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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Oct 02. 2024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 21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I -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이탈리아

배경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 종교개혁의 중심이 된 독일과 영국, 체코와 함께 당시 경제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네덜란드는 특히나 다양한 예술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 과정에서 초상화가 널리 보급되고 예술가들의 명성 또한 일반 대중에게 알려졌다. 예술의 주제 역시 종교적 내용의 한계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다. 반면 종교개혁으로 많은 지역과 신도를 상실한 로마 카톨릭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을 감행한다. 예수회를 필두로 한 반종교개혁 (Contrareformatio) 혹은 카톨릭 개혁 활동은 교황청 중심의 교리 재확인과 선교 및 교육 활동의 장려, 면죄부/대사 남용의 규제 등 부패한 질서와 체계를 재확립하는데 집중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이루어진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에서 폭넓은 예술 활동을 인정하는 등 진보적 개혁성이 묻어났다. 이로 인해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은 신도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기법을 보였다.


바로크 건축

앞서 본 바와 같이 최초의 바로크 건축물은 1584년 축성식이 이루어진 로마의 <Il Gesu(일 제수)> 예수회 교회다. 풍부한 장식과 중앙으로 집중되는 입면의 구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곡선과 입체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17세기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을 통해 바로크 건축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같은 시기 로마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놀라움을 자아내는 바로크 예술가들이 등장하는데 보로미니는 건축 부분을 대표한다.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Francesco Borromini, 1599-1677)

본명이 프란체스코 카스텔리(Francesco Castelli)인 보로미니는 미켈란젤로의 건축과 고대 유적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고전 양식을 변형하고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통해 창의적 건축을 시도했다. 1619년 먼 친척인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 1556-1629)가 있는 로마로 이주한 그는 당시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의 책임을 맡고 있던 마데르나의 추천으로 베르니니와 함께 성베드로 성당의 청동 캐노피 작업을 맡게 된다. 마데르노의 사망 이후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총애를 받던 베르니니는 건축가로서의 보로미니의 재능을 인정하고 우르바노 8세 재임 기간 중 보로미니는 많은 건축물의 설계를 맡게 된다. 이후 두 천재 예술가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는데 성 베드로 성당의 건설 및 건축가 관리를 맡았던 베르니니가 보로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약속한 프로젝트의 일부를 다른 이에게 넘겨준 일과 재정적 문제 등이 그 이유로 여겨진다. 사교적이고 세련된 외모의 베르니니에 비해 내향적 성격이었던 보로미니는 능력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았다. 교황 알렉산더 7세가 즉위하자 교황의 친구였던 베르니니가 보로미니의 건축이 "기괴한 고딕 양식"이라고 비난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지는 의뢰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67

보로미니의 대표작으로는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가 있다. 주목을 끄는 입면의 곡선은 물결치는 듯한 역동성을 보인다. 오목한 곡선에서 다시 볼록해져 돌출된 중앙부는 단연 시선을 끈다. 보로미니 건축의 입면은 하나의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운동성을 갖는다. 내부 평면은 타원형으로 기존 장축형 교회의 직선적 동선이 가지는 한계와 원형 교회의 정적인 특징을 혼합하여 타원형을 채택한다. 타원의 길이 방향에 제단이 있고 교회의 중심에서 위를 바라보면 육각형, 팔각형, 원형, 십자가로 이루어진 돔의 장식이 눈에 들어온다. 클레어스토리를 통해 들어온 빛은 천장을 밝게 빛나게 하고, 그 중심에 성삼위일체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원과 삼각형의 도형 안에 위치한다. 

<산티보 알라 사피엔차(Sant'Ivo alla Sapienza)>,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1642-44

보로미니의 건축적 재능을 알 수 있는 <산티보 알라 사피엔차)>는 기존의 2층 아케이드 건물 사이에 계획된 성당이다. 이 건축물의 디자인은 로마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 중 하나로 꼽히는데 당시에 대학으로 쓰이던 건축물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것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자코로 델라 포르타(Giocomo della Porta)가 맡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602년 사망했다. 1642년 작업을 맡게 된 보로미니는 양측의 아케이드의 높이를 기준으로 전체 건축물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 양식에 맞추어 두 층의 기둥과 아치가 이어지는 듯한 디자인을 택했고 양측의 건물이 잘리듯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이어질 수 있는 곡선으로 마무리했다. 이로써 중정부에서 교회의 입구로의 자연스러운 깊이감이 생기게 되고 뒤편에 솟아오른 교회의 평면의 곡선 평면이 도드라지게 된다. 

교회의 평면은 삼각형과 원을 통한 기하학적 조합을 통해 계획했고 이로써 독특한 형태의 평면과 천장부가 완성되었다. 

돔 위의 첨탑부는 교황의 모자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16세기 교황청은 새로운 별명을 얻었는데 <La Sapienza>, 즉 '지혜'라는 뜻으로 세속적이고 일시적인 지혜가 아닌 신적이고 영원한 지혜를 의미한다. 기독교적 학문과 세속적 학문의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다음의 문장으로 표현된다.


<INITIUM SAPIENTIAE TIMOR DOMINI>

(모든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도서관 건물에 추가된 산티보는 세속적 지혜에 대한 카톨릭의 위치를 재인식시키는 시각적 교육의 기능을 형상화했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Gian Lorenzo Bernini, 1598-1680)

조각가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받았던 베르니니는 전문적인 건축 교육을 받지 않고도 건축가들과 작업했고 성 베드로 성당의 열쇠 모양의 광장을 설계했다. 타고난 재능과 사교성으로 여러 교황의 총애를 받으며 다양한 의뢰를 받고 남은 작품을 남겼다. 건축에서 그의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보로미니와 비교하여 적절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너무 뛰어난 보로미니의 건축적 재능에 비해 베르니니는 조각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Sant' Andrea al Quirinale)>,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61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의 어마어마한 입면의 높이는 좁은 길에서 한눈에 포착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베르니니의 이름으로 남겨진 완전한 건축물은 몇 개 되지 않는데 이 건물은 조반니 데로시와 함께 설계되었다. 정면에 보이는 양머리 모양의 볼루트는 높은 건물의 하중을 옆으로 분산시키는 고딕의 버트레스와 같은 역할을 한다. 파사드의 평면적 구성과 본 건물의 원형형 부분은 낮은 담장을 통해 분리되어 있다. 정면의 거대한 사각기둥과 삼각박공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건축 요소가 혼재된 모습이고 돌출된 이오니아 양식의 원기둥은 중앙의 입구 부분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는 동시에 반원형의 돌출된 입구를 떠받치는 기능을 한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 형태를 원형으로 하는 전면부와 고대 로마의 판테온을 차용한 원통형의 내부 공간을 통합한 양식으로 베르니니는 전체적인 건물을 구성했다. 내부에는 성 안드레아를 위한 제단이 있고 제단에는 기욤 쿠르투아(Guillaume Courtois)의 <성 안드레아의 순교> (1668)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안드레아(안토니오 라기의 작품)가 황금색 천장으로 시선을 이끈다. 베르니니는 그림, 조각, 건축의 종합을 통해 성 안드레아의 신격화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극장과 같은 건축물을 만들었다. 

<성 테레사의 환희>,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45-52

베르니니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조각가로서의 업적이다. 그의 <성 테레사의 환희>는 도발적인 표현으로 당시에도 구설수에 올랐던 작품이다. 환희에 찬 테레사의 모습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쾌락이라는 감정을 떠올린다. 그녀에게 화살을 꽂는 천사의 웃음에도 진지함이나 성스러움보다는 장난기나 음란함이 보인다는 비판도 있었다. 성 테레사의 자서전의 구절을 보면,


<그(천사)가 그것(황금화살)을 꺼냈을 때 그는 내 마음을 그와 함께 가져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고통이 너무 심해서 나는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무한한 달콤함을 느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이었지만 어느 정도 신체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가장 감미로운 보살핌입니다.>


베르니니는 성 테레사가 겪는 정신의 고통과 동시에 느끼는 만족감을 얼굴 표정으로 드러내었다. 정신적 고통과 만족감이 정신적인 것에서 끝났다면 성 테레사의 표정은 정적이고 굳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양가적 감정은 오묘하여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의 문화사학자 에곤 프리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 작품은 가장 정교한 예술의 숭고함으로 인해 영원히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무대 위에서만 얻을 수 있는 환상적인 효과.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매우 종교적인 개념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구성은 물론 디테일한 배치까지 곳곳에서 비밀스러운 기법을 느낄 수 있다.>

왼편: <아폴로와 다프네>,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2-25; 오른편: <아폴로와 다프네>, 폴라이우올로, 1470-80

베르니니의 <아폴로와 다프네>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is)>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사랑의 신 에로스를 조롱하다 황금화살을 맞은 아폴로는 처음 본 다프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복수를 위해 에로스는 다프네에게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납화살을 쏘게 되고, 아폴로는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미움을 받는 복수를 당하고 만다. 오비디우스는 이 장면을 <사랑에 빠진 신은 추적을 하고, 비웃는 처녀는 혐오스러운 포옹을 피한다>라고 기술한다. 폴라이우올로는 상황 자체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베르니니는 아폴로를 피하고자 하는 다프네의 격정적이고 절실한 움직임과 표정을 잡아낸다. 그녀가 뻗은 두 팔과 아폴로의 오른팔이 대칭되어 대각선 방향으로의 역동성을 배가시킨다. 베르니니는 이 작품을 <ex uno lapide(하나의 돌로 만든)>로 만든다.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있는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한 것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어떤 조각도 베르니니의 이 작품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도록 하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신체에 대한 완벽한 분석과 재현을 이루었지만 베르니니는 미켈란젤로로부터 배운 기술에 자신의 구성을 추가한다. 두 인물의 옆모습이 드러난 각도(왼편)에서는 아폴론과 다프네의 추적의 긴박감과 그를 피하고자 하는 그녀의 절실한 몸짓이 강조된다. 한편 두 인물의 얼굴이 드러나는 (가운데) 각도에서는 뭔가에 홀린 듯한 아폴론의 표정과 그를 혐오스러워하며 절실하게 그로부터 멀어지려는 다프네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본(오른편) 각도에서는 아폴론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그에게 붙잡힌 힘없는 다프네의 초라함과 그녀를 붙잡는 아폴론의 지배적 모습이 강조된다. 이러한 다양한 각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장면의 연출을 하나의 조각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 바로크 조각의 정수라 할 수 있다. 큐레이터 루벤 C. 코르도바는 베르니니의 조각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베르니니는 시각적으로 눈부시고, 극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찬사를 받은 조각상은 교회가 찾던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베르니니가 반종교개혁의 최고 시각 선전가이자 로마 바로크의 가장 중요한 창조자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왼편: <성 사비나의 납치>, 잠볼로냐, 1579-83; 오른편: <페르세포네의 납치>,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1-22

베르니니의 입체적 조각은 잠볼로냐에서 이미 시도되었다. <성 사비나의 납치>에서 보여준 회오리치며 상승하는 인물들의 역동적 배치는 베르니니의 <프로세피나의 납치>에서도 발견된다.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감정 표현은 과도하리 만치 절실하게 관찰자에게 전달된다.

베르니니가 잠볼로냐를 능가하는 부분은 역동성에 생동감을 추가한 것이다. 미술사학자 히바드는 베르니니의 위대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피부의 질감, 밧줄처럼 날아다니는 머리카락, 페르세포네의 눈물 그리고 무엇보다 굴복하는 여인의 살결>


하데스로부터 벗어나려는 페르세포네의 무기력한 몸부림과 하데스의 거친 손길이 그녀의 허벅지를 감싸 쥐며 그녀의 시도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녀의 짓눌린 허벅지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살결과 같이 여겨지며 딱딱한 대리석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다비드>,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23-24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이전의 다비드에 대한 거장들의 시선과는 다르다. 그의 다비드는 돌팔매질 직전 가장 힘이 응축된 상태를 표현하고 있으며 극적인 상태에 뒤틀린 근육과 굳게 다문 입술은 온몸에 축적된 힘을 가시화해 보여준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각도(오른편)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과 밧줄을 당기는 긴장된 두 팔은 돌덩이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만 같이 느껴진다.

왼편: <다비드>, 도나텔로, 1440년경; 오른편: <다비드>, 미켈란젤로, 1501-04

여성 혹은 소년과 같은 민틋한 몸매의 도나텔로의 다비드와 아름다운 비율로 서있는 건장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신체의 아름다움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혹은 승리한 다비드의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조각상은 정적이다. 이미 승리한 후의 영원한 영광을 얻은 다비드에게서는 어떠한 절실함과 역동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른편: <폴리페모스>, 안니발레 카라치, 1597

베르니니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폴리페모스>에게서 이러한 역동적 모델을 찾은 듯하다. 오디세우스에게 속고 눈을 잃은 폴리페모스가 분노하여 돌을 던지는 장면을 그린 카라치의 회화에 드러난 역동성을 베르니니는 조각에서 구현했다. 바로크 예술은 조각으로 회화적 서사와 감동을 표현하려 했고, 회화에서 조각의 질감과 입체감을 표현하려 했다. 이러한 장르를 넘나드는 바로크 예술은 시각이 닿을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고자 했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을 발견하려 했다.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Giovanni Battista Gaulli, 1639-1709)

제노바의 '게으르고 뚱뚱한 사람'이라는 별명 "Il Baciccio"을 지닌 가울리는 반 다이크의 초상화에 영향을 받아 당대 초상화가로 성공한다. 베르니니와 친분이 있었던 그는 말년의 베르니니의 초상화를 남긴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초상>,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1665?

반 다이크가 인물의 성격과 삶을 표현하는데 정통했듯 가울리도 자신감에 찬 한 예술가의 모습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았다. 늙고 주름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고 자신감 있는 표정과 오른손으로 자신의 작품을 가리키는 듯한 그의 손짓은 환상적 작품의 세계로 관람자를 초대하는 듯하다.

<예수의 성스러움을 찬미함>,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1670-83

한편 코레조의 천장화를 연구하던 가울리는 로마의 일 제수 성당의 천장화 작업을 책임진다. 가울리는 <예수의 성스러움을 찬미함>에서 중앙 윗부분에 빛의 중심을 두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sotto in su" 기법을 사용한다. 중심에서 멀어진 곳에 둥그렇게 둘러싼 일군의 무리들이 구름 위에 올라있다. 관람객에게는 구름의 어두운 부분이 드러나고 이 구름과 인물군은 건축물의 경계를 넘어 공중에 떠있는 듯 느껴진다. 이 눈속임 효과(Trompe-oeil)는 매우 강렬하게 공간을 지배한다. 어디까지 건축인지, 어디부터 조각이고 다시 어디부터 그림이 시작되는지 분간하기가 매우 어렵다. 여기서 건축과 조각과 회화는 하나의 종합 예술로 승화된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

"18세기 유럽 최고의 장식화가"로 알려진 티에폴로는 초기에는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의 시도를 답습하는 것 이상의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왼편: <클레오파트라의 연회>,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43-44; 오른편: <최후의 만찬>, 틴토레토, 1580

티에폴로는 <클레오파트라의 연회>를 여러 번 그린다. 공통적으로 바닥의 격자무늬를 통한 투시도법에 대한 집착과 인물들의 다양한 깊이감을 통한 공간감의 확보는 틴토레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고전 건축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배치하여 웅장한 느낌을 부여했다. 

<에피게네아의 희생>,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57

<에피게네아의 희생>에서 역시 바닥의 격자무늬는 반복되고 전면에 드러난 이오니아 양식 기둥과 뒤편으로 물러난 이오니아는 각각 다른 색으로 표현하여 그 사이에 있는 인물들이 배치될 공간에 대한 객관성을 보장했다. 오른편 기둥을 감싸고 선 한 인물을 통해 공간적 개입을 시도하는 최소한의 노력이 보인다. 화면의 왼편에 구름은 객관적 상황에 신비한 느낌을 부여하여 전체적인 이야기에 서사를 부여한다.

왼편: <원죄 없는 잉태>,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67-68; 오른편: <천국의 여왕 마리아>, 알브레히트 뒤러, 1511

초승달 위의 마리아는 순결한 마리아를 그린 작품이다. 뒤러의 <천국의 여왕 마리아>에서 드러난 마리아는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아기 예수를 안고 초승달 위에 앉아있다. 그녀의 머리 위로는 월계관을 떠올리는 원형의 빛이 성스러움을 표현한다. 티에폴로의 <원죄 없는 잉태>에서는 전통적인 마리아의 색채인 붉은색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인자하다기보다 단호하고 굳은 표정으로 발아래에 짓밟힌 선악과를 물고 있는 뱀을 내려본다. 그 주변으로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든 천사와 장미가 보인다. 

왼편: <거울 앞의 비너스>, 티치아노, 1555-60

백합을 든 천사의 아래로 금색 테두리의 거울이 보인다. 거울모티브는 회화에서 특정 주제를 위해 등장한다. 티치아노의 <거울 앞의 비너스>에서 거울에 비친 비너스의 모습은 거울 앞의 그녀와 다르다. 자세히 보면 거울 속의 비너스는 백발의 늙은 여인이다. 거울이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법의 거울"일 수도 있고, "거울에 비친 허영심의 구체화된 여성의 전형"으로 비너스를 그렸을 수도 있다. 또한 스스로를 반성케 하는 교훈을 담은 "너 자신을 알라"와 같은 바니타스의 모티브일 수도 있다. 거울의 도상학은 "진실"로 그것이 비추는 모든 이들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티에폴로의 거울에 비친 것은 원죄를 저지른 뱀으로 백합을 든 천사가 거울에 비추어 뱀을 바라보고 있다. 마리아가 뱀을 거울에 비추어 원죄를 스스로 반성케 하는 메시지를 티에폴로가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프란체스코 구아르디 (Francesco Guardi, 1712-1793)

아버지와 두 형제 모두 화가였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구아르디는 가족 작업장에서 자라고 화가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구아르디는 카날레토의 베네치아 풍경화를 보며 자신도 풍경화에 몰두하게 되었다. 

왼편: <베네치아 캄포의 풍경>, 1780년경; 오른편: <산 마르코 앞의 곤돌라 행렬>, 1782

그는 카날레토와 같이 베네치아의 곳곳을 그렸으며 바다가 없는 도시의 모습도 그리곤 했다. 그가 그림의 주제를 선택하는데 독창성을 없었을지는 모르나 그의 그림이 풍기는 분위기는 매우 독특하다. 뭔가 완성되지 않은 거친 손길이 느껴지는 듯한데,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어놓은 듯한 터치가 느껴진다. 그의 이러한 특성을 <pittura di tocco>(촉각적 회화)라고 표현한다. 

<칸나레기오 운하의 풍경>, 프란체스코 구아르디, 1775-80

<칸나레기오 운하의 풍경>에서는 그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돋보이는데 섬세한 듯 어설픈듯한 붓터치는 '의도적이면서 자유로운 규칙 위반'을 뜻하는 <Cappricio(카프리치오)>로 표현된다. 이러한 '촉각적'이고 '자유분방'한 그의 회화는 이후 인상주의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로마 카톨릭의 영향권에 있던 이탈리아의 예술은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바로크 미술의 발전을 완성하는데 그쳤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 같은 걸출한 천재를 배출했으나 그 이후의 단계로 이행하기 위한 다수의 예술가들의 등장을 이끌지는 못했다. 예술가가 배출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의뢰가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교황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의뢰는 수는 다수의 부르주아와 중산층이 유치하는 의뢰의 수를 따라올 수가 없었다. 또한 작품의 주제 또한 초상화였던 개신교 지역에서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다수의 작품이 제작되고 판매되었다. 수없이 많은 시도는 새로운 미술을 창조해 내는 필수요소다. 

시각적 효과의 정수를 뽑아낸 로마 바로크가 미술과 함께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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