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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Aug 21.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16장

빛과 색채 - 16세기 초: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다양성의 도시 베네치아

16세기 베네치아는 동방의 레반트 지역과의 무역을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상업적 번영을 이룬 도시였다. 막대한 부를 쌓은 교회와 귀족 그리고 상인들은 예술을 후원하여 자신들의 부를 과시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로마와 중부 이탈리아와는 달리 종교적으로도 상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따라서 회화의 주제도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세속적인 초상화와 고대 그리스의 신화, 풍경화까지 다양했다. 특히 베네치아는 물 위에 세워진 도시로 수많은 수로와 반짝이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풍경을 자랑하여 미술가들이 "빛과 색채"에 대한 표현욕을 자극했다.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 1791-1872)는 이 도시의 중심 광장인 산 마르코에 큰 감명을 받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산 마르코 광장에 서서 심장이 떨리지 않는 자, 그는 무덤으로 가야 한다. 그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이.>


16세기 초 베네치아에는 다양한 미술가들이 로마와 이탈리아 중부의 거장들이 이끌었던 친퀘첸토와는 다른 자신들의 실험을 통한 발전을 이루었고 이는 이후 바로크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발전에 있어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건축적 성취가 영향을 주었는데 이에 1527년에 발생한 <Sacco di Roma(로마의 약탈)>이 큰 역할을 하였다. 로마가 신성로마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약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많은 상인과 예술가들은 다른 안전한 도시로 피신했고 그중 일부가 베네치아로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로마의 건축 양식 또한 베네치아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야코포 산소비노 (Jacopo Sansovino, 1486-1570)

피렌체 출신으로 베네치아에 주요 건물을 설계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산소비노는 산 마르코 광장의 도서관 건물인 <Libreria di San Marco>과 산 마르코 탑 옆의 <Loggeta del Campanile> 등을 남겼다. 

왼편: 로마의 콜로세움; 오른편: 산 마르코 도서관

산 마르코 도서관의 입면은 기본적으로 콜로세움에서의 슈퍼포지치온(superposition)을 기본으로 한다. 하단부는 도리아식 주두를 상단부는 이오니아식 주두를 택한다. 정확히 말하면 도리아식의 변형인 토스카나식 주범과 이오니아식 주범이다. 이탈리아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 주범이 사용된 것이 특별할 것이 없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베네치아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 베네치아의 복잡한 역사는 거리상 가까운 로마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비잔틴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정치적으로도 로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건축과 미술에서도 비잔틴 양식이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왼편: <도제궁>; 오른편: <황금의 집>

도제궁과 황금의 집은 14,15세기에 건축되었다.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의 흔적보다는 비잔틴과 아랍 건축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이에 비해 산소비노의 건축은 기본적인 기둥의 구성만으로 입면을 구성하는 그리스 건축과 그것을 쌓아 올린 로마 건축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건축가 산소비노의 업적은 베네치아에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을 이식한 것이고, 이것은 북이탈리아에서 등장하는 한 건축가로 이어져 고전 건축의 정수를 만들어 내는데 일조한다. 그는 18장에서 다룰 안드레아 팔라디오(1508-80)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

베네치아 친퀘첸토를 이끄는 대표적인 화가는 조반니 벨리니다. 그는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의 스승 격으로 베네치아 특유의 화풍을 만들어내는 틀을 제시했다. 베네치아의 친퀘첸토 미술이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중부 이탈리아의 그것과 구별되는 점은 "빛과 색채"이다. 중부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이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투시법과 단축법을 발전시켜 "선과 드로잉"을 강조한 반면 베네치아의 예술가들은 색채의 면으로 공간감과 사실성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왼편: <성스러운 대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72; 오른편: <성모와 성인들>, 조반니 벨리니, 1505

콰트로첸토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성스러운 대화>와 비교하여 조반니 벨리니의 그림은 외곽선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다. 또한 빛에 의한 명암과 그림자의 선명도 역시 덜 강조된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벨리니는 배경과 인물들 사이의 색의 경계를 또렷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에서 오른편의 붉은 토가와 배경의 구분은 선명하지만 벨리니의 그림의 오른편에 등장하는 붉은 옷은 어두운 명암을 통해 부드럽게 처리된다. 또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은 템페라 기법을 통해 그려져 색채의 선명도가 떨어진다. 반면 벨리니는 유화를 사용하여 색의 선명도와 다양함이 돋보인다. 베네치아 화가들이 다양하고 선명한 색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유화의 발전도 있겠지만 색채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재료를 공급하기 좋은 무역 조건도 한몫했다. 

위의 두 그림은 모두 <sacra convensazione>, 즉 "성스러운 대화"라는 주제로 그려진 작품들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굳게 입을 다문다. 다만 기증자인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1422-82)만이 옆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벨리니는 인물들이 응시하는 곳이 제각각이다. 굳게 다문 입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같으나 각자 자신의 고민에 빠져있는 듯하다. 이는 주제인 <성스러운 대화>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성스러운 대화는 세속의 그것과는 다르다. 세속의 대화는 마주 보는 자세와 눈빛 그리고 제스처를 통한 의사전달과 감정표현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성스러운 대화는 신과의 접촉이므로 그러한 시선의 만남이나 신체적 방향성은 의미를 상실한다. 신성한 대화의 성스러움은 인물들의 진지한 태도와 내면으로의 집중에 있고 벨리니는 이러한 내면으로의 집중에 더욱 무게를 둔 것이다.

왼편: <사막의 성 히에로니무스>, 1455; 가운데: <피에타>, 1469; 오른편: <마돈나 델리 알베레티>, 1487

벨리니가 초창기부터 빛과 색채롤 통한 회화를 시도한 것은 아니다. 그의 초창기 작품인 <사막의 성 히에로니무스>와 청년기 작품인 <피에나>와 <마돈나 델리 알베레티>에서의 색채와 구도는 콰트로첸토의 화가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평범하다. 그는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적 특징인 스푸마토 기법에 영향과 그의 처남인 안드레아 만테냐의 어두운 화풍의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 친퀘첸토의 기반을 만들었다.


조르조네(Giorgio da Castelfranco, 1478-1510)

회화 역사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조르조네는 32살로 요절한 천재 화가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어떠한 서명도 하지 않았고 그림 속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수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흥미로운 해석들을 유발하는 것은 <폭풍우>이다.

<폭풍우>, 조르조네, 1508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중심이 비어있다는 것이다. 콰트로첸토와 친퀘첸토의 화가들은 그림의 비례를 위해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를 택했다. 하지만 이 그림의 중심인 강물은 어떠한 특징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살짝 오른쪽 윗부분으로 치우친 하늘의 구름 사이로 번갯불과 같은 빛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면의 양쪽에 위치한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짐작하기도 쉽지가 않다.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으로는 신학적 해석, 자연에 대한 해석, 정치적 해석 등 해석하기에 따라 다양한 해답이 존재한다. 왼쪽의 남자를 아담으로, 오른쪽의 여자를 이브로, 그리고 아이를 그들의 첫 아이인 카인으로 해석한다면 번개 치는 자연은 '천사의 불타는 검' 즉, 신의 분노와 처벌로 해석될 수 있다. 가운데 위치한 부러진 기둥은 죽음과 삶의 덧없음을 의미한다. 예술사학자 살바토레 세티스(Salvatore Settis, 1941-)는 군인으로 보이는 남성은 힘, 여성은 어머니 혹은 사랑으로 해석된다면 자연은 삶 그 자체 혹은 삶의 시련을 의미한다. 삶에서 힘과 사랑은 필수적 요소로 조화와 균형을 통해 삶을 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 다른 해석은 폭풍우가 몰려오는 흐린 날씨를 베네치아가 처한 정치적 상황, 즉 전쟁의 기운이 드리운 위태로운 상황으로 해석할 경우다. 

왼편: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의 사자; 가운데: <폭풍우>의 일부; 오른편: 파도바의 다 카라라 가문의 문양

그림의 왼편 건물에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 마르코의 사자가 오른편에는 파도바의 다 카라라 가문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파도바는 베네치아가 캉브레 동맹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적이 있는 도시이다. 이는 베네치아 역시 전쟁의 화마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의미한다. 

장르적으로 이해하자면 이 그림은 풍경화의 시초라고 일컬어진다. 풍경화는 풍경 그 자체가 목적인 그림으로 이전까지 풍경 혹은 배경은 인물을 위한 세팅에 불과했지만 여기서는 인물들이 풍경의 분위기를 더하거나 자연물의 크기를 짐작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쓰인다는 큰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조르조네의 풍경화를 '그림으로 된 시' 즉, <poesia>라고 한다. 당시 생업, 전쟁, 인간관계 등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난 자연 자체를 그린 작품이 유행했다. 여기서 줄거리나 등장인물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풍경이 주는 분위기와 느낌이다.


티치아노 (Tiziano Vecchelio, 1488/90-1576)

또 다른 베네치아의 화가로는 초상화로 명성을 날린 티치아노가 있다. 피렌체의 예술가들에 대적할만한 독창적 회화를 개척한 티치아노는 당대 유럽의 각지에서 명성을 날렸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스페인의 카를 5세로부터 여러 작품 요청을 받을 정도였다. 

<젊은 영국인의 초상>, 티치아노, 1540-45

그는 초상화에 있어서 대상과 얼마큼 닮았는지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대상을 충실히 묘사할 자신이 있었기에 더 나아가 그 인물을 더욱 생생히 재현해 낼 것에 욕심을 냈다.


<충분한 재현성, 공적 및 사적인 지위의 표현... 뿐 아니라 묘사된 인물을 생기 넘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절제된 특성...>


곰브리치는 이 영국인의 초상에서 티치아노는 "영혼이 담긴 강렬한 표정"을 구현해 냈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를 연구한 티치아노는 그의 스푸마토 기법에 영향을 받아 흐릿해 보이는 붓터치를 통해 색채의 면과 면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빛과 색채를 통한 회화는 모든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는 비현실적 시각효과를 제거하고 선명하지 않지만 생생한 표현을 가능케 했다. 

<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 티치아노, 1519-26

야코포 페사로는 파포스의 주교로 1518년 프라리 대성당의 예배당을 인수한 후 티치아노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티치아노는 피렌체의 화가들이 완성한 안정된 구도를 벗어던지고 역동적인 대각선 구도를 택했다. 화면의 중심에는 성모와 성자가 아닌 베드로가 위치하여 페사로와 성모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페사로는 공로를 인정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그림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뒤에 이름 모를 기사가 들고 있는 붉은 깃발에는 교황과 페사로 가문의 문양이 있고 붉은 깃발은 성모의 옷과 같은 색으로 구도가 아닌 색을 통해 기울어진 구도에 균형을 부여한다. 아기 예수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으며, 성 프란체스코는 양손으로 우측 하단의 다섯 명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페사로의 가족들로 그와 함께 구원받기를 요청하고 있다. 오른편의 아이는 유일하게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라파엘로 본인을 표현한 것과 유사하다. 전체적인 구도는 직각삼각형으로 좌측 하단의 네 인물, 우측 하단의 다섯 그리고 우측 상단의 넷으로 묶어 규칙적 배열을 피하고 있다. 이 배치는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각 제자들은 셋씩 묶음으로써 단순한 군상의 평면적 구성을 극복한 데서 착안한 듯하다. 


코레조(Antonio da Correggio, 1489-1534)

이탈리아의 코레조 지방의 안토니오는 도시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린다. 코레조는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가 성취한 빛과 색채의 효과를 극적으로 발전시킨다.

왼쪽: <거룩한 밤>, 코레조, 1530년경; 오른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60년경

코레조의 <거룩한 밤>은 빛의 효과를 통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림에서 광원은 아기 예수로 마치 촛불과 같이 주변을 비춘다. 거룩한 밤은 이 세상에 재림한 빛의 탄생을 기린다. 화면은 X자 모양으로 대칭된 구성을 띠는데 왼편의 무리들과 성모 뒤에 있는 그녀의 남편 야콥이 대칭을 이루고 왼편 상단의 천사들과 우측 하단의 식물들이 대칭을 이룬다. 피렌체 화가들의 안정된 구도와 달리 역동적 구도를 통해 관객의 시선을 여기저기로 이끈다. 이러한 빛의 연출은 콰트로첸토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서 시도한 빛의 연출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공간감을 부여하기 위해 왼편 병사의 뒷부분에 그림자를 주어 전체 공간의 입체감을 느끼게 했다. 코레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빛의 광원을 한 점으로 모아주어 연출 효과를 극대화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포기하지 못한 어두운 부분의 묘사에 대해서도 코레조는 과감히 생략하고 빛이 비치는 부분에 집중한다. 강한 명암의 대비를 사용하는 회화의 기법을 <Chiascuro(키아스쿠로)>라고 한다.

<성모의 승천>, 코레조, 1526-30

코레조는 파르마 두오모의 천장화로 <성모의 승천>을 그리게 된다. 돔의 천장화는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코레조는 닫힌 천장에 하늘을 그려 넣는다. 가운데 태양빛이 내리쬐고 나선형으로 배치된 천사와 성인들 사이로 성모가 승천한다. 관찰자의 시선을 소용돌이치며 중심의 빛으로 향하게 된다. 이렇게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방식을 <sotto in su>라고 한다. 

왼편: <성모의 승천>의 일부; 오른편: 만투아 공작 궁전의 천장화, 안드레아 만테냐, 1450

코레조의 극적 연출은 콰트로첸토의 화가 만테냐가 이미 시도한 바 있다. 만테냐는 극적 연출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데 천장화에 있어 실제로 그곳에 공간이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아이디어를 냈다. 만테냐의 아이디어에 빛과 색채의 효과까지 덧입히자 돔의 천장에는 실제로 성모가 승천하는 듯한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대각선 구도의 역동성을 넘어서는 수직방향의 역동성을 성취해 냈다.

<유피테르와 이오>, 코레조, 1531-32

코레조의 <유피테르와 이오>에서 유피테르는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그려진다. 피렌체의 화가들이라면 구름 속에 숨어있는 또렷한 유피테르를 그렸겠지만 이 베네치아의 화가는 색의 덩어리를 통해 능욕당하는 이오를 그려내고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이오의 상황은 형체 없는 것에 대한 무기력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16세기 초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빛과 색채"를 통해 피렌체의 화가들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다. 그리고 그들의 성취와 업적은 이후 바로크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흐릿한 경계와 강렬한 명암의 대조는 바로크 미술의 특징으로 베네치아 화가들이 실험했던 유산들을 발전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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