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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Sep 04.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18장

미술의 위기 - 16세기 후: 유럽

매너리즘

16세기 후반이 되자 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로운 종류의 위기를 맞이한다. 이탈리아의 미술가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은 이전 시대의 문법을 완성한 피렌체와 토스카나의 거장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자신들의 작품이 그들의 것을 반복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너리즘은 기법과 양식을 뜻하는 "manner"에서 기인한 개념으로 이탈리아어의 "maniera"가 어원이다.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만들어놓은 고전적 표현을 벗어나서 자신만의 "양식"에 따라 작품을 구현하고자 한 이들의 등장을 매너리즘이라 부른다. 매너리즘의 초기에 그들은 "반고전주의"를 내세워 기존 미술의 틀을 깨기 위한 시도를 감행한다. 그들의 시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는데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사물과 자연, 사람을 사실적으로 그리려는 고전주의의 시도에서 벗어나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표현을 과장하거나 부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16세기 후반의 건축

16세기 후반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1580)를 꼽을 수 있다. 팔라디오는 콰트로첸토에 연구되기 시작한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10서와 알베르티의 건축서를 기반으로 한 이론과 실제 건물을 짓는 실무적 경험을 모두 충족한 건축가이다. 팔라디오가 남긴 건축 4서와 건축물은 18세기 신고전주의 건축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빌라 알메리코 카프라> (빌라 로톤다), 안드레아 팔라디오, 1566

팔라디오의 역작으로 꼽히는 빌라 알메리코 카프라 (Villa Almerico Capra)는 일명 라 로톤다(La Rotonda)는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평면을 보인다. 원과 사각형의 조합으로 계획된 평면은 네 면에 위치한 입구를 완벽한 대칭(symmetry)으로 구성한다.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고안했던 기하학적 구성원리에 대해 곰브리치는 실용적 측면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라 로톤다의 가치는 르네상스 빌라의 원형을 제시한 알베르티의 삼단 구성과 고대 그리스 신전 양식의 규범 그리고 로마 건축의 정수인 판테온의 돔을 하나의 건축물에 녹여내었다는 데 있다. 비첸차에 위치한 이 건물의 네 로지아에 서면 네 가지 각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건물로 진입하는 오르막이 보이는 풍경, 작은 숨으로 둘러싸인 프라이빗한 작은 뜰, 언덕 위에서 주변 경관이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시야 그리고 반대편의 언덕이 마주 보이는 목가적 풍경. 팔라디오는 무미건조해 보일 수 있는 기하학적 평면의 건축물에 다양한 풍경을 둘러두어 다채로운 환경을 조성했다.

왼편: <산 마르코 도서관>, 야코포 산소비노, 1537; 오른편: <비첸자 바실리카>, 안드레아 팔라디오, 1549

팔라디오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는 작은 도시 비첸차(Vicenza)에는 그의 초기 작품인 <팔라초 델레 레기오네(Palazzo delle Regione)>, 일명 비첸차 바실리카가 있다. 그는 이 건물의 외부 리모델링을 맡았는데 건물의 주 기둥들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그는 기둥 사이에 아치를 두고 그 아래에 작은 기둥을 두는 방식을 이용했다. 이 아이디어는 로마의 개선문에서 발견되고, 그의 선배인 야코포 산소비노도 사용했다. 아치의 양옆으로 작은 원형 개구부를 두어 시선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통해 기둥 사이의 균일하지 못한 간격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조합을 <베네치안 모티브>, <세를리아나> 혹은 <팔라디안 모티브>라고도 부른다.

왼편: <산 조르조 마조레(San Giorgio Maggiore)>; 오른편: <일 레덴토레 (Il Redentore)>

베네치아의 쥬데카 운하에는 팔라디오의 건물이 나란히 서있다. 산 조르조 마조레와 일 레덴토레의 입면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 양식과 로마 건축의 벽식 구조의 적절한 조합을 보여준다. 루돌프 비트코버(Rudolf Wittkower)에 따르면 그는 입면의 구성에 신학적 해석을 부여했다. 온전한 삼각형의 박공은 가운데 우뚝 솟아 신의 완전함과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뒤로 물러난 쪼개진 삼각형의 박공은 불완전한 인간을 의미한다.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 1500-1571)

첼리니는 로마와 피렌체, 프랑스의 퐁텐블로에서 금세공사, 조각가 등으로 활동했다.

<소금그릇(Saliera)>, 벤베누토 첼리니, 1540-43

첼리니의 <소금그릇>은 정교한 금세공 기술을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주제는 땅과 바다(terra e mare)이다. 왼편의 여성은 땅을 뜻하는 Tellus인데 오른손에 보석을 쥐고 왼손으로는 가슴을 가리킨다. 부와 다산을 상징하는 그녀의 옆에 작은 신전이 있는데 이것은 후추를 담는 그릇이다. 반면 삼지창을 쥐고 있는 남성은 Neptune으로 바다를 의미한다. 조개, 해마, 물고기 등의 바다의 상징물이 그의 주변을 장식하고 작은 욕조는 소금을 담는 그릇이다.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벤베누토 첼리니, 1545-54

첼리니의 걸작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는 메디치 가문의 의뢰로 만들어졌다. 괴물 메두사의 수급을 취하고 왼손에 당당히 들고 서있는 페르세우스의 모습은 피렌체를 지키는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나타낸다. 도나텔로의 다비드를 연상시키는 조화롭고 부드러운 신체 묘사가 돋보인다.


파르미자니노(Girolamo Francesco Maria Mazzola, 1503-1540)

파르마 출신의 기롤라모 프란체스코는 <파르미자니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는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동판화가로 젊은 나이에 선생(Magister)이라 불렸다. 1524년 여름 로마로 여행을 떠났던 그는 볼록거울에 비친 <자화상>을 통해 새로운 라파엘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왼편: <목이 긴 마돈나>, 파르미자니노, 1534/5; 오른편: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1485/6

파르미자니노를 매너리즘 화가로 불리게 된 결정적인 작품은 <목이 긴 마돈나>이다. 과장된 신체의 비례와 극단적인 원근법의 적용은 친퀘첸토의 거장들의 '자연스러운' 미술기법을 부정하고 '인위적 자연스러움'을 향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오히려 그의 마돈나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연상시킨다. 길게 늘어난 목과 축 처진 어깨, 균형을 잃은 콘트라포스토는 미술의 퇴보가 아닌 독특한 분위기를 얻기 위한 화가의 의도임에 틀림이 없다. 곰브리치는 그의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실 선배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파르미자니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들이었을 것이다.>


<볼록거울 속의 자화상>, 파르미자니노, 1524

그가 남긴 <볼록거울 속의 자화상>은 이러한 '현대적' 요소를 드러낸다. '인위적'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화가가 선택한 방법은 볼록 거울이다. 볼록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기만 해도 인위적 변형과 왜곡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미술가 평전을 기술한 조르조 바사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거울에 비친 가까운 것은 모두 커지고 멀리 있는 것은 작아지므로, 그리는 손은 거울에 비친 대로 조금 크게 그려서 마치 실제로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프란체스코(파르미자니노)는 아름다웠고 매우 우아한 얼굴을 갖고 있고 인간이라기보는 천사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원에 있는 그의 이미지는 신성한 것이었다.... 유리의 빛, 모든 반사, 빛과 그림자가 너무나 독특하고 충실하게 모방되어 인간의 정신을 그리는 데 있어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다.>


잠볼로냐(Giambologna, 1529-1608)

잠볼로냐는 후기 매너리즘에 속하는 예술가로 청동과 대리석 조각품을 주로 남겼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으나 상대적으로 감에 대한 강조를 줄이고 세련된 표현, 차갑고 우아한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었다.

왼편: <머큐리>, 잠볼로냐, 1578-80; 오른편: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1535-41

잠볼로냐의 <머큐리>는 미켈란젤로의 우람한 근육질의 신체와 다르다. 도적과 전령의 신인 머큐리는 중력에 반대되는 가벼움을 위한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있다. 잠볼로냐는 머큐리를 표현하는데 무거운 청동을 이용하지만 무엇보다 가벼운 재료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을 부렸다. 한쪽 발끝으로 서서 곳 날아갈 것만 같은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손끝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시선을 상승시킨다. 콘트라포스토를 지키는 대신 뒤로 젖혀진 오른발은 하늘을 향해 달려 나갈 것만 같은 경쾌함을 보여준다.


<사비니 여인의 납치>, 잠볼로냐, 1579-83

<사비니 여인의 납치>는 이후 바로크 조각의 특징을 선점한다. 이전의 조각들은 정면이라는 개념이 강했다. 조각을 관찰할 때 정면과 측면의 구분이 명확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잠볼로냐는 가장 아래에 위치한 사비니 여인의 아버지의 시선과 그녀를 납치는 남성의 시선, 그리고 여인의 시선이 소용돌이치듯 상승한다. 작품을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꺾인 그녀의 허리와 남성의 떠받치는 몸이 강조될 수도 있고 가장 아래의 아버지의 괴로운 표정과 그녀의 괴로워하는 표정이 한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 잠볼로냐는 조각이 회화와 다른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틴토레토 (Jacopo Robusti, 1518-1594)

야코포 로부스티는 염색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염색공을 뜻하는 Tintor에 작다는 뜻을 가진 어미를 붙여 틴토레토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사리는 "활기차고 대담하며 예술에 헌신적인 가장 위대한 정신"이라고 그를 칭송했고 사람들은 그를 <il furioso>, 즉 '격노하는(격정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베네치아 친퀘첸토의 '빛의 효과'와 피렌체 친퀘첸토의 '원근법과 투시도'를 모두 이어받아 자신의 방식으로 종합했다.

왼쪽: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1562-66; 오른쪽: <성 마르코의 시신이 베네치아로 옮겨짐>, 1564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 성 마르코를 위한 그림을 여러 점 남겼다. 성 마르코의 유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발견되자 베네치아로 그 유해를 가져온 것을 기념해 베네치아에는 산 마르코 광장과 성당이 건립되었다. 틴토레토는 자신의 그림의 바닥과 배경에 격자무늬와 건물의 배열을 통해 투시도법을 사용했다. 그림의 전체적은 색채는 밝고 어두운 부분의 대조가 명확하고 배경이 되는 부분은 어둡게 하여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세족식>, 틴토레토, 1548-49

<세족식>의 바닥과 건물 역시 투시도법을 사용했음을 분명히 해준다. 틴토레토의 그림은 피렌체의 화가들과 달리 주인공이 중심에 등장하지 않는다.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에서는 왼쪽 아랫부분에 성 마르코가 위치하고 <성 마르코의 시신이 베네치아로 옮겨짐>에서는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다. <세족식>에서 예수는 오른쪽 구석에 배치되는데 실제 이 그림이 위치하는 곳은 건물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위치하므로 그림의 오른쪽 부분이 가깝게 보여 시각적으로 왜곡되는 현상을 경험한다. 따라서 오른쪽 구석의 예수가 가까이에서 더욱 크게 보인다.

왼편: <최후의 만찬>, 틴토레토, 1580; 오른편: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94-98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와 그 이전의 화가들과 달리 수평적인 구도를 취하지 않는다. 예수도 제자들은 대각선으로 배치되고 어두운 조명을 통해 드리워진 어두운 분위기는 그 당시 상황이 암시하는 비극적 결말을 전한다.

<최후의 만찬>, 틴토레토, 1592-94

또 다른 <최후의 만찬>에서 틴토레토는 연기의 투명한 효과와 빛이 선적으로 퍼지는 효과를 극적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표현은 이후 바로크 회화에서 주로 사용하게 된다. 예수와 제자들의 머리를 감싸는 후광(halo/nimbus)은 어두운 배경과 대조를 이루어 인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엘 그레코(Doménikos Theodokópoulos, El Greco, 1541-1614)

틴토레토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시킨 화가는 의뢰로 그리스 지역에서 나타났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베네치아의 문화가 뒤섞인 곳에서 태어난 이 화가는 이후 '그리스인'이라는 의미로 엘 그레코라 불리게 된다. 엘 그레코는 그가 살던 시기보다 훨씬 이후인 20세기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표현주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톨레도의 풍경>, 엘 그레코, 1598/99

엘 그레코는 말년에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톨레도에 머무는 동안 여러 프레스코화와 유화를 남기는데 <톨레도의 풍경>은 틴토레토의 어두운 분위기를 잘 살린 하늘과 빛바랜 색채의 풍경으로 이목을 끈다. 실제 톨레도의 배경을 재현한 것이 아닌 그의 상상력에 기반한 풍경으로 당시 유럽의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인 혼란이 톨레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요한 계시록의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엘 그레코, 1608-14; 오른쪽: <아비뇽의 처녀들>, 파블로 피카소, 1907

<요한 계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은 파르미자니노의 기괴한 신체 비례뿐 아니라 틴토레토의 색채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기괴한 신체와 기묘한 분위기는 종말의 순간을 떠올리기에 적합하다. 피카소는 엘 그레코에게 영감을 받아 최초의 입체파 회화라 불리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계획한다.

왼쪽: <호르헤 마누엘 테토코풀로의 초상>, 엘 그레코, 1600-1605; 오른편: <엘 그레코의 초상>, 파블로 피카소, 1950

피카소는 <엘 그레코의 초상>을 통해 자신에게 영감을 준 엘 그레코에 대한 자신의 존경을 표한다. 한 미술사학자는 <(피카소는) 마네가 시작하고 세잔이 이어받은 엘 그레코의 회화적 가치를... 완성했다>고 전했다.

왼쪽: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엘 그레코, 1588; 오른쪽: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1535-41

톨레도의 산토 토메 교회의 그려진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좁은 하늘문과 영혼과 육체의 분리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화면의 중심에 위치한 천사는 오르가스 백작의 순수한 영혼을 천국으로 밀어 넣고 있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이분할되어 있고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전혀 다른 분위기와 묘사를 보인다. 현실세계를 그리는 아랫부분은 비교적 왜곡이 덜한 재현법을 사용하고 있고, 천국을 나타내는 화면의 윗부분은 비현실적인 색채와 왜곡된 신체를 그려낸다.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der Jüngere, 1497-1543)

한편 독일에서는 이탈리아에서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친퀘첸토의 고전적 회화를 이어받은 화가가 등장했다. 같은 이름의 아버지를 둔 한스 홀바인은 바이에른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형 암브로지우스와 함께 1515년 스위스의 바젤로 향했다. 1523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당대 최고의 학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의 추천으로 영국으로 1526년 넘어간 홀바인은 에라스뮈스의 친구인 토마스 무어의 가족과 헨리 8세의 초상화까지 그려 성공한 화가가 된다.

왼쪽: <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 한스 홀바인, 1528; 오른쪽: <시스티나의 마돈나>, 라파엘로, 1512/13

홀바인은 1528년 마이어 시장의 요청으로 <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를 그린다. 라파엘로와 같이 안정된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주변 인물의 자세까지 닮아있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홀바인의 마돈나를 보고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마돈나를 떠올린다. 홀바인은 정교하고 따스한 분위기, 안정된 구도로 "북방의 라파엘로"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대사들>, 한스 홀바인, 1533

홀바인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파견된 대 장 드 당트빌(Jean de Dintville)과 그를 방문한 친구 죠르주 드 셀브(Georges de Selve)를 그린 <대사들>을 완성한다. 이 그림은 수많은 상징물을 통해 단순한 친구의 해후를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고 나아가 화가의 삶에 대한 태도와 조언이 담겨있다. 화면 상단에 위치한 각종 사물들은 당시 최첨단 과학도구들로 천구의, 육분의 등 항해에 필요한 도구들이다. 한편 아래쪽에 위치한 것은 쓰러진 지구본 (확장된 세계관과 혼란한 세태), 끊어진 현 (깨어져버린 신구교 간의 조화), 산수책 (나눗셈, 분열을 상징), 찬송가 (신구교 간의 화합을 염원)들이다. 두 대사 사이에는 일그러진 모양의 물체가 보이는데 비스듬한 위치에서 보면 해골이 드러난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왜곡된 형태를 아나모포시스(Anamorphosis)라고 하는데 화가는 '항상 우리 곁에 있으나 인지하지 못하고 곁에 다가온 순간 드디어 보이는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라틴어 문구이다. 혼란한 세태의 도덕적 삶을 유지하고 구원을 바라는 화가의 염원이 담긴 작품이다.


피터 브뢰헬(Pieter Brueghel, 1525-1569)

출생과 가족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플랑드르의 화가 피터 브뢰헬은 풍속화(genre)를 미술의 새로운 분야로 정착시켰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일상의 삶, 농민의 삶, 풍경, 풍자 등이다. 그는 왕, 성직자, 성경, 신화, 부르주아로 이어지는 회화의 주제를 넘어 평민의 삶을 회화의 주제로 삼았다.

<농민의 결혼식>, 피터 브뢰헬, 1568

화면의 중심에 주인공은 없다. 인물은 무수히 많이 그려져 있으나 어느 하나 빠져도 큰 지장이 없다. 정교하게 배열되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안 되는 조화와 균형 역시 지켜지지 않는다. 당시 먹을 것이 부족하던 농민의 결혼식에는 수프 한 그릇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문밖에서 들어오고자 하는 수많은 인파가 보인다. 화면 앞쪽에 큰 모자를 쓴 아이는 음식이 부족하여 손가락을 빨고 있다. 주인공 신부는 화면 뒤쪽 녹샌 천 앞에 앉아있다.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의 표정에 웃음을 찾아보기 힘들고 그녀를 주목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왼편: <바벨탑>, 피터 브뢰헬, 1563; 오른편: 로마의 콜로세움 판화, 히에로니무스 , 1551

브뢰헬의 <바벨탑>의 오른편에는 항구와 배가 보인다. 당시 안트베르펜은 항구 도시로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지금의 네덜란드인 이 지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 패해 혼란을 겪고 있었다. 브뢰헬은 찬란한 전성기를 누리던 바빌론이 멸망한 것과 같이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스페인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을 경고한다. 그가 그린 바벨탑은 바빌론 지역의 건축 형태가 아닌 로마의 콜로세움을 모델로 했다. 제국을 이루었던 로마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콜로세움 역시 흥망성쇠를 다루기에 적합한 재료이다.

<네덜란드의 속담들>, 피터 브뢰헬, 1559

브뢰헬의 작품은 주제를 가리지 않는다. 종교적 교훈을 넘어 일반 대중의 삶의 경험이 축적된 교훈인 '속담'을 주제로 삼았다. 손을 뻗어 빵을 집는 사람, 소가 빠진 구덩이를 메우는 사람, 푸른 옷을 남편에게 덮어주는 부인, 가짜 예수에게 수염을 달아주는 가짜 수도사 등의 재미있게 설정으로 100여 가지의 네덜란드 속담을 담고 있다.


16세기 후반 유럽의 미술을 곰브리치는 '위기'라고 묶어서 설명한다.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업을 위한 위기에 놓여있다. 16세기 후반의 위기는 친퀘첸토에 등장한 천재들에 의해 정답을 다 알아버린 듯한 절망감에 기인한다. 더 이상 할게 없어진 예술가들에게 반복을 통한 지루한 생산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기회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고민은 19세기 사진의 발명으로 맞이하는 화가들의 위기에 맞닿아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화가들이 이 시기를 주목한 것은 그들이 이 시기의 화가들과 같은 위기감을 겪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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