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의 달성 - 16세기 초: 토스카나와 로마
이탈리아 내에서도 중부 지역을 이르는 토스카나와 로마를 중심으로 1500년경 미술사에서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세명의 예술가가 등장했다. 이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75-1564) 그리고 라파엘로 산초 (1483-1520)이다. 이들이 활약한 시기인 16세기 초반을 이탈리아어로 <Cinquecento(친퀘첸토)>라고 하는데 500의 이탈리아어로 1500년대를 의미한다. 이전 시기를 <Quattrocento(콰트로첸토)>라고 하고 1400년대를 뜻한다. 콰트로첸토를 초기 르네상스(Early Renaissnace)라고 하고 친퀘첸토를 전성기(성기) 르네상스 (High Renaissance)라고 한다. 친퀘첸토에는 콰트로첸토의 수많은 예술가들의 <전통과 혁신>의 담론과 시도를 통해 얻어낸 수확을 기반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거장들이 등장했다. 이 세 예술가 가운데 레오나르도는 나머지 둘의 존경을 모두 받은 당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고의 예술가였고, 미켈란젤로는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조각과 (조각적) 회화에 있어서 비교불가능한 업적을 이루었다. 라파엘로는 소위 성장형 인물로 끊임없이 다른 예술가들의 장점을 흡수하여 37세의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회화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곰브리치는 친퀘첸토의 건축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15-16세기 건축은 미술사에서 다루기 너무 광범위해서 가장 도드라지는 변화만 설명하고자 했다. 콰트로첸토의 건축적 혁명을 이끈 예술가는 단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1377-1446)이다. 피렌체를 주무대로 활동했던 이 예술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적 성취를 재현하기 위해 부족한 정보와 난해한 조건들을 창의적 방법으로 해결했다. 이는 피렌체 두오모의 돔 부분 작업에서 빛을 발한다.
15세기에 교황 니콜라우스 5세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세기에 건립한 구 성베드로 성당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성베드로 성당'을 계획한다. 이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는 당시 최고의 건축가였던 도나토 브라만테 (Donato Bramante, 1444-1514)의 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미켈란젤로, 카를로 마데르나 , 잔 로렌초 베르니니 등의 예술가를 거쳐 12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1626년에 완성되었다.
건축가 브라만테는 르네상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조화롭다고 알려진 수작 템피에토(tempietto)를 1502년경 완성한다.
이름 그 자체로 이 작은 신전(tempietto)은 기원전 1세기 경에 로마 근교 티볼리에 지어진 베스타 신전(Vesta Temple)을 선례로 설계되었다.
브라만테가 시도한 원형 신전은 중세에서 볼 수 없었던 그리스 십자가(greek cross)와 함께 르네상스 건축의 새로운 평면의 형태가 되었고 실용적인 측면보다 추상적 의미와 기하학적 완성도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은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적 지원을 받아 견고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른 두 명의 거장보다 20여 년 먼저 태어났다. 또한 그들과 구별되는 점은 그의 관심사가 워낙 다양했고 그 모든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조각, 건축, 회화뿐 아니라 해부학, 발명, 요리 등 다방면에서 각기 다른 업적을 쌓았다. 그의 스승인 베로키오는 제자에게 자신의 작품의 일부를 그릴 것을 허락했는데 이후 자신은 그림보다 조각에 몰두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레오나르도가 최고의 천재라 불리는 것은 그가 실무적 측면에서 작품을 만들어내기만 하는 예술가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론적인 학습과 연구를 병행하여 작품에 적용하는 도전적인 예술가였다.
최후의 만찬
밀라노에 위치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교회의 식당의 한 벽면에 레오나르도가 남긴 유명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훌륭한 계획 해놓고 이런 문제점을 예방할 수는 없었을까? 레오나르도의 실험정신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도전정신이다. 그는 프레스코화의 고질적인 문제인 흐릿한 색채를 해결하기 위해 유화의 기법을 혼용하는 시도를 감행한다. 결과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훼손으로 지금 우리에게 온전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그의 실험정신이 작품을 가리지 않고 시도되었음을 가장 잘 전달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에서 콰트로첸토의 가장 큰 업적인 투시도와 공간감을 이어받았다. 배경이 되는 건축 공간에서 완벽한 대칭(symmetry)을 구성하고 인물들이 나란히 배열되는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선적인 평면성을 완화하기 위해 세 명씩 묶고 다양한 자세를 취하게 하여 해결했다. 또한 인물의 머리와 몸의 간격을 다양하게 조절하여 단선적일 수 있는 일자 배열의 문제를 극복했다. 그는 벽화를 감상할 때의 관점에 대한 글을 남기는데 투시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본적 왜곡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 벽화를 보는 눈은 항상 그림의 중심에 위치한다. 직선 벽이 제공하는 관점 자체는 보는 눈의 위치가 벽을 단축된 관점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를 보정하지 않는 한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시각적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정확히 있다고 가정할 때, 이 두 왜곡이 서로 상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른 모든 경우에는 평면 원근법의 왜곡과 구형의 자연스러운 원근법이 그림의 벽면의 왜곡이 서로 다르게 상쇄되는 대신 서로 합산되거나 중첩되는 일이 발생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기괴해 보인다.>
만약 <최후의 만찬>을 공간의 중심에서 보지 않고 한쪽 벽에 기대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보일 것이다.
이것이 레오나르도가 말하는 '기괴한 이미지'이다. 너무 당연한 말과 같지만 이러한 시각 효과에 대한 연구는 이후 <모나리자>를 그릴 때 환상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의 빼어남을 알기 위해서는 당대 혹은 이전 시대인 콰트로첸토의 예술가들의 작품과 비교해 보면 된다.
이 콰트로첸토의 거장들은 각기 그들의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움을 이루어냈다. 기를란다요는 선형적 배치에 단 한 명의 뒤돌아 선 인물을 넣음으로써 공간감을 부여한다. 그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천장 부분의 입체감 역시 이러한 공간감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프라 안젤리코는 인물의 배치를 직각으로 하고 오른편에 무릎 꿇은 일군의 인문들로 'ㄷ'자 모양의 공간을 떠오르게 한다. 이 두 거장은 당시 투시도와 입체감이라는 과제에 각자의 해답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레오나르도는 인물들의 배열이 아닌 뒷 배경의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는 방식과 그룹 지어진 세인물들 간의 몸짓과 감정 표현을 통해 부분적 공간감을 형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또한 측면의 검은 공간들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선형적 인물 배치의 배경에 끊임없는 변화를 주었다.
모나리자
<모나리자(Mona Lisa)>는 monna, 즉 madonna 여인, 부인을 뜻하는 말과 그녀의 이름 리자를 합친 말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이 작품은 <La Gioconda (라 조콘다)>로 불리는데 그녀의 남편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이름을 따서 조콘도의 여성형인 조콘다로 부른다.
눈썹이 없는 이 여인은 눈썹이 없어서 오히려 신비한 느낌을 준다는 평도 있지만 사실 눈썹은 원래 있었고, 그림을 보존하기 위한 '배니싱' 작업과정에서 점차 사라졌다는 분석이 있다. 이 그림에서 주목할 기법은 스푸마토(Sfumato)인데, 이탈리아어로 '안개' 혹은 '흐릿하다'라는 뜻으로 선명한 선이 아닌 흐릿한 처리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레오나르도 흐릿한 표현을 선택한 이유는 '선명함'이 아닌 '사실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콰트로첸토의 예술가들은 '선명함'이 곧 '사실성'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선명함을 올리는 방향, 정확한 묘사가 '재현'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지나친 '선명함'은 '사실성'을 훼손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우리의 눈은 한 점에 초점을 맞추면 다른 부분은 흐릿하게 포착한다. 사실상 아웃포커싱이 자동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특정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선명하다는 것이 '사실적인 것'이 아닌 '사실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오히려 흐릿한 부분을 그려 넣은 레오나르도는 '선명함' 대신 '상상력'이 사실성을 채워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상상력은 없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 은근한 표현을 알아차리는 힘일지도 모른다. 레오나르도는 자연을 관찰하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된다.
<자연에는 빛과 어둠이 있을 뿐,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경계선, 다시 말하면 선명함은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낸 가상의 사실성에 불과함을 말한다.
앞서 <최후의 만찬>에서 시각 효과에 대한 연구는 모나리자의 좌우 얼굴에 적용되어 조콘도 여사의 미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녀의 얼굴을 반으로 나누어 왼쪽, 즉 그녀의 오른쪽 얼굴만 바라보면 그림자도 거의 없고 입모양은 미소 짓지도 않는다. 오른쪽, 즉 그녀의 왼쪽 얼굴은 광대뼈 아래쪽에 명암이 들어가 있으며 입꼬리로 보아 살짝 미소 짓는 듯하다. 배경의 시점도 왼쪽이 오른쪽보다 위에서 내려다본 듯하여 좌우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조콘도 여사의 양 눈을 보면 각기 조금 다른 부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좌우 얼굴에 각기 다른 분위기를 담고자 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녀의 얼굴에 지킬과 하이드와 같은 다른 인격을 담으려고 했을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레오나르도가 조콘도 부인을 그리고 있을 때 그녀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아주 살짝 웃음을 지을 때는 그녀의 남편이 그곳을 방문할 때였다. 레오나르도는 한 인간의 외면만을 그리는 것이 아닌 내면을 그리고자 했고 그녀의 미소 짓는 순간 그녀 내면의 일부가 드러난 것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내면의 감정까지 담을 수 있어야 진정한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 말은 <모나리자>를 이해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는 그의 유언장에 <mulier ingenua>라는 말을 남겼다. mulier는 부인을 뜻하고, ingenua는 순수한 영혼, 도덕적으로 순결한 상태를 뜻한다. 죽음 앞에서 그가 바라본 그의 부인은 순수한 영혼 그 자체였고, 레오나르도가 보기에 그의 그림은 그녀의 순수하고 순결한 영혼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가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그림을 의뢰인에게 주지 않고 자신이 간직했던 것은 스스로 인정하는 최고의 걸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의 서북쪽에 위치한 바티칸에는 작은 예배당이 하나 있다.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축성한 이 작은 예배당의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증명한다.
조각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던 미켈란젤로는 당시 교황 율리오 2세의 영모를 만들던 중 일을 잠시 멈추고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려줄 것을 요구받는다. 미켈란젤로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압박에 못 이겨 그는 이 프로젝트를 수락하게 된다. 천장화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오른쪽부터 [빛과 어둠의 분리], [해와 달의 창조], [물과 흙의 분리],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유혹받는 아담과 이브,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노아의 번제], [대홍수], [술에 취한 노아]까지가 중심부의 내용이다.
이 가운데 <아담의 창조>는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힌다. 아담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다. 아담의 어원이 adamus는 흙,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한 후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빚은 것이 아담의 육체다. 천장화에서 왼편의 아담은 초점 없는 눈과 의지 없는 자세의 몸짓을 취한다. 껍질만 있고 영혼이 아직 주입되기 전이다. 오른편의 그리스도는 역동적인 몸짓과 또렷한 눈빛을 띤다. 신의 의지로 껍질뿐인 아담의 신체에 영혼이 깃들기 직전의 상태를 미켈란젤로는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그의 <최후의 심판>에도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위치한 천국으로 가는 입구는 좁다. 왼편에 사다리를 들고 있는 인물과 오른편에 인간 가죽을 들고 있는 좁은 틈 사이로 구원받은 영혼의 입장이 허락된다. 구원의 대상은 영혼이기에 육체의 껍데기는 입장이 불허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잘 다듬어진 신체의 소유자들이다. 그의 해부학적 지식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 그는 조각에서 흔히 시도되는 자세들을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가 빼앗긴 조각가로서의 기회를 조각을 그림으로써 되찾았다. 미켈란젤로는 한때 고대의 유물인 <토르소> 작품을 목도한 후 자신의 조각에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고대 조각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자세는 고대 그리스 조각들에 대한 연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가 남긴 소위 <노예연작>은 그의 조각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그가 작업을 하고 있는 대리석 속에 인물들이 숨어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조각가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들을 덮고 있는 돌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노예연작을 남기면서 그들을 가두고 있는 돌을 완전히 제거해주지 않은 까닭은 노예는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노예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독립하여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노예의 노예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은 그들이 구속되어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가 작품의 완성 직전에 그것을 멈추는 일이었다. 이렇게 마무리되지 못한, 혹은 마무리되지 않은 기법을 <non-finito>라고 한다. '미완성'이라는 뜻의 이 기법은 그가 미완의 인간을 표현하는 게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3명의 거장 가운데 가장 젊고 가장 젊은 나이에 생을 마무리한 라파엘로는 서른일곱의 나이에도 회화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존경했던 레오나르도의 회화적 성취를 자신의 스승인 페루지노로부터 배운 것에 접목했다. 또한 자신의 라이벌로 불렸던 미켈란젤로의 해부학적 업적도 수용하여 회화의 완성도를 점차 끌어올렸다.
그는 자신의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의 얼굴에 레오나르도의 얼굴을,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에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스스로를 겸손하게 한쪽 구석에 배치했다.
라파엘로는 많은 성모자상을 남겼는데 <Madonna del Granduca>(대공의 성모)는 그가 피렌체 시절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으로 16세기 초 가장 아름다운 성모의 모습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라파엘의 성모자상은 콰트로첸토의 예술가들에게서 드러나는 경직된 모자의 관계를 극복하고 다정하고 친밀한 성모자의 관계를 그려낸다.
조토와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에서 성모자는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표정에도 온화함을 찾기 힘들다. 신성을 가진 사람에게 감정을 보이는 것은 신격을 떨어뜨린다는 우려였을 터이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모자 사이의 친밀감을 통해 "모성애" 그 자체를 이상화하여 그려내었고 이것에 구성적 아름다움을 더했다.
라파엘로의 걸작으로 알려진 <갈라테아의 승리>는 앞선 예술가들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취득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갈라테아의 뒤틀린 신체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드러나는 신체 연구에 영향을 받았음이 자명하고 전체적인 구성에서의 기하학적 안정성과 인물들의 대칭적 배치를 통한 입체적 공간감의 확보는 콰트로첸토의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자칫 폴라이우올로의 작품에서 드러나듯 경직되고 지루해질 수 있는 이 구성에 라파엘로는 역동성과 활발함을 불어넣었다.
경직될 수 있는 구성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방법을 그는 보티첼리에서 찾았을지도 모른다. <비너스의 탄생>에서 왼편의 제피로스가 부는 바람은 비너스의 머리를 흩날리게 하고 오른편 봄의 여신인 호라가 들고 있는 붉은 천의 펄럭거림을 이끌어낸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가 이루지 못한 색채의 다채로움과 자연스러움을 이루어냈고 레오나르도의 이루지 못한 많은 완성작을 만들어냈다. 라파엘로의 회화의 성취는 이후 300년 넘게 이어져 회화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고, 19세기 중반 등장하는 '라파엘 전파'의 비판적 시각이 있기 전까지 회화 분야에서의 불가침의 영역을 차지했다.
친퀘첸토의 세 천재 예술가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콰트로첸토의 성취를 수용, 발전시켰으며 그들의 천재성은 당시 권력자들의 경쟁과 맞물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제 예술가는 단순 기술자가 아닌 신의 창조적 권능의 일부를 물려받아 세상에 뿌려진 신성의 아름다움을 한데 모아 재창조하는 직업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