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하는 시각 세계 - 17세기 전반: 카톨릭 교회권의 유럽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필두로 구교와 신교의 대립은 점차 커져갔다. 루터의 종교개혁 101년 이후 1618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 30년에 걸친 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이 <30년 전쟁(1618-1648)>이다. 이 혼란한 시기에 등장한 미술사조가 <바로크> 미술이다. 30년 전쟁의 결과로 독일은 1/3에 가까운 인구를 잃었고, 이는 이후 독일이 근대국가로 발전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반면 개신교를 지지했던 프랑스는 막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중세의 모토인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와 <Vanitas(덧없음)>을 되새기게 했고 불확실한 삶에 대한 불안정한 인간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회화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크(Baroque)는 포르투갈어 'pérola barroca', 즉 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며 고전주의에 반해 덩치만 크게 기괴하다는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던 말이다. 이후 부정적 의미는 사라지고 하나의 예술사조를 이르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바로크 건축의 효시로 불리는 건축물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1532-1602)가 비뇰라가 설계한 건축물의 파사드를 계획한 일제수 교회(Il Gesu, 1675)이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1491-1556)는 반종교개혁과 카톨릭의 부활을 위해 예수회를 세웠는데 일제수는 예수회 교회에서 설립한 건축물이다.
일제수 교회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를 원형으로 삼은 듯하다. 1층에는 6개의 코린트 쌍기둥으로 구성했고 그 위에 엔타블레이처를 두고 중앙 입구의 윗부분은 삼각형 박공과 세그먼트 박공을 겹쳐 사용하여 입체감을 표현했다. 다시 그 위에 2층부에 네 쌍의 코린트 주두를 두고 그 위에 삼각형의 박공으로 마무리했다. 이 파사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산타마레아 노벨라에서 1층과 2층 사이가 계단 모양으로 비어버린 부분을 채운 것을 굴곡진 주름의 조각으로 대체한 것이다.
교회의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천장화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구조물이고 그림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를 구분하기 힘들다. 때로는 그림인지 조각인지 구분하지 못하도록 하는 눈속임 그림(Trompe-l'oeil)이다. 바로크의 특징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감각의 혼란을 일으키는 것인데 건축공간에서 이 효과는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피렌체의 금세공사이자 조각가, 작가로도 활동했던 카라치는 카라바조와 함께 매너리즘을 넘어 로마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코레조, 베로네제, 틴토레토에게 큰 영감을 받았다. 1597년에서 1600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갤러리아 파르네제의 천장화를 맡게 된다.
다양한 자세와 근육질의 신체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으로 보이며 밝고 선명한 색채와 다양한 구도는 라파엘로에게서 습득한 기법이다.
같은 시기에 그는 두 작품을 완성하는데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에서 창백하고 핏기 없는 예수의 피부, 예수의 표정만큼이나 생기를 잃은 마리아의 혼절한 표정은 나머지 인물들의 복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붉게 상기된 얼굴과 대비된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다양한 감정표현과 예수의 몸을 따라 왼쪽 상단으로 이어지는 겹쳐진 신체는 왼편 여인의 시선을 통해 푸른 옷을 입은 여인으로 옮겨지고 그녀의 시선은 다시 혼절한 성모에게로 이어진다. 그 옆의 붉은 옷을 입은 막달레나 마리아는 예수를 향한 몸짓과 시선을 보낸다. 전체적인 인물과 시선의 배치는 화면의 중심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와 성모에게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피에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시신은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는 듯하다. 성모는 홀로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하고 있다. 그녀의 옆에 있는 두 푸토(putto)는 그녀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고 화면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카라치의 <이집트 피난 중 휴식>은 이후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에 영향을 준 카라치의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성모자인지 뒤편에 위치한 언덕 위의 마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헤롯왕의 영아 살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 중인 성모자와 야곱은 화면의 양쪽으로 물러나 뒤편의 배경을 소개하는 듯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화면의 풍경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주제를 알지 못하더라도 성모자와 야곱의 배경으로도 충분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무일푼의 예술가 카라바조는 로마로 건너와 추기경의 눈에 띄어 주목받는 화가로 성장한다. 승승장구하던 카라바조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로마에서 추방당해 나폴리와 몰타로 향한다. 몰타에서 기사단 작위를 수여받지만 연이은 몸싸움으로 시칠리아로 도피하게 되고 1년 만에 나폴리로 복귀하나 로마의 추방이 풀리길 기대하다 38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화가 만시니는 <훌륭한 예술적 소질과... 엄청난 성격이 동반되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타고난 예술적 재능에 비해 좋지 않은 품성을 지녔다. 그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처럼 회화에서도 솔직한 표현이 그의 특징이다.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는 요한복음 20장 27절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라.>
카라바조는 이 장면을 넌지시 그리지 않는다. 보다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읽은 그대로 그린다. 손가락을 넣는 호기심에 가득한 표정과 주름을 여과 없이 그려 넣었다. 이 장면에 조금이라도 몰입을 방해할 만한 요소를 없애기 위해 배경은 어둡게 빛의 효과는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제한했다.
위의 두 작품 역시 전하고자 하는 장면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미화하지 않고 표현했다. 골리앗의 잘린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고 초점 없는 두 눈과 입은 힘없이 열려있다. 다윗은 담담한 표정으로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유디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 후 가차 없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고 있다. 그녀는 일말의 죄책감보다 목이 잘리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혐오감으로 찡그린 미간을 보이고 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뒤틀린 신체의 홀로페르네스와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바라는 듯한 노파의 힘이 들어간 두 손과 수건의 주름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귀도 레니는 라파엘로의 고전적 모델을 바탕으로 카라치와 카라바조의 빛의 극단적 대비효과인 Tenebrism을 받아들였다. '불길한, 어두운'의 뜻을 가진 tenebroso에서 파생된 테네브리즘과 극명한 명암대비를 나타내는 키아로스쿠로(Chiascuro)는 바로크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기법이다.
<아폴로의 태양 마차를 이끄는 오로라>에서 오른편에 위치한 오로라가 지나가자 밝은 횃불을 든 천사가 따른다. 아직 그녀가 지나가지 않은 우측의 공간은 빛이 오기 전의 어둠이 위치한다. 태양의 신 아폴로의 마차가 이르는 곳에 태양이 현현함을 한 편의 시와 같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적 회화'는 <ut pictura poesis> (시도 그림처럼)이라는 로마의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시와 회화의 복합적 예술성을 의미한다.
예수를 그린 두 작품에서 귀도 레니는 예수의 상반된 두 시선과 색채를 회화에 그려낸다. <이 사람을 보라>에서의 예수는 힘없고 낙담한 듯하며 그에 적합하게 회색빛의 어두운 색채로 드러난다. 반면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에서의 그는 그의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하늘을 응시한다. 그에게는 이제 곧 다가올 고통의 종료가 축복의 빛처럼 비추는 듯하다.
루앵과 파리에서 화가로 훈련을 받은 푸생은 1624년 로마로 향한다. 그는 이탈리에서 티치아노와 라파엘로 그리고 고대 예술작품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1641년 루이 13세의 강압적 요청에 의해 파리로 왔으나 그는 로마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루이 13세가 사망하기 1년 전 1642년 그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1665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로마에 머문다. 그의 사후 루이 14는 그를 '프랑스 최초의 화가'로 인정한다. 그는 이후 자크 루이 다비드, 앵그르, 세잔 등 여러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다.
푸생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에는 세명의 목동과 한 여인이 등장한다. 세 목동은 관 옆면에 새겨진 글귀를 두고 의아해한다. 오른편의 목동의 어깨 위로 여인이 손을 얹고 그 목동은 그녀에게 그 답을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 거기에 쓰인 글귀가 <ET IN ARCADIA EGO>로 주어인 '나', 즉 'EGO'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것이 관인 것으로 보아 '나'는 '죽음'임을 알 수 있다. 아르카디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실제 지역이름인데 고대 그리스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에게는 '이상향'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결국 '이상향에도 죽음은 있(었)다.'로 해석된다. 이 여인의 정체는 '죽음' 혹은 '지혜'의 의인화된 모습으로 보인다. 목동에게 자기 스스로를 밝히거나 그러한 지혜를 알려주는 알레고리이다. 그녀의 뒤편 하늘에는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운다. 30년 전쟁의 끝무렵에 그려지기 시작한 이 작품에 푸생은 중세적 교훈을 담은 <memento mori>, <vanitas>와 같이 세상의 덧없음과 죽음에 대한 경고를 떠오르게 하여 '현재의 삶을 살 것'(carpe diem)을 권한다. 이상향을 바라보는 세계관은 삶의 일부인 '부정성'을 외면하는 것이며 현실을 도피하는 것일 따름이다. 진정한 삶에 대한 사랑은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완성된다. 드디어 '오늘' 그리고 '이 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푸생의 이 메시지는 풍경화가 그리는 순간의 재현, 나아가 인상파가 포착하고자 하는 '순간의 인상'에 대한 근거가 된다.
로랭의 본명은 클로드 젤레이다. 그가 태어난 곳이 로랜느(Lorraine) 지역이기에 남성형으로 변환하여 '로랭'이라 불리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빈치 지역의 대명사가 된 것과 비슷한 경우다. 어린 시절 현재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Freiburg im Breslau) 지역에서 제빵사로 일하던 로랭은 13세에 로마로 향했다. 로마에서 환상적인 천장화에 매료되어 화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630년 이후 그는 천장화를 포기하는데 프레스코화가 가진 색채의 한계로 인해 빛의 미적 특성을 포착할 수 있는 유화를 주로 남긴다.
<로마의 풍경>의 전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무리는 어둠 속에 위치한다. 로랭은 그들이 주인공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오른편의 신전과 나무는 빛을 받지 못하고 화면의 왼편에 위치한 도시를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로랭이 빛을 비추는 곳은 도시 로마다. 로랭의 그림에서는 화면을 구성하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큰 그림 속에 다시 작은 그림이 존재하는 구조이다. 어둡게 그려진 부분은 밝게 빛나는 부분을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주며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성 안토니오의 유혹이 있는 풍경>에서 밝은 빛이 성 안토니오의 얼굴을 비춘다. 두 번째로 밝은 빛은 뒤편의 중세풍의 건축물을 비추어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성 안토니오는 "모든 수도사의 아버지", "수도 생활의 원조"라 불릴 정도로 모범적이고 열정적인 수도사였다. 그가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는 장면인데 뒤편 강물을 건너오는 악마들과 성 안토이오 뒷 편의 건축물 사이로 보이는 악마들이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며 유혹하고 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그리는 유혹의 장면에서 성 안토니오의 머리채가 잡히고 바글거리는 악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또한 그뤼네발트의 그림에서는 그리스도가 태양의 위치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반면 로랭의 작품에는 어떠한 신의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한줄기 빛이 그리스도의 은총이 존재하고 있음을 극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로랭의 풍경화는 영국의 영웅적 화가 윌리엄 터너의 찬사를 받는다. 터너는 직접적으로 로랭의 풍경화를 습작하고 이후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게 된다. 로랭은 이탈리아에서 고전 건축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의 작품에 빠지지 않는 것이 건축물인데 <시바 여왕의 승선>에서 건축물은 하나의 풍경으로서 작동한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양식과 중세,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 양식을 사용하여 풍경화에 때로는 세련된, 때로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부여한다.
로랭은 앞선 화가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제를 다룬다. 조토와 뒤러는 이집트로 향하는 나귀 위의 성모자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풍경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티치아노는 휴식을 취하는 성모자와 야곱을 그리는데 목가적 풍경이 주는 평화로움이 휴식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룬다. 로랭은 휴식을 성모자와 야곱 그리고 천사에게 중심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한쪽 귀퉁이로 밀려난 인물군이 반대편의 낡은 신전을 향하는 돌다리를 통해 휴식 이후의 여정을 떠날 것임을 알 수 있다. 로랭은 태양의 위치를 지평선 부근으로 두어 이 장면이 순식간에 어두워질 것을 암시한다. 그들의 휴식이 그리 길지 않음을 하늘에 드리워진 빛의 톤으로 전하고 있다.
플랑드르 지역 출신의 아버지를 둔 루벤스는 독일의 지겐(Siegen)에서 태어났다. 15세부터 예술에 전념한 루벤스는 6년간의 수습과정을 마치고 안트베르펜의 화가 길드에 가입한다. 그로부터 2년 뒤 1600년 5월 그는 티치아노와 베로네제 등의 이탈리아 화가들을 공부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8년간의 여행 중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를 습작하고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에 몰두했다. 또한 라오콘 군상 등의 헬레니즘 조각들과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의 작품에도 큰 감명을 받았다. 1609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루벤스는 이 시기 제자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를 길러낸다. 1621년부터 9년간 외교 사절단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지역을 방문하여 초상화 등의 작업을 통해 30년 전쟁으로 어수선한 유럽 정세에 예술을 통한 평화를 가져오기를 바랐다.
그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과 후의 변화는 극적이다. <아담과 이브>에서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자연에 대한 세부묘사가 드러나며 신체 묘사에 있어서의 부자연스러움이 눈에 띈다. 이탈리아 여행 중 그린 <레르모 공작과 승마 초상화>에서 말과 인물에 대한 묘사가 정확해지며 무엇보다 배경으로 그려진 하늘은 틴토레토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루벤스는 티치아노의 그림을 습작하며 그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티치아노가 아직 얻지 못한 살아있는 듯한 불그스름한 피부를 그려냈다. 뒤편의 나무와 신체 표현에 있어서도 더욱 생기 있고 풍성한 볼륨감이 돋보인다. 전체적인 구성은 동일하지만 디테일에서 더욱 선명한 색채와 질감 표현을 통해 티치아노의 <아담과 이브>를 한층 발전시켰다.
루벤스는 30년 전쟁으로 고통받는 유럽에 평화를 위해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의뢰를 받아들인다. 잉글랜드 왕 찰스 1세에게 헌정된 이 작품에는 분노의 신 퓨리와 전쟁의 신 아레스를 밀어내는 아테나가 보인다. 분쟁거리를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화면의 중심에 평화의 여신이 풍요를 상징하는 젖가슴을 어린아이에게 내밀고 있다. 그 아래로 목신과 표범, 아이들이 평화롭게 어울리며 축제를 벌인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인물 군상들이 모두 살아 움직이듯 역동성과 생동감을 나타낸다.
1630년 루벤스는 17세의 헬렌 푸르망(Helene Fourment)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40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결혼식 직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이제 나는 다시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고 있다.... 감사로 가득 찬 감각적 쾌락을 누리며 살자.>
그림은 다양한 상징들로 가득하다. 뒤편의 건물 깊숙한 곳에 삼미신의 조각상이 보이고, 오른편 뒤로는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여신이, 그리고 가운데 세명의 귀부인은 각자 조신한 여인, 황홀한 여인 그리고 어린 천사를 무릎에 두고 있는 어머니로서의 여인을 의미한다. 화면의 왼편에서 루벤스는 사랑의 정원으로 헬렌을 안내한다. 어머니로서의 여인의 손에 붙들린 헬렌은 결혼을 결심하고 오른편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루벤스와 사랑의 정원의 계단을 내려온다.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천사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지루할 틈이 없는 인물들의 시선과 다양한 표정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지만 기질은 그의 스승과 매우 달랐다. 그는 자신의 성격에 맞는 차분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즐겨 드러냈다.
찰스 1세의 초상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국왕의 위엄을 나타내기에 장식과 옷차림이 너무 간소하다. 단출한 복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엄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눈빛과 굳게 다문 단호한 입술, 지팡이를 짚고 허리춤에 손을 얹은 자태는 영국의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잘 보여준다. 찰스 1세는 세간의 다양한 평가가 있는 인물이지만 스스로를 "국민의 순교자"라 불릴 만큼 과시와는 거리가 먼 왕이었다. 안톤 반 다이크는 영국의 왕과 귀족들의 쉴 새 없는 초상화 주문을 받았고 밀려드는 주문에 마무리를 자신이 하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도 여럿 남겼다.
세비아 출신의 벨라스케스는 외교관으로 스페인을 방문한 루벤스를 만나고 이탈리아 여행을 결심하게 된다. 함께 여행할 것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홀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이탈리아에서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에 감화된다.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는 전통보다는 자연에 대한 관찰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활동을 의미한다.
위의 세 초상화는 같은 포즈를 그려낸 다른 거장들의 작품이다. 라파엘로의 차분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티치아노의 성품을 그대로 담은 것 같은 초상화에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전혀 모자람이 없다. 그는 이전의 거장들을 그래도 베껴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간단한 붓터치를 통해 훨씬 효과적인 빛의 효과를 이루어냈다.
벨라스케스의 역작은 <시녀들>이다. 작품은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과 사물>에서 담론의 주제로 이 작품을 다루면서 한층 깊이 있는 해석들로 넘쳐났다. 이 작품의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시선'이다. 왼편의 커다란 캔버스 옆에 산티아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를 가슴에 새긴 화가 벨라스케스가 서 있다. 그는 왼손에 팔레트를 들고 오른손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캔버스의 앞면과 일치한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우리와 마주치지만 실제로 그의 시선과 캔버스의 그림은 우리에게 '비가시적'이다. 화면의 뒷부분에 두 남녀의 초상이 거울에 비쳐 보인다. 그들은 화가가 그려야 할 대상인 펠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이다. 방의 중앙에 서 있는 여자 아이는 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이고 두 시녀의 시중을 받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펠리페 4세도 아니고 마르가리타 공주도 아니다. 화가는 심지어 두 시녀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있다. 뒤편의 열린 문으로 계단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그는 시종장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로 화가와 친척으로 여겨진다.
루벤스의 외교관 활동은 상승한 화가의 신분을 증명한다. 이 그림에서 벨라스케스는 왕과 왕비를 그림에 전면에 두지 않고 오히려 왕과 왕비의 위치에서 보이는 시점을 그렸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에는 화가가 있다. 화가가 스스로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드러내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는 해석도 전체 그림을 지배하는 화가의 시선을 보자면 일견 타당해 보인다.
이 작품은 3미터가 넘는 거대한 그림인데 멀리서 보면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것 같으나 가까이서 보면 엉성한 붓질로 마무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얀 반 에이크나 홀바인 같은 실오라기 하나도 놓치지 않는 정교한 붓놀림은 없다.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본다면 그림은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벨라스케스의 붓터치는 경제적이고 환상적이다.
스페인 왕실의 초상화를 전담하듯이 수많은 초상화를 남긴 벨라스케스는 근친혼으로 인해 성인까지 거의 생존하지 못한 많은 왕가의 자손들의 모습을 남겼다. 프로스페로 왕자의 3세 때 모습은 여아와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 악마가 여아의 모습을 한 왕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미신이었다고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조그만 강아지는 의자 위에 앉아 있다. 얀 반 에이크의 <아놀피니의 결혼식>에 등장하는 강아지의 털 한 올 한 올을 세심하게 그려낸 섬세함과 달리 벨라스케스는 강아지의 눈빛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거친 붓놀림으로 그려냈다.
우리는 벨라스케스와 루벤스 등의 바로크의 거장들을 통해 고전적 회화의 선명한 외곽선이 사라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 1864-1945)은 깨끗한 외곽선을 드러내는 고전적 회화를 손으로 만지듯 분명한 윤곽선과 같다고 하여 '촉각적'이라고 표현했고 바로크 회화의 뿌옇고 흐릿한 표현을 '시각적'이라고 했다. 바로크 회화는 자연을 관찰하여 빛의 찬란한 효과를 그려내는 시각적 미학을 드러낸다. 바로크 시기에 회화의 '시각 세계'는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