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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Aug 28.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 - 16세기 초: 독일과 네덜란드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열었던 이탈리아의 거장들은 중세시대동안 잊혔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과 예술의 부흥을 통해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켰다. 상대적으로 알프스 이북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자연과 도시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신들만의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가운데 독일의 예술가는 베네치아를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통해 이탈리아 친퀘첸토 르네상스의 많은 거장들의 작품들을 학습하게 되고 이를 자신의 토양에 이식하여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키는 업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와 그를 알게 된 많은 예술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중세와 결별하고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471-1528)

기본 수련 과정

뒤러는 헝가리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난 독일 바이에른주의 뉘른베르크 태생의 예술가이다. 그의 이름인 뒤러는 같은 이름을 쓰는 자신의 아버지의 고향인 도시 Ajtósi 가 헝가리어로 '문'을 뜻하는 데 기인해 독일어의 '문'을 뜻하는 Tür에서 파생한 Thürer, Dürer로 성을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에서 하던 금세공업을 뉘른베르크에서도 계속했다. 어린 뒤러는 아버지의 금세공술뿐 아니라 회화에 대한 재능까지 한 번에 물려받았다. 뒤러는 13세까지 학교를 다니다가 2년 동안 그의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일했다. 이후 1486년부터 1489년까지 목판화로 유명한 미하엘 볼게무트 (Michael Wolgemut, 1434-1519)의 작업장에서 배우며 일했다. 이후 동판화가로 이름을 알린 마르틴 숀가우어 (Martin Schongauer, 1445/50-1491)에게 찾아갔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숀가우어의 작품을 통해 세밀한 동판화 기법을 익힐 수 있었다.


여행과 수련

뒤러는 1490년 부활절부터 1494년 오순절까지 라인강 상류로 여행을 떠났다. 정확한 여행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492년 현재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지역인 알자스에 있기 전에 네덜란드나 라인강 중부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91년 세상을 떠난 마르틴 숀가우어의 공방이 있던 콜마르 (Colmar)를 이후 지나게 되고 여기서 맺은 인연으로 스위스의 바젤까지 방문하게 된다. 1494/5년에 처음 이탈리아를 방문했다는 이론이 지배적이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 인스브룩(Innsbruck)까지는 방문했으나 베네치아에 있었다는 증거는 충분치 않다.

1505년에서 1507년까지 뒤러는 베네치아로 여행을 하며 베네치아 친퀘첸토의 거장인 티치아노, 조르조네의 작품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색상의 깊이로 깊은 인상을 남긴 예술가로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를 꼽는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알프스 이남 르네상스의 성취를 배운 뒤러는 조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지식을 이식할 준비를 한다. 이때부터 뒤러는 자신이 나고 자란 알프스 이북의 초기 르네상스의 성취와 새로운 지식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그것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어떻게 그려갈지 고민한다.


초상화

뒤러는 수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유명한 인물 가운데 뒤러와 접점이 있는 사람들의 상당 수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그가 남긴 최초의 초상화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다.

왼쪽: 13세에 그린 <자화상>, 1484; 가운데: <바바라 뒤러의 초상>, 1490/3; 오른편: <어머니의 초상>, 1514

뒤러는 13세에 은침으로 자화상을 남겼다. 초상화의 윗부분에 <1484년 어린 시절 거울 앞에서 나를 보고 그렸다.>는 문구가 남아있다. 그의 회화적 재능 또한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물려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아버지 역시 자신의 자화상을 남긴 바 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애정이 깊었는데 그의 어머니 바바라 여사는 18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유년기를 지나 생존한 자식은 셋에 불과하다. 그녀의 초상화에 나타나듯 불과 20년 만에 급격히 노쇠한 것에 대해 뒤러는 스스로 어머니의 많은 임신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왼편: 자화상, 1498; 가운데: 자화상, 1500; 오른편: <판토크라토어>, 카타리나 수도원, 6세기경

뒤러는 1498년 자화상을 남기는데 당시 전형적으로 그리던 3/4 초상화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그림에서 뒤러는 뛰어난 패션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뒷 배경으로 보이는 풍경은 바이에른 남부의 알프스 초입을 그려내고 있다. 전체적인 자세와 구도는 이탈리아의 초상화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1500년에 그린 자화상은 일대 혁명적 변화를 보인다. 여태까지 '세상의 창조자'를 주제로 한 그리스도의 <판토크라토어>를 제외하고 등장한 적이 없는 '정면 초상화'를 뒤러가 시도한다. 세기말인 1500년에 맞춰 완성한 뒤러의 자화상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넓게 늘어뜨려 안정된 삼각형 구도를 형성한다. 검은 배경을 통해 인물에 집중되게 만들었으며 손모양을 통해 그리스도의 손모양을 연상시키는 성스러움을 강조한다.

뒤러는 자신의 모습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그의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은 비대칭으로 두쪽 모두 그의 왼쪽눈으로 보일 정도다. 그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던 시도는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고양된 자의식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의 시그니처와 시기를 왼편에 자신의 이름과 창작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힌다. <그러서 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이에 실물과 같은 색으로 나 자신을 그렸다.>


목판화

그의 목판화에 영향을 준 미하엘 볼게무트는 목판화가 가진 두꺼운 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절제된 선을 통한 표현에 능했고 그것을 통해 전체적인 스토리를 전달하는 구도를 기획하는데 능통했다.

왼편: <고민에 빠진 베드로>, 미하엘 볼게무트, 1493; 오른편: <용과 싸우는 성 미카엘>, 알브레히트 뒤러, 1497/8

그의 스승으로부터 목판화에 대한 기본적인 기법을 전수받은 뒤러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시켜 나간다. <용과 싸우는 성 미카엘>은 동판화에 가까운 세밀한 선과 또렷한 음영의 표현 그리고 살아있는 듯한 표정과 역동적인 자세를 표현한다. 이 시기 이전의 미카엘은 무표정하거나 사냥 이후의 모습 혹은 정적인 전투 상태를 보여줬다. 하지만 뒤러는 부패하고 타락해 가는 교회와 신도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적합한 격정적인 천사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이 걸출한 작업을 통해 당시 도서의 삽화로 이용되던 목판화에 독립적 예술 작품의 지위를 부여했고 색조와 그러데이션을 추가하여 목판화를 동판화의 완성도에 가깝게 만들었다.


동판화

이렇게 세밀한 목판화 기술을 가진 뒤러가 동판화에 손을 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집요한 묘사는 마르틴 숀가우어가 보여준 약간의 가능성을 아득히 넘는 완벽함을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아담과 이브>, 알브레히트 뒤러, 1504

뒤러의 아담과 이브는 전체적으로 가운데 선악과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분할되어 있다. 왼편에는 아담이 나뭇가지를 들고 있고 그 위에 다른 지역과의 무역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앵무새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판을 들고 있다.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4년에 만들었다.>) 이브의 뒤쪽으로 보이는 배경에는 알프스에 살고 있는 산양이 돌산 위에 서있다. 둘 사이에는 그들을 타락시키는 뱀이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하는데 이브는 왼손에 하나를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것을 취했고 뱀과 함께 아담을 유혹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아담은 쥐의 꼬리를 밟고 있는데 자신의 처지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위태로운 상황임을 표현한 듯하다. 이브의 어깨를 보면 다소 정확한 신체 묘사와는 거리가 있는 듯하여 보티첼리의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뒤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교하고 수학적인 표현에 국한되지 않고 알프스 이북의 세밀한 부분 묘사에 집중하는 것을 따른다.

<멜랑콜리아 I>, 알브레히트 뒤러, 1514

뒤러의 <멜랑콜리아 I>은 예술가 자신이 겪는 창조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다. 멜랑콜리는 심리적 '우울'로 번역되는데 로마의 의사 갈레노스가 제세한 <4 체액설>에서 검은(melan)과 장, 담즙(cholie)을 합성한 말로 '검은 담즙'을 의미한다. 검은 담즙은 '슬프고 사려 깊은'이라는 뜻에서 '게으름', '나태함'으로 파생되는 뜻을 가진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고민만 하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날개를 달고 월계관을 쓴 인물이 '멜랑콜리아'의 의인화된 모습이다. 그녀는 오른손에 컴퍼스와 잠긴 책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뒤편으로 4x4의 마방진이 보이는데 르네상스의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을 의미한다. 마방진의 모든 가로와 세로의 합은 모두 34로 고정되어 있어, 달라 보이는 수많은 자연과 사회의 사건들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에 대한 수학적 접근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림의 하단부에는 망치, 못, 대패, 펜, 톱, 직선자 등의 장인과 목수가 사용하는 도구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의 예술과 공예를 상징한다. 반면 기하학적 입면체와 구, 가운데 구멍이 난 원판과 컴퍼스는 수학과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도구로 브루넬레스키를 필두로 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징물이다. 멜랑콜리아는 지나가는 시대의 잔재물과 새로운 시대의 도구들을 놓고 창작의 고뇌에 빠져있다. 모든 과거의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며, 모든 새로운 지식이 올바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녀의 월계관이 말해주듯 이미 창조에 성공한 그녀조차 또 다른 창조의 시련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예술가는 그렇게 늘 창조의 우울에 빠진다. 예술가는 늘 과거의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고뇌한다. 이 모든 것은 창조를 위한 도구이며 어떤 도구도 영원히 그녀를 창조로 이끌 수는 없다. 그림의 좌측상단에는 유성이 떨어지고 있으며 무지개가 드리워져있다. 몰락과 축복의 의미는 줄어드는 모래시계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종으로도 표현되어 있다. 건물의 측면에 세워져 있는 사다리는 위로도 아래도로 향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의지이다. 그녀의 의지는 예술가의 날개를 퍼득거려 상승하도록 해줄 것이다. 중세를 거치며 잃었던 예술가의 표현 능력(Kunstkönnen)은 이제 거의 되찾았고 남은 것은 그들의 예술의지(Kunstwollen)이다. 예술가는 창조주에 비견되는 예술품의 창조적 역량을 가지고 있고 세속에서 그들의 권력은 자신의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에 기인한다. 멜랑콜리아의 허리춤에 있는 열쇠와 가죽지갑은 예술가의 권력과 부를 의미한다.


또 다른 독일의 예술가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80*-1530년경)

그뤼네발트는 그의 이름과 정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예술가다. 이후 연구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작품들이 그에게 귀속되어 더욱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알자스 지역의 이젠하임의 제단화이다.

왼편: 이젠하임 제단의 3가지 제단화; 오른편: 이젠하임 제단화 <십자가의 예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1512-16

제단화는 3가지 모습으로 변형되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 형태는 모든 날개를 다 펼친 거대한 세폭화로 틴토레토 이전 가장 큰 사이즈(269x307cm)였다. 왼편 날개에는 성 세바스티안이, 그리고 오른편 날개에는 은둔자 안토니우스가 위치한다. 아래쪽 프레델라에는 <그리스도의 애도>가 그려져 있다.

대리석과 같은 흰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아들의 죽음에 사색이 된 얼굴과 경직된 몸짓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아들의 마지막을 기도하며 사도 요한의 부축을 받고 있다. 요한은 슬픈 표정으로 성모과 감정을 나누고 있으며 그 옆에 막달레나는 일그러진 표정과 기괴하게 꺾인 손가락으로 놀람과 슬픔을 표현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입술은 창백하게 말라있고 미간의 주름과 감긴 눈은 장시간의 고통으로 지쳐있는 예수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피부는 질병을 앓은 듯 보이는데 그뤼네발트 당시 퍼졌던 맥각병과 증세가 비슷하다고 한다. 예술가는 당시 사람들의 질병의 고통이 예수가 겪은 고통과 연결시킬 수단으로 파악했던 듯하다. 그림의 오른편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어린양을 대동한 세례자 요한이 손가락으로 예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Illv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예수의 희생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리라고 세계자 요한은 말한다.

비교; 오른쪽: <십자가에 못 박힘>, 조토 디 본도네, 1304-6

조토의 <십자가에 못 박힘>과 그뤼네발트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전체적인 배치와 구도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뤼네발트는 배경을 검게 하여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천사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모두 지웠다. 조토가 중세의 작품에 비해 감정 표현과 제스처가 풍부해졌다고는 하나 그뤼네발트는 그것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했다.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다른 주변 인물들의 감정표현이 풍부해진 것은 그들의 신성이 인간과는 다른 반응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 중세의 사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수와 마리아가 자신의 고통과 아들의 죽음을 인간과 똑같이 겪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신실함을 잃지 않는 것이 무감각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숭고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

크라나흐는 1505년 비텐베르크의 궁정 화가가 된 성공한 예술가이다.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마르틴 루터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초상을 그릴 정도로 당대 유명세를 떨쳤다. 그는 뒤러에 비해 알프스 이북의 화풍을 이어가기를 바랐다.

<율법과 은혜의 우화>, 루카스 크라나흐, 1529, 고타와 프라하에 소장

크라나흐는 중세 후반부터 이어져오는 스토리를 전하고자 하는 회화의 기능에 따르는 그림을 그렸다. <율법과 은혜의 우화>는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교훈을 주고자 한다. 왼편의 그림은 선악과를 먹고 원죄를 저지른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성경의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죽음에 의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교훈을 그리고 있다. 오른편은 수태고지로 태어난 예수가 자신을 희생하여 악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한 것을 가슴에 새길 것을 가르쳐준다. 크라나흐는 이외에 그리스, 로마의 신화적 인물의 누드화를 통해 성경 이외에서도 삶에 교훈을 줄만한 내용을 전한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1480-1538)

알트도르퍼는 바이에른주의 란츠후트(Landshut) 근교의 시골 출신으로 1505년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이후 1526년 도시 건축가로 임명된다. 그는 인물이 그려지지 않은 풍경화를 그린 최초의 화가 중 한 명으로 풍경화를 하나의 장르로 정착하게 한 예술가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풍경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왼편: <레겐스부르크 초입에서 샤를마뉴의 승리>, 1518; 오른편: <알렉산더의 전투>, 1529

두 그림에서 전투에 참여한 수많은 병사들과 병장기를 원근법에 담아 그리고 있다. 그림에 드러난 주인공은 황금색 갑옷으로 주목을 끌고 있으며 배경이 되는 도시의 풍경 또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두 전투 모두 오랜 시간 지속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하늘에는 낮과 밤이 동시에 드러난다. <샤를마뉴의 승리>에서는 태양빛과 별빛이 구획을 두고 반복되며, <알렉산더의 전투>에서는 왼쪽 상단의 잘과 오른편의 태양이 그것을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뵈르트 성 근처의 도나우 풍경>,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1522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Alte Pinakothek)에 소장된 <뵈르트 성 근처의 도나우 풍경>에는 어떠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베네치아의 조르지오네의 <폭풍우>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되는 것처럼 알트도르퍼의 풍경도 그렇게 읽힐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의 고향에 대한 애정을 그대로 담았을 수도 있다. 성경의 내용으로 점철된 그림을 해방시켜 아무런 지식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유희적 목적으로 봐도 좋다. 그로부터 풍경화는 하나의 장르로 후대로 이어져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그려내는 카스파 프리드리히에 이르게 된다.


초현실주의의 이른 방문,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

아헨출신의 화가 집안의 네덜란드 태생인 보스는 출처가 불분명한 생명체들과 맥락과 해석에 수많은 이견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이다.

왼편: <세속적 기쁨의 정원>, 히에로니무스 보스, 1490-1500; 오른편: 세폭화 닫을 시

<세속적 기쁨의 정원>은 세폭화로 가운데 부분은 주제인 기쁨의 정원을 그리고 있으며 왼편과 오른편은 각각 에덴동산과 지옥을 담고 있다. 양 옆의 날개부를 접으면 구형태 속에 평평한 땅이 보인다. 지구를 뜻하는데 당시 지구는 둥글지만 평평하고 믿던 시기였다. 땅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없는데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한 지 3일째를 담고 있어 아직 생명체가 없다.


<Ipse dixit, etfacta sunt. Ipse mandavit, createa sunt.>

(그가 말씀하지매 이루어졌고,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 시편 33편, 9절 -


왼쪽 상단부에 작게 보이는 인물은 그리스도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장면이다.

<세속적 기쁨의 정원>, 에덴동산 부분

에덴동산의 가운데 큰 호수가 있다 이곳에는 신화적 동물인 유니콘도 보이고 다양한 새들이 보인다. 아랫부분에는 다소 검은 물웅덩이가 있는데 여기에는 돌연변이와 같은 상상의 동물들이 목격된다. 그리스도는 아담과 이브의 창조주로 둘 모두와 신체적 접촉을 하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보다 20여 년 먼저 태어난 보스가 그의 <아담의 창조>에서와 같이 신과 인간의 접촉을 통해 생겨남을 상상했다. 에덴동산에는 다양한 생명체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데 이상한 점은 괴상한 동물들이 등장하는 것이 천국의 이미지에는 다소 아이러니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에덴동산에 등장하는 뱀은 '사탄' 혹은 '악'이며 이미 에덴동산에는 악이 있었음을 강조한다는 해석이 있다.

<세속적 기쁨의 정원>, 지옥 부분

지옥부에서 보스는 기쁨을 넘어선 지나친 쾌락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과한 쾌락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 도박을 즐긴 자는 손에 칼을 꽂고 있고, 술을 많이 마신 자는 토해내고 있으며, 돈을 좇은 자들은 엉덩이로 돈을 뱉어내고 있다. 쾌락적으로 음악을 즐긴 자들은 악기 형태의 도구에 형벌을 받고 있다. 아이러니한 부분은 우측 아래의 인물인데 그는 수녀복을 걸친 돼지에게 귀를 희롱당하고 있다. 그는 계약서 같은 곳에 서명을 하기 직전인데 누구의 강요나 폭력이 아닌 귀를 간지럽히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는 지옥 역시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교훈을 준다.

<세속적 기쁨의 정원>, 세속 부분

세속 부분은 세 종류의 물이 보이는데 가장 윗부분은 맑고, 중간부는 반반이며 아랫부분의 웅덩이는 다소 검다. 일군의 사람들이 화면의 가운데를 동물을 타고, 음식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인간의 세속에서의 기쁨을 주는 요소들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붉은 A자 모양의 나무 옆에는 새가 열매를 주고 있는데 열매에 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경쟁하고 있다. 세속에서의 기쁨은 제한된 인간에게 허용됨을 보여준다.

이 이외에도 수많은 해석거리를 포함하는 보스의 작품은 이후 피터 브뢰겔로 이어진다. 또한 그가 그려낸 다수의 기괴한 동물과 일그러진 물건의 표현은 20세기 초현실주의의 요소들을 선점하고 있다.


16세기 초 알프스 이북에서는 뒤러로 대변되는 새로운 지식의 유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형성된 지식을 자신의 고향으로 가져와 새로운 예술의 동력으로 삼았다. 이에 반해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토양에서 자란 중세의 화풍을 고수하려는 자들과 이 둘의 혼합을 통해 새로움을 추구한 이들도 있었다. 알프스 이남과 이북의 예술가들의 시도는 16세기말이 되자 또 다른 방식의 '새로움'으로 대체된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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