철거하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락 중 하나이다.>
몬티첼로의 저택은 그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팔라디오의 <건축 4서>를 기반으로 영국의 리처드 보일 벌링턴 3세의 <치즈윅 하우스>를 모범으로 만든 건축물이다. 신팔라디오주의(neo-pallaianism)라 불리는 팔라디오 건축의 모방에 대한 열의는 팔라디오 건축을 직접적으로 모방하는 방법과 팔라디오 건축을 모범으로 삼는 건축가들의 작품을 참조하는 방법 등이 있다. 주택의 전면부에 고대 그리스식 열주를 두고 본채는 르네상스의 사각 평면으로 구성한 후 중앙에 판테온의 돔을 끼우는 방식의 설계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 건축의 정수를 모아 빚는 방식이다.
버지니아 대학의 <로툰다>의 경우에는 로마의 판테온을 더욱 직접적으로 모방했다. 전면부의 기둥의 숫자가 여덟 개가 아닌 여섯 개인 점을 제외하면 본건물의 드럼형 공간과 반구형의 돔까지 판테온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한편 내부는 팔라디오의 <테아트로 올림피코>의 관객석 뒤편의 구성을 모범으로 삼고 있다.
<버니지아 주의사당>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의 님(Nîmes)에 위치한 <메종 카레(Maison Carré)>를 모범으로 삼았다. 제퍼슨의 시기에는 양쪽 날개 부분은 없었고 본채만 있었다. 전면부의 여섯 개의 이오니아 주두의 기둥이 메종 카레와는 다른 점일 뿐 장축형의 사각형 평면의 고대 그리스 신전의 단순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신고전주의 건축은 고대 그리스 건축의 복원(greek-revival)을 단순한 우아함이 주는 미학적 기준에 맞추고 있다. 기하학적 단순성과 장식에 대한 절제는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 철학에 어울리는 양식으로 채택되었다.
미국 국회의사당은 당시 미국의 여러 건축가들의 손이 거쳐간 작품이다. 윌리엄 손톤의 계획안을 기본으로 홀렛, 라트로브, 제임스 호반 등의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추가였다. 제퍼슨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함께 최종안을 채택하는 심사를 맡았다. 원안에는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을 떠올리는 부분이 없었으나 1950년에 추가되었다. 국회의사당의 기본 골격은 르네상스 팔라초 양식을 기본으로 한 파리 판테온을 참고하고 있다. 삼단 구성의 본채와 돌출된 로지아 부분은 팔라디오의 건축 양식을 이어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카피톨이라는 이름은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지칭하여 한때 로마의 원로원을 위한 건축에 빗대어 미국의 상원의원을 위한 건축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건축물이 보여주는 "웅장함, 단순함, 아름다움"은 제퍼슨이 손튼에게 한 찬사였다.
프랑스의 왕실 궁정화가이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다비드는 1774년 고대하던 로마상(Prix de Rome)을 수상하여 로마로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특히 라파엘로의 작품을 마주하고 연구하여 고전주의의 기법을 배웠다. 정치적으로는 혁명의 중심인물인 로베스피에르와 친분이 있었고 자코뱅당의 당원이었다. 다비드는 정치적 사건을 '실시간'으로 묘사하여 먼 시대를 이상화하는 대신 당시 정치적 사건의 선전 효과를 끼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적극적 정치적 예술은 사후 그를 비판하는 지점이 되는데, 정치적 이익에 따르는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
혁명 이전의 다비드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서 공화정 로마를 위해 전쟁에 나서는 호라티우스 형제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위해 전쟁에 나서는 맹세의 장면을 그린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설'에 영향을 받아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의무를 행하는 신성한 맹세를 웅장하게 표현했다. 반대편의 힘없는 아이와 슬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대조시켜 권리를 행사하는 남성과 보호를 받는 여성을 구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마라의 죽음>은 자코뱅당의 당원 마라가 25세의 지롱드 파의 지지자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당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마라는 반대파인 지롱드 파의 혁명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을 계획하고 있었고, 코르데는 정치적 혼란에 고통받는 자신과 같은 이들을 위해 이를 멈춰줄 것을 편지로 써서 전달한다. 극심한 피부병을 앓던 마라는 집에 머물며 식초를 뿌린 터번을 쓰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코르데는 이를 알고 마라를 방문하여 그녀의 요청을 들어줄 것을 부탁하지만 마라는 거절을 하고, 이에 코르데는 단검을 그의 가슴에 찔러 넣는다. 다비드는 잔혹한 숙청을 행하려 했던 마라의 죽음을 미화하여 자코뱅당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선전용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마라에 왼손에 쥐어진 편지는 코르데가 쓴 것으로 그의 엄지 손가락은 '호의(자비)'를 가리키며, 자신의 죽음 후에 코르데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메시지를 줌으로써 마라의 미화시킨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93년 7월 13일, 마리안느 샤를로트 코르테가 시민 마라에게,
내가 매우 불행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당신의 호의(자비)를 받을 권리가 있다.>
다비드는 마라를 미화하기 위해 영웅적 희생을 상징하는 예수의 죽음의 모티브를 가져왔다. 루벤스의 <그리스도의 매장>에서 보는 것과 같이 늘어진 오른팔과 힘없는 머리, 희고 깨끗한 피부와 평온 표정의 얼굴은 마라의 죽음을 신성시하기 위한 기법들이다. 마라 앞에 놓인 나무 상자에는 '마라에게 다비드가'라고 적혀있고, 그 위에 놓인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남편이 조국을 위해 죽은 다섯 자녀의 어머니에게 이 임무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샤를로트를 움직인 배후 세력이 있다는 내용으로 지롱드 파의 사주를 통해 살인이 일어났음을 생각하게 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코뱅당은 피의 숙청을 통해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왕정에 대한 불만으로 혁명에 동참한 민중들은 가중되는 혼란을 정리해 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고, 나폴레옹이 민중의 요구를 받아 황제로 등극한다. 다비드는 자코뱅당의 몰락 이후 감옥에 갇히지만, 적극적 해명을 통해 풀려나게 되고 이후 등장하는 권력자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린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는 사실적 표현을 담은 들라로슈의 그림과는 전혀 다르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아닌 그의 삶 전체의 영웅성을 표현하기 위해 다비드는 상징적인 포즈를 구상해 냈다. 화면 전면에 세 개의 돌에는 세 영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Annibale, Karolus Magnus, Bonaparte. 한니발, 샤를마뉴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 세 인물은 비이탈리아 출신으로 로마 지역을 지배한 영웅들이다. 나폴레옹을 두 역사적 인물들과 나란히 세움으로써 그의 영웅성을 부각하고자 했다. 이러한 인물의 영웅화는 티치아노가 <뮐베르크 전투 이후 카를 5세>에서 보여준 초상화에서의 업적을 이어받고 있다.
금속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야는 고전주의의 선구자인 안톤 라파엘 멩스(Anton Raphael Mengs, 1728-1779)의 추천으로 왕실 태피스트리 화가로 궁정에 데뷔했다. 1790년부터 궁정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걷고자 한 고야는 애쿼틴트 기법(에칭의 기법)을 통해 사회, 정치적 풍자를 위한 시리즈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Los Caprichos(카프리치오, 1796/7, 1799 출판), Desastres de la Guerra (전쟁의 공포, 1801-04)이 있다.
당시 논란의 중심이 된 <나체의 마야>는 "서양 미술 최초의 모독적인 실물 크기의 여성 누드"(프레드 리히트, Fred Licht 1928-2019)였다. 고야는 이 작품으로 사회적 문제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종교재판을 받기도 했다. 즉각 <옷을 입은 마야>를 그려 논란을 누그러뜨렸다. <나체의 마야>는 이후 마네의 <올랭피아>(1863)의 모티브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원작이 오랜 시간 공개되지 않았던 것으로 두 작업을 개별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발코니에 있는 마야들>은 창녀로 여겨지는 여인들을 그린 그림으로 여러 버전이 존재한다. 위의 그림은 1808-14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미국 메트로폴리탄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에두아르 마네가 <발코니>를 그려 고야에 대한 헌사를 바친다. 그림은 철제 난간을 기준으로 삼등분되며 각 인물들은 기하학적으로 구분된 영역에 위치한다. 앞의 두 인물은 밝은 빛을 받고 화사한 색으로 빛나며, 뒤편의 두 인물은 어두운 배경에 묻혀있다. 이 작품은 젊은 두 마야의 아름다움과 배경에 있는 보호자들의 어둠으로 대비되며, 눈에 보이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진실은 회칠한 무덤처럼 그늘 뒤에 숨어있다고 해석된다. 고야는 현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고, 사회적 문제들은 이성적의 부재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1819년 고야는 마드리드 근처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라는 집을 매입했다. 이 집은 '귀머거리 집'이라는 뜻인데 1792년 병으로 귀머거리가 된 고야에게는 운명과 같은 집이었다. 1819년에서 1823년까지 이 집에 머물면서 고야는 14점의 그림 시리즈를 이 집의 벽에 그리는데, 검은 배경에 그린 특징 때문에 '검은 그림'으로 불린다. 이 가운데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신화에서 사투르누스가 자신의 자녀가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를 찬탈한 것과 같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예언을 피하기 위해 그들을 삼켜버리는 내용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했다. 자신의 자녀의 머리와 팔을 뜯어먹는 광기에 휩싸인 사투르누스를 통해 자신의 여섯 자녀 중 한 명만 살아남은 운명과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스페인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마녀의 안식일>에서 염소의 형상을 한 마녀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다. 고야는 그릇된 믿음에 속기 쉬운 사람들의 속성을 고발하고, 미신과 종교재판, 마녀사냥과 같은 광기가 삶을 괴롭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에서 잠든 사람의 뒤편으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사람을 깨우려 하고, 그 뒤편으로 박쥐 실루엣의 어두운 세력이 활개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고야는 이성의 부재가 광기를 낳고 광기가 지배한 사회에 대해 경고하고자 했다. 고야에게 계몽주의는 중세의 무지몽매함에서 깨어나 진일보한 인류로 나아기가 위한 희망의 철학이었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