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거울 - 17세: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17세기를 전쟁으로 시작했다. 2기에 걸쳐 8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네덜란드 독립전쟁'이었다. 이전부터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지배를 받던 현 네덜란드 지역은 지배 세력들의 종교였던 카톨릭이 자신들의 피지배 상황에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칼뱅파 개신교도들의 주도로 독립을 시도한다.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았던 남부 지역은 카톨릭 국가였던 현 프랑스와 독일과의 지리적 인접성으로 1830년 벨기에 혁명을 통해 독립하게 된다. 바다와 가까운 북부 지역은 저지대로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국가 혹은 주들을 '저지대 국가'로 불렀고 이것이 네덜란드어(neder- )로 표현된 것이 'Nederlands'이다. 네덜란드의 국명이 복수형인 것은 이 지역의 국가들을 총칭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받은 카를 5세(1500-1558)는 네덜란드 겐트 출신으로 1519년 19세의 나이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로 선출된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카를 5세의 등장으로 그의 지역 주민들은 세금에 대한 부담이 낮아질 것으로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종교개혁의 물살에 각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던 카를 5세는 오히려 자신의 관할 지역에 대한 세금을 대폭 인상했다. 어마어마한 상업적 이익을 구가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노력을 부정당하는 듯했고 칼뱅의 예정설은 이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칼뱅은 면죄부를 사는 행위가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했고,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 돈을 버는 행위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제거하는데 기여하여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카톨릭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지역의 예술가들은 거대한 클라이언트를 잃었고 새로운 고객을 유치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전부터 그려오던 종교화 대신 초상화 작업과 풍경화 그리고 풍속화에 큰 비중을 두어 작업했다. 이어지는 작가들은 네덜란드가 무역, 군사, 과학, 예술 등의 모든 분야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다.
렘브란트, 얀 베르메르와 함께 17세기 위대한 네덜란드의 3대 화가로도 불리는 프란스 할스는 1644년 네덜란의 하를렘(Haarlem)의 화가 조합 회장을 역임했다.
데카르트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초상화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할스는 당시에 결함으로 여겨지던 붓놀림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자신의 시그니처 기술로 완성시켰다. 프랑스의 예술 비평가 레이몽 코니아(1896-1977)는 그를 "그 시대의 마네"라고 칭하며 "눈앞에 실체와 공간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한 인물만 등장하는 초상화뿐 아니라 다수가 등장하는 그룹 초상화도 남겼다. 위의 두 작품에서는 그의 공통적인 인물 배치가 눈에 띈다. 화면의 중앙 부근에 위치한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인물이 뒤돌아 서있고 왼편 모서리에 깃발을 든 인물이 서있다. 이전의 그룹 초상화들은 인물들을 일렬로 배치한 반면 뒤돌아 선 인물을 두어 배치에 공간감을 두는 동시에 단조로울 수 있는 인체의 포즈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또한 왼편의 깃발을 든 인물을 두어 한쪽으로 닫힌 공간 구성을 통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인물을 소개하는 듯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자발적 도시 경비대 혹은 시민 민병대를 조직하여 도시를 방어하고 재난에 대처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에 따라 조직된다. 위의 두 그림에서의 주요 무기는 할버드로 창에 도끼의 날과 같은 것이 부착된 무기이다. 이러한 길드를 슈터슈툭(Schutterstuk) 혹은 슈터레(Schutterji)로 부르는데 대장은 부유한 지역 유지가 맡았고 기수는 부유한 젊은이가 맡았다. 2년 동안 임원으로 활동하고 나서 다른 공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고 회원들은 스스로 무기와 옷을 사 입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과 같이 자신들의 역할에 자부심이 강했던 이들을 위해 집단 초상화는 그들의 늠름한 모습을 남기기 위해 주기적으로 예술가들의 일거리가 되었다. 이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위의 그림에 대해 언급한다.
<20개가 넘는 머리가 있어. 정신과 생명으로 반짝거리고 빛나는, 어떻게 그렸는지!...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정말로 경이로운 일이야. 들라크루아는 분명 마음에 들어 했을 거야. 정말 엄청나게 좋아했을 거야.>
네덜란드의 해양 풍경화를 대표하는 작가는 지몬 데 블리헤르이다. 그는 제도사, 태피스트리, 에칭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해양 풍경화로 가장 잘 알려진 그는 델프트 (Delft)에 거주하는 동안 해안에 부딪히는 바다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그는 선박의 세부 묘사와 바닷물의 색상과 파도가 부서지는 효과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데 관심을 두었다. 그의 작품에 드러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가 네덜란드의 하늘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점이다.
지몬 데 블리헤르와 함께 풍경화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은 '색조'를 통해 풍경화에 또 다른 느낌을 부여한 얀 반 호이엔이다.
반 호이엔은 오래된 풍경화의 느낌을 주기 위한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의 그림이 시간이 지나서 낡은 분위기를 풍긴 것은 아니다. 그는 참나무 판에 가죽 접착제를 여러 겹으로 칠한 후 날카로운 칼날로 표면을 긁어내어 그 부분에 갈색 혹은 붉은색으로 물들여 배경으로 사용했다. 이 위에 펜과 잉크 등으로 빠르게 스케치하였다. 그 위에 채색한 물감을 표현에 녹아들어 밝은 빛 대신 무거운 느낌의 색조를 띤다.
블리헤르와 같이 해양 풍경화를 많이 남긴 반 호이엔이지만 블리헤르의 밝고 선명한 묘사와 달리 무거운 공기가 만들어내는 입체감을 그의 독창적 표현이다. 한 미술사학자는 그의 그림에 다음과 같은 비평을 남겼다.
<1650년대 자유롭게 구성된 바다에서 그는 창조적 작업의 정점에 도달하여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내었다.> - H. U. Beck -
또한 고흐는 그가 정신병원의 철창에서 바라본 밀밭의 풍경에서 반 호이엔의 작품을 떠올렸다.
'네덜란드 황금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렘브란트일 것이다. 그는 초상화, 자화상, 풍경화, 우화 및 역사화, 성화, 장르화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고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완성했다. 렘브란트는 엄격한 칼뱅주의 라틴학교에서 습득한 성서, 역사, 고전, 수사학 등의 방대한 지식을 작품에 반영했다.
렘브란트는 이전 예술가들의 모티브와 기법들을 학습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발견했다. <십자가에서 내림>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내리는 장면을 묘사한 장면으로 루벤스의 아이디어를 차용한다. 하지만 빛이 비치는 부분을 더 좁게 만들고 예수의 크기를 더 작게 만들며 전체적인 시야를 더 넓게 만들어서 예수에만 집중되는 루벤스의 관점과 달리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전달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수에게 비친 빛이 루벤스의 그것보다 어둡더라도 주변을 더욱 어둡게 만들어 예수로 향하는 중심을 잃지 않으며 전체적인 분위기에 무게감을 두었다.
'북부의 티치아노'로 불렸던 렘브란트는 그에 대한 존경심 또한 가지고 있었다. 렘브란트가 남긴 신화 모티브의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유로파의 납치>를 보면 티치아노와 비교가 가능하다. 렘브란트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전체의 스토리를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따라서 특정 인물에 대한 과도한 부각보다 맥락과 상황을 전달하는 구성을 취한다. 그리고 티치아노의 작품에 비해 빛은 유로파와 해안의 두 여인에게 집중되어 있다. 천사와 같은 비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표현은 제한되어 있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호메로스의 흉상을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렘브란트 미술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부여한 것은 '관조'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딘가를 응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호메로스의 흉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깊이가 있다.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의 검고 깊은 그의 시선은 호메로스의 흉상을 통해 호메로스에게 대화를 거는 듯하다. 하지만 그와 호메로스는 눈빛을 마주칠 수 없다. 호메로스가 맹인이기도 하고 이미 죽은 그의 흉상과는 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눈빛의 초점을 더욱 깊은 곳을 향한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빛바랜 호메로스의 흉상에 가장 붉게 빛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손길이 닿아 세상에 지친 과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가 호메로스가 위안을 준다는 해석. 세속의 최고 권력자인 알렉산드로스로부터 받은 금빛 체인을 두른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난하고 눈먼 시인의 삶을 부러워한다는 해석. 부유한 삶을 지나던 시기에 그려진 이 작품에서 물질적 풍요에 대한 그의 고민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해석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당시 유행하던 그룹 초상화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분위기를 알려준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암스테르담 외과 의사 길드의 의뢰로 그려졌다. 당시 해부학 강의는 1년에 한 번씩 공개되었고 17세기 초반 사교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참가자들(의사)은 소정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고 시신은 처형된 범죄자의 것이었다. 기존 작품에서 가운데 누워있는 시신은 예수의 것이었으나 렘브란트는 극적인 미장센을 통해 성화를 풍속화로 만드는 장르적 변화를 이루어냈다. 초기 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의 정밀한 묘사와 아직 극단적으로 조절되지 않은 빛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면을 응시하는 단체 초상화의 틀을 깨고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특징이 발견된다.
렘브란트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는 <야경>은 전체적으로 너무나 어두운 밝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으나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칠해진 니스가 낡아서 어둡게 바뀌어서 그렇게 불리었다는 해프닝이 있다. 이 작품에는 총 34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1715년 작품의 크기 때문에 잘린 위와 좌우 세면 때문에 좌측 세명의 인물이 사라져 31명이 남아있다. 단체 초상화의 특징상 돈을 낸 사람만이 그림에 등장했는데 렘브란트는 몇몇 우화적 인물들을 추가해 전체적인 극적 연출을 구성했다. 다만 돈을 내고도 비중이 너무 작거나 가리어진 사람들은 불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러한 불만으로 그의 초상화가로서의 인기는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의 가난의 시기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단체 초상화를 의뢰한 (16-18) 명은 1/n로 값을 치르는데 (지금의 더치페이, 네덜란드식) 같은 값을 지불한 사람 가운데 경중이 생겼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과 그의 명성의 추락은 어찌 보면 납득이 된다. 렘브란트가 남의 돈으로 자신의 예술을 했다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자화상]
위의 작품들이 화가로서 렘브란트를 최고의 반열에 올렸다면 그의 자화상은 그를 최고의 예술가로 만들었다. 그의 자화상은 다른 화가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다음 세편의 자화상은 그가 남긴 40여 점의 자화상의 일부이다. 에칭과 드로잉 등을 모두 합하면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던 그가 다른 화가들과 다른 점은 그의 자화상에는 삶에 대한 그의 '관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화가로서 명성과 부를 모두 거머쥐고 있던 시절의 그는 화려한 옷차림과 자신감 있는 표정을 띠고 있다. 가운데 있는 <사도 바울의 자화상>은 추락한 명성과 몰락한 경제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반성적 작품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인간의 행복은 율법의 완성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해방에 있다'는 것으로 종교개혁 후 개신교 지역에서 재인식되었다. 렘브란트 스스로의 삶에 대한 반추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존성을 인정하는 모습이다. 그의 손에는 히브리어로 쓰인 성경이 있다. 자신감 있는 표정과 화려한 옷차림은 온 데 간 데 없다. 한 늙은이의 회한 어린 눈빛은 과거의 자신에게 경고와 안타까움을 보내는 듯하다. 오른편의 자화상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다. 그의 눈빛에 회한과 아쉬움이 사라진 듯하다. 그의 삶을 받아들이는 수용적 태도인 듯하다. 다소곳이 모은 두 손과 온화한 눈빛은 삶의 영광과 비참함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은 온전한 예술가의 모습인 듯하다. 위대한 화가는 작품으로, 위대한 예술가는 삶으로 증명한다.
렘브란트에게 유화만이 표현도구는 아니었다. 단순한 선으로 표현된 자화상과 코끼리 스케치는 자유로운 선의 움직임 만으로 인물의 미묘한 감정과 동물의 피부 질감이 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 그림을 제목을 맞춰보는 재미가 있다. 렘브란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야기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몇몇 인물에 대한 영웅적 표현보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전달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오른편의 작은 아이는 양측의 두 인물에 의해 보조를 받으며 걸음마를 시작한다. 곰브리치의 말처럼 여기에는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이 명료하게 그의 의도가 전달된다.
2대에 걸쳐 운영했던 선술집의 아들로 태어나 얀 반 호이엔에게 사사한 얀 스텐은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의 자화상과 <창문의 수사학자들>에 드러나듯 그는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표현에는 과장과 연출이 있다. 그의 인물들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띠고 있고 다양한 감정을 품고 있다. 자신이 쓴 글을 즐겁게 읽는 사람, 술병을 들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사람, 술에 취한 듯한 붉은 얼굴로 창밖의 누군가에게 웃고 있는 사람 등 그의 인물들은 각자의 감정에 몰입하고 있다.
장르화가 생긴 원산지의 명성에 걸맞게 얀 스텐의 작품은 앞선 피터 브뤼헬의 작품을 닮아있다. 여유로운 농민들의 일상생활을 담아낸 <여관 앞의 농부들>은 브뤼헬의 영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춤추는 두 남녀는 <춤추는 커플>에서 등장하는 남녀와 유사하다. 여인은 다소 수동적이고 남성은 적극적으로 춤을 주도하고 있다. 주변에 널브러진 사물들은 흥겨운 분위기를 더욱 돋워주는 듯 하지만 동시에 당시의 혼란했던 시대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후대 아방가르드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중 반 로이스달은 고흐, 모네, 몬드리안 등의 존경을 받아냈다. 화가이자 제도가, 에칭 제작자로 활동했던 그의 풍경화는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은 그의 풍경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내 심장을 사로잡았다.>
초기에 그는 자연에 대해 연구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모래와 대기의 효과를 실험했다. <숲이 우거진 언덕>에서 빛이 잔디와 모래에 비칠 때의 효과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고, 회색 빛 무거운 구름과 하얀 구름에 비친 빛의 효과를 구분하고 있다. 오른편의 그림에서도 빛이 비친 녹색 들판과 상대적으로 그늘진 목초지, 거대한 구름이 대기에 떠있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독일을 방문한 후 다소 웅장한 독일식 풍경화의 영향을 받는다. <유대인의 묘지>는 풍경화를 통해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에서 느껴지는 강렬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통해 교훈적 메시지는 우화로서 드러난다. 폐허가 된 건축물과 부러진 나무, 묘비와 석관, 뿌리가 드러난 나무 등은 죽음을 상징한다. 한 때 찬란했던 문명의 흔적과 싱싱했던 식물들은 이제 무너지고 썩어버렸다. 삶의 덧없음을 나타 내는 <vanitas(바니타스)>는 유한한 인간의 삶을 인식하고 욕심 없이 도덕적으로 살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살게 되면 왼편에 드러난 무지개가 영원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반 로이스달의 풍경화에 드러난 구름과 풍경은 어둡다. 어두운 그림자를 'sombre'라고 하는데 멕시코의 모자를 'sombrero'라고 하는 것도 그늘을 만들어주는 모자라는 의미이다. 로이스달의 어두운 분위기는 작가의 감정을 전달하는 듯하다. 시대적 배경일지 화가의 심리적 상태일지는 모르나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어둡고 무거운 감정은 화가가 의도한 바임에 틀림이 없다. 그림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전체적인 분위기의 쓸쓸하고 적막한 느낌을 고조시킨다. 외로이 서있는 풍차와 다가오는지 떠나가는지 알 수 없는 배 한 척에도 유행가 가사처럼 자신의 외로움을 투영시키기에 적합하다.
정물화는 'still life'로 정적인 생명의 상태를 대상으로 한다. 즉, 생명이 없거나 움직이지 않는 물체 (꽃, 악기, 과일 혹은 죽은 동물)를 표현한 장르이다. 정물화는 이 시기 상징적 내용, 즉 바니타스와 미학적 측면을 모두 보여주다가 점차 내용은 사라지고 화려한 사물들을 그려대는 것으로 바뀐다.
<바다 가재 및 유리잔이 있는 정물>은 빌렘 캄프의 기술적 숙련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가재 껍질의 질감과 그것에 반사되는 빛의 매트한 느낌, 레몬 과육과 껍질, 물이 든 유리잔에 맺힌 빛과 은식기의 반짝임, 태피스트리의 자연스러운 접힘과 음영, 뿔의 화려하고 오묘한 색감과 은장식의 섬세함은 그의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할만하다. 이 그림에 어떠한 영웅도 등장하지 않고 웅장한 풍경이나 농부들 조차 발견할 수 없다. 네덜란드의 전문 화가들에게 "주제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우리에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알려진 얀 베르메르는 델프트와 헤이그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이다. 그는 매우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로 꼼꼼하고 완벽한 색채의 표현에 몰두했다. 그는 다수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는데 풍요롭지 않은 경제 상황에서 가장 값비싼 안료를 사용한 극한의 표현을 시도했고 결국 빚을 지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정교한 묘사는 실제로 이러한 집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바닥과 벽면, 벽면에 타고 자란 식물, 둥둥 떠다니는 구름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공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실제 그림을 그린 곳에는 베르메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의 사진이 채워져 있다.
베르메르가 남긴 걸작 <부엌의 하녀>는 특별할 것이 없는 장면을 수수하게 표현하고 있다. 당시 그림을 그린 후 구매자를 찾아야 했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그가 살아생전에 유명세를 얻지 못한 이유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는 사후 2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중요한 화가로 발굴되어 서서히 현재의 명성을 얻었다. 그가 그린 부엌의 하녀가 입고 있는 옷의 질감은 바로크 화가들의 번뜩이나 빛의 효과를 보여주지 못한다. 하녀가 입은 옷은 고급 소재가 뿜어내는 반짝이는 효과를 낼 수 없다. 투박한 옷에 비친 빛의 효과는 마찬가지로 투박해야 한다. 왼편의 빵의 질감은 정교함으로 따라갈 수 없는 퍽퍽한 빵의 식감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뒤편의 바구니와 도자기, 뒤편 벽 아랫부분의 타일과 나무로 만든 발을 데우는 난로 등 일상적인 공간에 이렇게 애정을 쏟은 정교한 색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큐레이터 발터 리드케는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표정을 모나리자의 그것과 비교했다. 빛에 비친 오른편 얼굴과 어둠에 가려진 왼쪽 얼굴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모나리자의 미소와 같이 우리에게 미스터리로 남겨졌다. 뉴욕 타임스의 미술 평론가 캐런 로젠버그는 다음과 같은 감상평을 남겼다.
<밝기는 하지만 빛은 빵 껍질의 거친 질감을 씻어내거나 하녀의 두꺼운 허리와 둥근 어깨의 볼륨을 평평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녀의 내리 깐 눈과 삐죽이는 입술이 그리움이나 집중을 표현하는지 알 수 없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의 예술가들은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의 물결에 고스란히 휩쓸리지 않았다. 정치적, 종교적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이 시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과 그들의 도시,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 자신들의 물건들을 그림으로 남겼다.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는 영원히 스스로를 남기고 싶었던 인간의 본능이 반영된 장르이다. 따라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그려줄 화가를 찾는 클라이언트의 선택권은 예술가들이 더욱 다양한 표현과 양식을 만들도록 종용했다. 그 결과 그들의 그림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고 동시에 그들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