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시대 -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17세기까지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부유하지도 강력하지도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44년 동안 통치하며 영국의 첫 번째 "황금기"를 맞이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에스파냐의 상선을 공격하여 부를 축적하는 해적의 면모를 보였다. 브리튼 섬은 지리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이후 실패한 나폴레옹의 정책인 대륙 봉쇄령이 내려진 이유도 브리튼 섬에 접근하기 위한 교통 노선의 한계를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며 영국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6)과 같은 과학자의 등장과 함께 이성의 승리를 이끌기 시작했으며 17세기 명예혁명을 토대로 마련한 근대적 정치체제와 산업혁명(1760-1820)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어낸다. 이 시기에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 변화의 움직임인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서유럽의 주된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 비판을 주된 목적으로 했던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달리 영국의 계몽주의는 이성을 통해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온건하고 긍정적인 특징을 보인다.
17세기 절대왕정의 바로크 예술이 웅장하고 화려한 특징을 보인 반면 영국은 소소하지만 감동적인 일상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이끌었던 젠트리(Gentry)는 귀족의 지위는 없으나 가문의 휘장을 가진 유산 계급이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검소하고 근면하며 절약과 금욕적 생활을 실천했던 청교도인들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라틴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전공한 렌은 건축, 천문학, 수학, 물리학 등의 다방면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영국 왕립 학회의 창립자로서 1680년에서 1682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아이작 뉴턴과 블레즈 파스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과학과 건축의 발전을 위해 기계 과학과 융합이 필요함을 인식했고, 이 생각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로부터 기인한다. 렌의 건축에 영향을 준 것은 1665년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던 파리로의 여정이었다. 여기서 렌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에 주목하게 되었고 당대 가장 위대한 예술가였던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의 만남은 그의 건축가로서의 직업에 큰 영향을 남겼다.
세인트 폴 대성당(1675-1710)
렌이 남긴 최고의 걸작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사도 바울을 위해 헌정된 세인트 폴 성당이 이곳에 처음 위치한 것이 604년이다. 이후 여러 번의 개축과 신축을 거듭하여 1710년 지금의 대성당이 자리하게 되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111미터의 거대한 돔을 가진 런던의 랜드마크이다. 정면 파사드는 두 개의 탑이 지지하는 이층의 코린트 주두로 이루어져 있다. 코린트 기둥은 쌍으로 배치되어 안정성과 규칙성을 유지하고 있다.
세인트 폴 대성당의 공학적 특징은 이중 쉘 구조의 돔이다. 이 구조체는 외부와 내부에 두 겹의 구조체를 띠고 있다. 두 겹의 구조체를 지지하는 원통형의 하단부 돔이 수평력을 지지하고 있다. 내부 구조체의 안쪽 면에는 조각과 벽화가 완성되어 있고, 외부 구조체와의 사이에는 관리를 위한 동선과 최상층부 랜턴을 통해 내려오는 빛이 건물 내부에 도달할 수 있는 원형의 개구부가 존재한다. 내부 구조체는 판테온의 오큘러스와 같은 구조를 이어받고 있다. 랜턴을 통해 내려오는 빛은 한 겹을 뚫고 건물 내부를 비추어 어른거리는 신비감을 자아낸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프랑스 바로크의 엄청난 규모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적 단순함을 모두 갖춘 건축물로써 런던을 대표한다.
16세기 이탈리에서 유행했던 팔라디오 양식은 17세기 영국과 미국에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초 영국의 이니고 존스 (Inigo Jones, 1573-1652)는 1613-14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며 팔라디오의 건축 4서의 사본을 구했다. 또한 팔라디오의 제자 빈센초 스카모치(Vincenzo Scamozzi, 1548-1616)를 만나 팔라디오 건축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팔라디오의 건축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엄격하고 이론 중심의 고전주의를 영국의 신-팔라디오주의(Neo-Palladianism)이라고 부른다.
[퀸즈 하우스]
이니고 존스는 1616년 런던의 그리니치에 제임스 1세의 아내인 덴마크의 앤을 위해 '여왕의 집'(Queen's house)를 설계한다. 1619년 여왕이 사망하자 건축은 중단되었고, 1629년 찰스 1세는 그의 프랑스 아내 헨리에타 마리아를 위해 건물을 완성했다.
이니고 존스는 팔라디오의 팔라초 키에리카티의 전형적인 팔라초 양식을 근간으로 퀸즈 하우스를 설계했다. 중앙 2층부에 발코니를 둔 퀸즈하우스는 팔라초 키에리카티와 음각, 양각의 관계로 볼륨의 반전을 주었다. 사용된 주두 역시 두 건물 모두 이오니아 양식을 채택했다.
터너의 그림과 같이 템즈강 하류의 그리니치 공원에서 런던을 바라보면 공원 아래에 그림과 같이 서있는 퀸즈 하우스의 모습과 멀리 도심 속에 우뚝 솟은 세인트 폴 성당이 보인다.
[치즈윅 하우스]
신 팔라디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18세기 초 영국의 곳곳에 등장하는데 또 하나의 대표적인 작품이 치즈윅 하우스(Chiswick House)다.
런던의 하운슬로 내의 치즈윅 지구에 위치한 빌라는 벌링턴의 3대 백작 리처드 보일(1694-1753)이 설계하고 건설한 신 팔라디오 양식의 건물이다. 벌링턴 경의 도서관 목록을 보면 그가 팔라디오뿐 아니라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같은 이탈리아 건축가의 작품뿐 아니라, 필리베르 드 롬, 앙투안 데고데와 같은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의 작품들 역시 섭렵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빌라의 모티브로 삼은 것은 팔라디오의 "La Rotonda"로 한눈에 보아도 그 유사성이 드러날 정도이다.
영국은 프랑스의 과시적이고 장식적인 건축 양식을 거부하고 청교도의 금욕주의에 적합한 절제되고 단순한 고전주의 건축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러한 고전주의에 대한 동경은 영국식 정원 양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픽처레스크]
"그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단어 그대로 옮긴 것이 픽처레스크(picturesque)이다. 1782년 윌리엄 길핀은 영국의 여유로운 여행자들에게 "그림 같은 아름다움의 규칙에 따라 영국의 모습을 조사하라"라고 그의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전 유럽이 그랜트 투어(Grand Tour)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고향인 로마와 그리스를 향해 달려갈 때, 영국의 일부에서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시골 영국에 대한 탐험이 대륙의 고전지향적인 풍토에 대항하고자 했다. 고전적인 특징인 규칙성과 대칭성에 반해 픽처레스크의 특징은 "우연적인 불규칙성"에 집중했다.
당시 정원 설계자들이 주목한 것은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이었다. 신화적 인물들을 자연 속에 배치하고 주변에 고전적 건축물로 마무리한 로랭의 회화 기법은 그들이 바라던 목가적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그들의 정원에 있는 건축물은 실용적 목적보다 시각적 기점(visual target)으로서 기능했다.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 사회 비평가, 사설 만화가 등으로 활동한 호가스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회화와 조각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 초상화를 훌륭히 그려냈다. 그는 회화의 실질적 사회 기능, 즉 효용적 가치를 강조했으며 청교도적 가치를 추구하여 회화가 감상자들로 하여금 교화적 기능을 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시도를 "예술의 도덕화"라고 부르며 호가스는 <창녀의 편력>과 <탕아의 편력> 등을 통해 사회에 도덕적 메시지를 던진다. 탕아의 편력은 총 8편으로 구성된 시리즈물인데 유화 버전과 판화 버전이 동시에 존재한다. 주인공은 부유한 상인의 상속자인 톰 레이크웰(Tom Lakewell)로 그의 쇠퇴와 몰락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I. 상속자, II. 레베, III. 선술집, IV. 체포, V. 결혼, VI. 도박장, VII. 감옥, VIII. 베들렘의 정신병원.
<탕아의 편력>의 상속자 편에서 주인공 톰은 옷을 맞추고 있다. 화면의 왼쪽에 울고 있는 여성은 그의 약혼녀 사라 영이다. 왼손에 반지를 쥔 사라는 임신한 몸으로 그와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톰은 몇 푼 되지 않는 동전을 그녀에게 건네며 약속을 무효로 돌리고자 한다. 이에 그녀의 어머니는 그의 파렴치함에 분노하고 있다. 그의 뒤편의 회계사는 동전 몇 닢을 톰 몰래 취하는 중이다.
방탕한 놀음을 즐기는 톰 주위에 많은 여성들이 보인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보이는데 당시 유럽에 만연하던 매독을 감추기 위해 얼굴에 점들을 그렸던 것을 보여준다. 그를 둘러싼 두 여인은 톰의 시계를 훔치느라 여념이 없다. 결혼 편에서 톰의 신부는 늙은 여인이다. 톰은 재정적 문제로 돈 많은 늙은 여인과 혼인한다. 오른편 입구에는 아이를 든 사라 영과 그녀의 어머니가 분노하고 있고, 그들의 앞을 경호원이 막아선다.
감옥 편에서는 겁에 질린 톰이 소리 지르는 부인 옆에서 경직된 자세로 앉아있다. 그는 도박빚으로 인해 수감된 상태이다. 오른편에 자신의 아이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혼절한 사라 영이 보인다. 정신 병원 편에서 톰은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그의 곁에는 사라 영 밖에 없으며 해골 같은 얼굴로 기도하는 환자, 왕관을 쓴 엄숙한 환자 등 갖은 정신 이상자들이 즐비하다. 왼편의 잘 차려입은 두 귀족 여인은 음악대를 대동하고 이 광경을 즐기고 있다. 당시 정신 병원은 귀족들의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연극 애호가였던 호가스는 편견이나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창적인 양식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친구인 데이비드 개릭을 위한 초상화에서 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다.
1745년 호가스는 18세기 영국의 연극을 부흥시킨 극작가이자 배우 데이비드 개릭의 초상을 그린다.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의 리처드 3세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살해한 사람들의 유령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연기하는 개릭을 그린다. 일반적인 초상화와 달리 역사화에 사용되는 회화 기법에 인물의 얼굴만 초상화의 대상으로 바꾼 격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인물에 살아있는 생동감을 불어넣는 개릭의 뛰어난 연기력을 표현한 초상화이다. 호가스가 죽고 난 후 개릭은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안녕, 인류의 위대한 화가여.
그는 예술의 가장 고귀한 지점에 도달했고,
그의 그림 속 도덕은 정신을 매료시키고,
눈으로 심장을 사로잡는다.
천재가 당신을 불태운다면, 독자여, 머물러라.
자연이 당신을 어루만진다면, 눈물을 흘려라.
만약 둘 다 당신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돌아서라.
호가스의 명예로운 먼지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호가스는 1753년 <미의 분석>이라는 책을 남긴다. 여기서 다음의 아름다움의 6가지 원칙을 세운다.
I. 적합성, II. 다양성, III. 규칙성, IV. 단순성, V. 복잡성, VI. 숭고함
호가스는 "동일성"이 주는 불쾌감을 경계하고 다양한 인물과 볼거리를 강조했다. 그는 작품 속의 요소들이 설명 가능해야 함을 주장하고(적합성), 단순함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은 인정하지만, 많은 양(위대함)이 주는 미적 효과를 높게 평가했다(숭고함). 또한 선에 대한 그의 견해는 흥미로운데 직선, 직각, 평행선, 직각 교차선과 같은 고전적 요소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 수는 있지만 정지, 죽음 또는 무생물을 의미한다고 했다. 반면 S자 모양의 곡선은 생동감과 활동성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18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조슈아 레이놀즈 경은 자연을 주의 깊게 모방하는 것보다 일반화와 이상화를 통한 주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화에 주로 사용되던 "위대한 양식(grand manner)"을 초상화에 적용했다. 로마의 조각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영향을 이어받고, 루벤스와 반 다이크의 초상화를 학습하여 자신의 양식을 완성해 나갔다.
<해링턴 백작 부인 제인>에서 여인의 포즈와 옷차림은 여신의 그것에 비견될 만큼 화려하고 우아하다. 그녀의 뒤로 부이는 배경은 아카디아를 연상시키는 이상적 풍경으로 비친다. <히스필드 경>은 1779년부터 1783년까지 이어진 지브롤터 대공성전의 주지사이다. 미국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으로부터 지브롤터를 빼앗으려 할 때 조지 어거스트 엘리엇(George Augustus Eliott), 1대 히스필드 남작(Baron Heathfield)이 지브롤터의 수비대를 이끌고 승리를 이끌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며 대리석 기념물과 조각상이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의 남쪽 익랑에 위치하고 있다. 레이놀즈 경은 히스필드 경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오른손에 베드로의 열쇠를 쥐어주었다. 하늘을 응시하며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히스필드 경의 모습을 표현한 동시에 뒤편의 대포와 검은 연기가 전쟁의 치열함을 나타낸다. 레이놀즈 경의 이러한 "그랜드 매너"는 19세기 후반 중산층을 모델로 하는 과시적 형태의 "스웨거(swagger) 초상화"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초상화와 풍경화로 일갈을 이룬 게인즈버러는 반 다이크의 영향과 윌리엄 호가스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발전시켰다. 풍경화를 즐겨 그리고자 했던 자신의 취향과는 달리 초상화를 통한 수입이 주를 이루자 초상화에 풍경화적 요소를 부각했다.
<서퍽의 레이드 로이드와 그녀의 아들 리처드 새비지 로이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의자에 앉은 여인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게인즈버러는 실내에서 인물의 포즈를 취하게 하여 그림을 그린 뒤 배경은 따로 그려서 마무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블루 보이>에서 소년은 부유한 철물 상인의 아들 조나단 버탈(Jonathan buttall, 1752-1805)이다. 화가는 자신이 존경하던 반 다이크 시대, 즉 17세기의 옷을 18세의 조나단이 입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주로 붉은색의 옷을 입던 반 다이크와 달리 푸른 옷을 입은데 대해 레이놀즈의 색채론에 대한 도전이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레이놀즈가 글을 쓰기 8년 전에 이 작품이 나왔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한번 논란이 된 색채론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레이놀즈의 색채론은 다음과 같다.
<내 의견으로는, 그림 속 빛의 덩어리는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상, 즉 노란색, 빨간색 또는 황백색이어야 하며, 파란색, 회색 또는 녹색은 이러한 덩어리에서 거의 완전히 제외해야 하며, 이러한 따뜻한 색상을 뒷받침하거나 강조하는 데만 사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차가운 색상을 소량 사용하면 충분합니다. 이러한 방식을 반대로 하면, 빛은 차갑고 주변 색상은 따뜻한 경우를 로마와 피렌체 화가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손에서도 그림을 훌륭하고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 예술의 힘을 벗어날 것입니다.>
레이놀즈는 빛의 덩어리의 색을 루벤스와 티치안과 같이 전형적인 노란색, 빨간색 또는 황백색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졌다. 하지만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호가스와 교류한 게인즈버러는 그와는 달리 푸른색의 빛이 주는 밝고 젊은 느낌을 선택할 수 있는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게인즈버러의 <앤드류스 부부>는 넓은 부지 앞의 부유한 두 부부의 모습을 그린다. 로버트 앤드류스는 런던의 부유한 은세공인의 아들인 부르주아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지주들에게 터무니없는 이자율로 돈을 빌려주고 대규모 사업을 운영했다. 그의 아내 프랜시스 메리 카터 역시 옷감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된 하층 젠트리 출신이었고, 둘의 결혼을 통해 앤드류스는 부유한 젠트리 계층으로 영국의 상류층에 속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지참금으로 가져왔고 그림의 배경은 서드베리 근교의 오베리스라는 지역의 땅이다. 두 가문의 결혼이 굳건한 약속임을 보여주기 위해 화면의 우측 하단의 함께 묶인 짚단이 보이고, 혼인을 통해 튼실해진 두 가문의 통합은 앤드류스 부인의 뒤편의 굵은 나무로 표현된다. 자연스러운 앤드류스의 포즈와 달리 부인의 자세는 굉장히 경직되어 있는데, 그녀의 얼굴을 그린 후 마네킹에 옷을 입혀 나머지 몸을 그렸다고 한다.
대부분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샤르댕은 200여 점의 작품만을 남겼다. 그는 장르화를 판화 형식으로 판매하여 인기를 얻었는데 현대적 개념의 "로열티"라 불릴 만한 것으로 수익을 얻었다. 정물화의 거장으로 알려진 그는 신중하고 균형 있는 구성과 부드러운 빛의 확산에 중점을 두었다. 샤르댕은 물감을 덩어리 지거나 두껍게 그리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이용하여 정물화의 질감을 살렸는데 1770년 이후 급격히 나빠진 시력으로 인해 파스텔로 작업하기도 했다.
샤르댕의 정물화는 빌렘 칼프의 그것과 같이 선명하지 않다. 칼프의 사진 같은 선명함을 지닌 정물화와 달리 샤르댕의 정물화는 자연스러운 현실감을 준다. 레몬과 빵의 매끄럽지만은 않은 질감과 유리병과 유리잔의 투명함, 노끈과 복숭아의 거친 표면, 도자기로 만든 손잡이가 있는 물병의 매트한 표면의 표현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그려진 것이 없다.
샤르댕의 대표작 <가오리>는 먹이를 보고 신경이 곤두선 고양이의 표정과 눈빛, 테이블을 감싼 천과 유리병의 반짝거림, 매달린 가오리의 뜯긴 복부와 가감 없이 드러낸 내장과 뼈를 냉정하게 그려냈다. 일상적인 공간의 소소한 물건 하나하나에 까지 소홀함이 없이 세심하게 그려낸 샤르댕의 그림에서 색채의 부드럽고 정교한 사용에 대해 앙리 마티스는 "독특하면서도 사실적인 구성"이라 극찬했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다채로운 색의 성당의 주랑"과 같다고 비유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드니 디드로는 샤르댕의 열혈 지지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를 "색채와 구성"의 위대한 화가라고 칭송했다. 청교도의 검소, 절제 그리고 금욕적 생활관을 가진 젠트리 계층에게 샤르댕의 일상적 공간과 사물에 대한 애정 어린 세심함은 충분한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평범한 가정의 아침의 모습을 그린 <감사 기도>는 두 소녀의 어머니가 아침 식사에서 반드시 해야 할 감사 기도 장면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작은 딸에게 식사를 준비하며 일러준다. 작은 딸의 의자에는 작은 북이 달려있는데 등받이에 등을 대지 말고 꼿꼿이 세우고 식사에 임해야 하는 식사 예절을 지키지 않을 시 자동으로 소리가 나게 만든 장치이다. 집안에 보이는 각종 집기들과 준비된 식사는 단출하고 소박하다. 1848년 저널 마가쟁 피토레스크의 16권에 익명의 비평가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바토는 풀밭 위에서 점심을 먹고, 달빛 아래를 산책하고, 그녀가 선택한 우아한 연인과 함께 변덕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작위를 받은 양치기와 양치기 소녀와 함께 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렸지만, 샤르댕은 정직하고 평화로운 내면을 그렸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전에 옷을 입히는 어머니와 자식에게 신의 이름을 더듬도록 가르치는 어머니를 그렸습니다... 한 세기가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을 듯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일치합니다.>
샤르댕의 정직하고 평화로운 내면에 대한 표현은 우리 삶의 평범함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고, 평범함에 주목할 때 우리의 일상은 생기 있고 보석같이 빛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샤르댕에게서 우리는 배웠다. 하나의 배도 여인과 같이 생기 있을 수 있고, 평범한 토기 주전자도 보석과 같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