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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Oct 30.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22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II -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배경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반종교개혁을 위해 바로크 예술을 적극적으로 선전의 도구로 활용했다. 신의 권능을 교회 건축과 조각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바로크의 거장들이 나섰다. 같은 시기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을 보인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에서 귀족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다양한 정치적 수단을 사용하여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며 스스로를 '태양왕 (Roi-soleil)'이라고 칭한다.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부와 권력의 크기가 신적 권능에 필적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기에 그의 베르사유 (Versailles) 궁전 건축은 성공적인 프로젝트였다. 권력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루이 14세는 자신의 권력이 신에게서 부여받았음을 내세우며 '신의 대리자'로서의 왕의 권한을 천명하는데 이것이 "왕권신수설"이다.

<루이 14세>, 이아생트 리고, 1701

그는 <짐이 곧 국가다 (L'État est moi)>라고 말하며 국가의 개념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위해 귀족에게 속해있던 권력을 가져오기 시작한다. 루이 14세는 지속적인 전쟁을 수행하는데 병력을 동원하는 데 있어서 귀족들이 사병이 필요한 것이 언제나 귀족들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원령을 통해 징병된 병력은 훈련되지 않은 병사이기 때문에 전쟁에서 핵심적인 전력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상비군 제도를 통해 군사적 독립성을 갖추었다. 또한 관료의 선발에 있어서 부르주아들을 대거 기용했다. 귀족에게는 군사와 외교 분야 혹은 궁전 내의 이름만 있는 직위를 부여한 반면 부르주아에게는 재정, 상업, 행정 등 왕의 정책을 교화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는 왕권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베르사유 궁전 (Château Versailles)

루이 14세는 대대로 사용되던 루브르 궁을 두고 파리에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새로운 궁전을 짓기로 한다. 자신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사냥을 목적으로 1624년에 별장을 지었던 곳에 1661년 건축가 루이 르 보(Louis Le Vau, 1612-1670)와 샤를 르브렁(Charles Lebrun, 1619-90), 쥘 아르두앙 망사르(Jules-Hardouin Mansart, 1646-1708) 등에게 습지였던 곳에 거대한 궁전을 짓도록 했다. 베르사유는 압도적인 왕권을 얻은 후의 과실이 아니다. 루이 14세는 절대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베르사유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파리에서 떨어진 곳에 왕궁을 짓는 것은 시민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는 거대한 부지에 어마 어머 한 비용과 규모를 요구하는 프로젝트로 얻을 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귀족들로부터 권력을 조금씩 되찾아오는 것이었다. 이후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도 결국 세금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당시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민중들을 통해서는 그 비용이 충당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해 낸 것은 귀족들의 소비를 부추기는 그들의 놀이동산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고향을 떠나 왕궁에 머무르며 귀족들은 자기 과시와 향락을 위해 막대한 돈을 소비했고, 그들이 사들이는 사치품을 제공하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방식이 루이 14세의 작전이었다. 루이 14세는 그들의 과시욕과 인정욕구를 자극하였고, 귀족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겨 자신의 권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2만 평의 땅에 2300개의 방, 578개의 거울이 있는 방, 1000개가 넘는 분수, 극장, 파티장, 도박장 등이 있는 궁전은 인간이 여태껏 만들었던 어떠한 건축물도 닿지 못했던 규모였다. 프랑스 전역의 귀족들과 다른 국가들의 귀족들에게도 베르사유는 환상의 공간이었다.

왼편: 성 및 공원의 전체 계획, 들라그리브, 1746; 오른편: <베르사유 궁전의 풍경>, 피에르 드니 마르탱, 1724

베르사유의 전체 계획은 대칭성을 기본으로 한다. 완벽한 신의 현신인 '태양왕'이 머무는 곳은 완벽의 상징인 '대칭(symmetrie)'의 원리를 만족시켜야 한다. 또한 왕이 머무는 곳에서 빛이 발산하듯 모든 길은 궁으로 향해야 한다. 바로크 도시 계획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세 갈래의 길은 프랑스어로 'Patte d'oie(거위발)'이라 불린다. 빛이 발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성된 이 길은 왕의 시선이 모든 곳에 다다른다는 완벽한 감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베르사유 궁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을 기본으로 외부를 구성했다. 1층의 거친 돌 쌓기 (rustica), 2층의 피아노 노빌레(piano nobile) 그리고 가장 윗부분은 애틱(attic)으로 르네상스 3단 구성의 틀을 유지한다. 중앙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돌출된 구성과 로지아 (loggia)를 두어 밋밋할 수도 있었던 입면에 특징을 부여한다. 양측부에도 돌출부가 있지만 가운데 부분에 비해 좁게 돌출시키고 적은 기둥의 수로 위계를 해치지 않는다. 오른쪽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입체적인 배치를 통해 같은 형태의 입면에 깊이감을 부여한다. 곰브리치는 베르사유의 바로크 건축을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과 비교하여 변화와 적극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하지만 베르사유의 바로크는 보다 큰 스케일에서의 시각적 효과들을 보여주었다. 점진적 후퇴를 통해 입면의 깊이감을 부여하고 중심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성은 실제로 이곳을 걸어 들어가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극적인 시각효과를 누릴 수 있다.

왼편: 거울의 방; 오른편: 베르사유 궁전 평면도

평면도의 1. 부분은 거울의 방 (Gallerie des Glaces)이다. 이 거울의 방은 프랑스의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한 장소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었고, 이후 이를 설욕하기 위해 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인 독일에게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을 시킨 곳도 이곳이다. 전체 길이 73미터에 43미터의 너비, 13미터의 높이를 가진 이 방에는 당시 거울 제조법을 독점하던 베네치아에서 망명한 장인들이 만든 357개의 거울이 배치되어 있다. 왕족의 결혼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 등을 하는 중요한 행사 공간에서 이 거울들은 참가자들이 스스로를 모습을 확인하고 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거울에 비친 자신과 타인의 모습을 통해 부족한 장신구와 패션을 자각하고 또 다른 소비를 통해 루이 14세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왼편: 왕과 왕비의 침소, 오른편: <백작부인의 아침 알현>, 윌리엄 호가스, 1743/45

거울의 방에서 이어진 2번 방은 왕과 왕비의 침소다. 건물의 중심에 침소가 위치한 까닭은 태양왕이 일어나는 곳이 태양이 뜨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이 14세는 왕과 왕비가 잠에서 깨어나 세수하고 옷 입는 것을 공개했는데 이것을 'lever'라고 했다. 작은 르베(petit-lever)는 8시에 시작되어 기본적인 준비와 친족의 알현을 마치고 8시 반부터 큰 르베(grand-lever)를 시작하여 장관과 국무위원들의 알현을 받는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모든 일상을 과시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귀족들의 경쟁의 장으로 삼았다. 베르사유 궁전은 귀족들이 스스로 갇힌 쥐덫과도 같이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왕의 주머니를 위한 향락과 사치, 과시와 경쟁의 장소였다.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

왼편: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야콥 판 슈펜, 1720; 가운데: 벨베데레 궁전; 오른편: <사보이의 오이겐 왕자>, 야콥 판 쇼이네, 1718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겪던 오스트리아는 17세기말 '대튀르크 전쟁/신성 동맹 전쟁'(1683-1699)를 통해 오스만 제국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다. 1529년 오스만 제국이 18일 동안 빈을 포위한 적이 있었고, 1683년 다시 한번 빈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포위된다. 이 두 번의 전쟁 모두 수비 측인 오스트리아의 승리로 돌아갔다. 두 번째 전쟁의 영웅 사보아의 왕자 오이겐/외젠 (Franz Eugen von Savoyen-Carignan)는 빈의 남부 지역에 부지를 매입하고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Lucas von Hildebrandt, 1668-1745)에게 여름용 저택의 건축을 지시한다. 프랑스 사보아 출신인 이 왕자의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곳을 매입하고 처음으로 벨베데레 (Belvedere)라고 칭했다. 벨베데레의 뜻은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뜻이다.

벨베데레 궁전은 하궁(Unteres Belvedere)과 상궁 (Oberes Belvedere)로 이루어져 있다. 하궁과 상궁 사이에 단차가 있어서 상궁에서 하궁을 내려다보면 뒤편으로 도시 빈의 풍경이 보인다.

하궁방향에서 바라본 벨베데레 상궁

원래 오이겐 왕자가 매입한 것은 하궁이었고 힐데브란트가 개조해서 사용했다. 상궁은 아름다운 정원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추가로 부지를 매입한 후 건설했다. 왕자는 이후에도 하궁에 기거했고 상궁의 오른편에는 왕자의 동물원이 있었는데 왕자의 사후 쇤브룬 동물원으로 옮겨졌다. 상궁은 정원과 함께 완벽한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르사유 궁전과 마찬가지로 돌출된 중앙부가 강조되어 있다. 힐데브란트는 중앙부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층수 자체에 변화를 주었다. 하지만 건물 전체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각 층의 가로방향의 띠를 눈에 띄게 구성하여 전체적인 안정감과 통일성을 유지했다.


멜크 수도원(Stift Melk)

멜크 수도원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되는 베네딕토 수도회 건물이다. 에코가 멜크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까닭은 실제로 1297년 화재로 교회와 모든 별채, 그리고 도서관과 그 저작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던 것이 영향을 주었다. 16세기부터 이어진 오스만과의 전쟁으로 세금 부담이 커지자 수도원의 경제적 기반이 파괴되었고 수도원은 해체의 위기에 내몰렸다. 17세기 반종교개혁 운동이 벌어지며 파사우를 중심으로 한 교구의 중심지로 수도원은 경제 활동을 재개했다. 수도원의 목표는 종교적, 정치적, 정신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수도원 건물을 외부에서 보기에도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가들과 달리 독일어권에서의 바로크 건축은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운 내부의 로코코 양식이 특징인 경우가 많다. 수도원의 규모가 큰 것은 이곳에 수도원, 교회, 정원, 황실 가족을 위한 방과 박물관, 도서관, 교육 시설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리석 홀과 파울 트로거의 천장화

수도원에 위치한 대리석 홀은 황실을 위한 연회 및 식사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홀 중앙의 철제 부분을 통해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었다. 내부 공간의 갈색 부분은 잘츠부르크 (Salzburg) 산 대리석을 사용했고 밝은 부분은 실제 대리석을 모방한 치장용 벽토 대리석으로 이루어졌다. 천장화에는 사자 전차를 탄 여신 팔라스 아테나 (Pallas Athena)와 곤봉으로 지옥 사냥개를 죽이는 헤라클레스가 묘사되어 군주에게 필요한 힘과 현명함을 표현하고 있다.


장 앙투안 바토 (Jean-Antoine Watteau, 1684-1721)

37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바토는 18세부터 생계를 위해 미술품 상인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스승 클로드 질로(Claude Gillot, 1673-1722)를 만나 짧은 시간이지만 무대 연극에 대한 기법을 익혔다. 1708년 왕립 회화 조각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로마 그랑프리 (Grand Prix)에서 2위를 차지했고, 1717년에야 비로소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1717)를 통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1721년 결핵으로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의 후원자들의 집에서 연구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사랑의 향연>, 앙투안 바토, 1718-19

바토의 작품에는 주인공이 명확하지 않고 주제가 무겁지 않다. 표현도 발랄하고 가볍기 때문에 관객으로 하여금 부담을 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주제는 사랑인데 <사랑의 향연>에서 등장하는 남녀들에게서 진지하거나 운명적인 사랑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당시의 연애 풍습을 반영한 것으로 이러한 장르는 "Fêtes galantes (페뜨 갈랑뜨, 우아한 연회)"라고 부른다. 바토는 페뜨 갈랑뜨를 통한 최초의 로코코 화가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갈랑뜨'는 이성에게 매혹적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매혹적인' 연회로 이해해도 괜찮다. 그림의 오른편에는 비너스와 큐피드의 조각이 보인다. 사랑의 여신은 큐피드에게 화살을 주지 않는데 '눈먼 사랑', '광기 어린 사랑'을 이곳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가볍고 우아한 사랑만 허락된다.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 앙투안 바토, 1718-20

"우리와 함께 키테라 섬을 순례하러 가요. 젊은 여성들은 애인을 얻어서 돌아옵시다."


플로랑 당쿠르의 <세 명의 사촌 자매>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은 바토는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를 완성한다. 여기서도 비너스와 큐피드의 조각상은 <사랑의 향연>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조각상 바로 아래에는 투구와 갑옷, 방패를 내려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한쌍의 남녀가 있다. 이 그림에는 모든 남녀가 쌍으로 등장한다. 작품의 구도는 멀리서 관찰하는 듯한데 결핵을 앓고 있는 화가가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겉돌 수밖에 없는 시선이 드러난 것이다. 바토의 작품이 가볍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알 수 없는 우울감을 주는 것은 이러한 거리감 때문일지 모른다.

그림의 상세한 부분을 보면 신체를 맞닿고 있는 상대와 시선이 향하는 상대가 다른 인물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페뜨 갈랑뜨는 주로 '냉정한 우울함, 삶의 무익함, 은혜로 가득 찬 가벼움'등의 모순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후 로코코 화가들은 남녀 사이의 무절제한 욕망을 암시하는 그림을 주로 그리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피에로 질>, 앙투안 바토, 1718/19

피에로 질은 테아트르 들라 푸아르(Théâtre de la Foire)의 배우인 질 르 니애 (Gilles le Niais)를 말한다. 바보 캐릭터인 영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에서 영향을 받은 대중 연극 장르로 복면을 쓴 배우가 희극적 즉흥 연기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가면을 쓴 인물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숨김없이 표출한다. 프랑스로 넘어온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피에로 캐릭터에게 '우울함'을 부여했다. 순수한 동시에 고립감이 느껴지는 흰 옷의 피에로 질은 주변인물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연극에서 늘 웃으며 발랄했던 질이 무기력한 자세와 감정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질의 뒤편에 있는 인물들의 시선은 당나귀에게로 향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인물들의 주목을 받는 당나귀도 아니고 그들도 아니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우울한 피에로 질이다. 한 이론가는 바토가 이 작품을 통해 '탈중심화'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 화가가 자신의 삶에서 겪었던 고독은 사교적일 수 없었던 질병과 경제적 사정에 의한 것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주변인으로 머물고 타인의 시선 안에서는 주인공인 듯, 바보인 듯 연기해야 하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영국의 예술사학자 마이클 레비(Michael Levey, 1927-2008)는 바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뜻하지 않게 자신에게만, 오직 자신에게 충실한, 개인주의 예술가의 개념을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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