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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Dec 04.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27장 -1

실험적 미술 - 20세기 전반기

[배경]

19세기까지 건축에서의 변화는 미미했다. 다양한 양식의 자유로운 조합이라는 절충주의적 해답 이외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아르누보에서 시도된 '철과 유리'의 적용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19세기에 개발된 '철근 콘크리트'는 평면 구성에 있어서 건축가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두꺼운 기둥이 빽빽하게 들어서야 할 자리에 얇은 기둥이 더욱 넓은 간격으로 배치되었고, 평면에서 기둥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들자 벽체는 제한적 요소가 아닌 자유로운 평면을 위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철근 콘크리트의 안정적 구조는 창의 가로 크기를 넓게 만들었고, '가로로 긴 창'의 등장은 내부 공간의 밝기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은 입면 구성의 고전적 한계를 벗어나 양식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건축물의 기능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건축에서의 '기능주의(functionalism)'는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 1856-1924)이 남긴 말로 근대 건축의 시작을 알린다.


<form follows function.(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설리번의 이 명제는 근대 건축의 4대 거장이라 불리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에게 이어져 근대와 현재 도시의 모습을 만드는 근간을 이루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

라이트는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후 설리번의 사무실 Adler&Sullivan 에서 근무하며 건축을 배웠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라이트였지만 어머니 안나가 구입한 프뢰벨(Froebel)의 교육용 블록 세트는 라이트가 건축가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라이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자서전에 남겼다.


<몇 년 동안 나는 4인치 간격으로 선이 그어진 작은 유치원 탁자 위에 앉아 4인지 정사각형을 만들었으며무엇보다 이 단위선을 가지고 정사각형(입방체), (및 삼각형(사면체삼각대)을 만들며 놀았다이것들은 매끄러운 단풍나무 블록이었다.>


회고에서 알 수 있듯 라이트의 건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단위선'으로 이루어진 격자의 틀과 그것을 채우는 기하학적 도형들이다. 

<로비 하우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909

1909년에서 1910년 사이에 지어진 로비 하우스는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에 위치해 있다. 다른 7개의 작품과 함께 로비 하우스는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건축사적으로 중요하다. 라이트 초기 작품들을 이르는 '프레리 스타일(Prairie Style)"은 수평선, 넓게 달린 처마와 평평한 수평지붕, 수평띠의 창문, 풍경과의 조화, 견고한 구조, 장인 정신 등을 특징으로 한다. 건축물의 외관에서 강조되는 수평방향의 선은 검은 처마의 띠와 벽체의 줄눈, 벽체 위의 회색빛의 띠로 드러난다. 건축물의 내부에서도 선적이 요소가 강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유리창의 장식에서도 기하학적 구성이 눈에 띈다. 라이트는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에서 강조되듯, 건축물과 내부 장식의 디테일, 가구까지 모두 스스로 디자인하고 구현했다. 


<건물을 한 가지로 생각하고 가구를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모두 그 특성과 완전성의 단순한 구조적 세부사항이다.>


<낙수장(Fallingwater)>,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935

라이트는 건축이 인간과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러한 건축을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라고 불렀다. 이후에 등장하는 다른 '유기적 건축'들이 자연의 곡선을 따르는 비정형의 특징에 주목했다면 라이트는 자신의 건축 언어를 유지한 상태에서 환경과 건축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고민했다. 그의 걸작으로 불리는 '낙수장'이 완성되고 난 후 타임지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91년 미국 건축가 협회는 "미국 건축 역사상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했고, 2007년에는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 29위에 올랐다. 사업가 에드거 J. 카우프만은 의뢰를 위해 주변 폭포를 조사해 줄 것을 라이트에게 요구했다. 대규모 인원을 초청하는 집을 원했던 카우프만의 요구와 달리 건축물은 폭포 위를 지나가는 불안한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예상 비용을 다섯 배 가까이 들여서야 완성된 낙수장은 구조적으로도 캔틸레버를 길게 뺀 획기적인 디자인이었다. 라이트는 건물의 중심 동선과 구조를 담당하는 부분을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치장 벽돌을 붙여 거칠고 튼튼한 느낌을 보였다. 반면 수평성이 강조된 머무는 공간들은 간단한 회벽칠을 통해 구분 지었다. 자연의 돌의 느낌을 해치지 않는 건물 중심부의 재료 사용을 통해 수평성의 인위적 재료 사용이 주변 자연경관을 해치는 것을 최소화했다.


[표현주의(Expressionism)]

표현주의는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 운동을 총칭하는 말로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자연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의 움직임을 일컫는다. 자연주의 경향의 예술은 객관적이고 구상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반면, 표현주의는 주관적이며 단순화된 기법의 특징을 띤다. 표현주의의 선구자로는 고흐, 고갱, 로트렉, 뭉크, 호들러 등이 있고, 주된 그룹으로는 드레스덴의 다리파(Brücke, 1905-1913),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한 청기사파(Der Blaue Reiter, 1911-1914), 반지(Der Ring), 유리사슬연맹(Gläserne Kette) 등이 있다. 이들은 작가의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경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감각적 인상에 의한 경험과 기억에 의한 경험이 있다.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전하고자 하는 경험은 예술가 개인의 경험이자 집단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기 때문에 사회적, 정치적 구호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내면의 상태가 외부 세계와 만나면서 생겨나는 경험과 감각을 공유하는 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는 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서 비롯된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노르웨이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뭉크는 그가 5살 되던 해 어머니를 잃었다. 그가 사랑했던 자신의 누이마저 1877년 그녀가 15세 되던 해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허약했던 뭉크는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낸 날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아들에게 역사와 문학을 가르치고 에드가 앨런 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뭉크가 밝히듯 아버지의 긍정적인 사고는 병적인 경건주의로 인해 자신에게 광기의 씨앗을 물려주었다. 


<아버지는 기질적으로 긴장하고 강박적으로 종교심이 강해서 신경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나는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두려움, 슬픔, 죽음의 천사들이 내가 태어난 날부터 내 곁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집착적 신경증과 여동생의 정신적 문제는 자신이 유전적 광기를 지녔을지 모르는 불안감을 초래했다. 예술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미친 사람"의 작품이라고 비난했고, 사실주의 화가들과 비평가 샤르펜베르크는 그가 "미친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가 하는 예술은 "미친 짓"이라는 원색적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예술가를 "불경한 직업"으로 생각했던 그의 아버지와 달리, 뭉크는 자신의 일기에서 예술에 대한 생각을 밝힌다.


<나는 내 예술에서 삶과 그 의미를 나 자신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어린 시절부터 인상주의에 영감을 받았던 뭉크이지만 그는 인상파의 기법이 충분한 표현을 제한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기법이 피상적이고 과학적 실험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뭉크는 "자신의 삶"을 쓰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감정적 상태와 심리 상태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스스로에 대한 관조와 고독을 위해 "영혼 일기"를 썼다. 뭉크는 기법적으로 고갱, 고프, 로트렉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고갱의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과 '자연의 모방이 아닌 인간의 작품'이라는 예술관이 그를 자극했다. 

왼편: <절규>, 에드바르트 뭉크, 1893; 오른편: <절규> 석판화버전, 에드바르트 뭉크, 1895

뭉크는 <절규>를 그리며 자신의 목표를 "영혼에 대한 연구, 즉 나 자신에 대한 연구"로 정했다. 뭉크는 이 그림이 만들어진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저는 두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해가 지고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습니다. 저는 멈춰서 울타리에 기대어 섰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쳤습니다. 불과 피의 혀가 푸르스름한 검은색 피오르드 위로 뻗어 있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계속 걸었고, 저는 뒤처져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때 저는 자연의 엄청나고 무한한 비명을 들었습니다.>


그림의 왼편 구석에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그의 두 친구다. 두 친구에게 자연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 듯하다. 그들의 태도는 무덤덤하기 때문이다. 화면의 중앙에서 소리치고 있는 뭉크에게만 자연을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같은 자연을 걷고 있는 뭉크와 그의 친구들은 전혀 다른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인상주의자들은 야외에서의 빛의 효과가 주는 인상을 포착하고 관객에게 전하려 했다. 하지만 뭉크는 자연에 비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고, 자연으로 자신 내면을 찍어내는 표현(ex + press)에 중점을 두었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말하듯 감정만이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다. 자신의 '절규'는 '자연을 가로지르는 비명'으로 전이되고, 자연의 비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은 구불구불한 선과 비현실적인 색채의 사용이다. 그의 석판화를 보면 <절규>의 감정이 색채 없이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붉은 하늘의 폭발적인 데시벨보다 혼란스러운 불협화음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뭉크가 표현하는 내적 절규는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불안을 표현하고 있고,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우울과 음습함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위안을 주기도 한다. 우리가 느끼는 우울, 불안, 절망의 감정이 나만의 불행이 아님을 확인받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왼편: <불안>, 1894; 가운데: <절망>, 1892; 오른편: <절망>, 1894

뭉크는 <절규> 이외에도 다양한 감정을 화폭에 담았다. <불안>에서 모든 인물들이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다수의 눈빛이 우리를 바라본다. 불특정 다수의 감정 없는 시선에 의해 관찰당하는 것이 근대 이후 인간이 느끼게 되는 불안이다. 그들의 '예측 불가능'한 반응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떨어뜨리고 공포와 불안을 자아낸다. 두 <절망>에서 주인공은 친구들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같은 공간에 있으나 감정적 공간은 분리되어 있다. 주변인에게 어떠한 위로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전되어 가는 감정은 소위 '군중 속의 외로움'이며,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감정이다. 뭉크가 다루는 이러한 감정적 용어들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에게서 받은 영향이다. 니체는 내면의 탐구를 위한 '고독'을 찬양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불안'과 '절망'의 정체를 밝히고자 했다. 그에게 절망은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불안은 외부 대상들에 대해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다. 이 환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다가올 미래에 대한 자신의 예측 불가능성이 초래하는 감정이다. 따라서 니체는 현재에 집중하는 삶(carpe diem)을 해답으로 내놓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에드바르트 뭉크, 1906

뭉크는 1900년에 세상을 떠난 니체의 초상화를 그린다. 초상화의 크기는 약 2미터 높이로 실제 사람보다 크게 보이도록 의도되었다. 절규에 비해 안정적인 곡선들이 배경을 구성하고, 붉은색의 강렬한 색채보다는 밝은 노란색의 빛으로 철학자의 주변을 밝혔다. 니체의 어깨 부분의 파란색 배경은 마치 철학자에게 날개가 달려있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준다. 


<나는 그(니체)를 그의 동굴 산 사이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시인으로 묘사했습니다그는 현관에 서서 깊은 계곡을 내려다봅니다산 위로 밝은 태양이 떠오릅니다그가 말하는 장소는 그가 빛 속에 서 있으면서도 어둠을 갈망하는 장소이자 다른 많은 것들을 갈망하는 장소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뭉크는 자신과 같은 정신적 문제로 고통을 겪었던 독일의 철학자에게 많은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1888년부터 스칸디나비아에 널리 알려진 니체의 철학은 수많은 젊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실제로 뭉크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했다. 내면의 불안정함을 잘 이겨내어 강건한 철학을 이루어 낸 독일 철학자에 대한 뭉크의 해석은 <절규>에서 보이는 소용돌이치는 불안정한 배경 대신 안정적이고 빛나는 하늘에서 잘 드러난다. 니체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뭉크는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이 철학자에 대해 '본 대로' 그리고자 하지 않았다. 


<나는 … 그를 기념비적이고 장식적으로 그리기로 결정했습니다나는 그를 환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왜냐하면 나는 그를 외부의 눈으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실물보다 더 크게 그려 내 관점을 강조했습니다.>


뭉크가 표현주의 예술가로 평가되는 이유는 객관적 재현이 아닌 주관적 재구성이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상을 표현하는 기준이 자신의 '관점'이고 그것을 위해 현실적 '유사성'을 포기하는 것이 구상화에서 벗어나는 표현주의의 대표적 특징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던 뭉크는 아마 니체의 '밤의 노래'의 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빛이다내가 밤이라도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 빛에 둘러싸여 있거니와 그것이 나의 고독이다.>


[캐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콜비츠는 할아버지의 영향과 시대적 상황 때문에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그녀는 아들을 잃은 세계 1차 대전(1914-1918)을 겪고 빈곤, 전쟁 등이 노동 계급에게 미치는 영향을 작품에 표현하는데 몰두했다. 다른 표현주의 작가들과 같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의사였던 남편 칼에 의해 당시 의료 시스템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던 노동자와 하층민의 고통을 절감할 수 있었다. 

왼편: <죽은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 캐테 콜비츠, 1903; 오른편: <죽은 아들을 둔 어머니>, 캐테 콜비츠, 1937-38

<죽은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은 콜비츠가 의사 남편의 아내로서 겪었던 경험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위생과 질병 문제로 높았던 베를린의 유아 사망은 빈민가에서 유독 빈번히 발생했다. 당시 7살이었던 자신의 아들 피터를 모델로 한 이 작품은 어머니가 죽은 아이를 끌어안은 모습을 표현했다. 그녀의 얼굴은 일부만 드러나 있으며 감은 오른쪽 눈과 주름진 이마의 간소한 표현은 그녀의 자세와 거친 표현 기법을 통해 상실의 고통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에서 콜비츠는 아들 피터를 잃는다. 그토록 타인의 '상실'을 극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드러냈던 콜비츠는 <죽은 아들을 둔 어머니>에서 다소 담담한 자세의 어머니를 그려낸다. 고전적 피에타의 표현처럼 무릎 위에 아이를 두지 않고 쪼그려 앉아 있는 불쌍한 아들을 두 다리와 가슴으로 감싸주고 있다. 그녀는 1937년 아들의 기일에 쓴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는 노인을 위한 조각을 하던 중 떠오른 작은 조각품을 작업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피에타가 되었다. 어머니는 무릎 사이에 죽은 아들을 앉힌 채 앉아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성찰이다.>


콜비츠의 정제된 감정은 개인의 상실감을 연민 혹은 공감(sympathy/Mitleid)하는 '고통의 나눔'이 아니다. 그녀는 이러한 고통이 생겨난 원인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전쟁과 기아, 산업화와 인간성 상실은 이러한 고통의 원인으로서 직접적 원인인 전쟁과 타국의 군인들, 타국민들에 대한 분노 너머에 위치한다. 콜비츠는 사회운동가로서 인간 고통의 근원적 해결책을 사회의 변화에서 찾고자 했고, 평화주의자였던 그녀는 영구적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희망을 통해 희생과 인내의 덕목을 강조했다. 콜비츠는 개인적인 '뜨거운 분노' 보다는 사회적인 '차가운 분노'로의 이행이 근본적 불행의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우리[여성]는 우리 자신의 피를 바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희생을 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남성]이 자유를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콜비츠는 독일의, 세계의 어머니로서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고통스러운 선택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때로는 자신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아이'들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성찰'에 그녀는 도달했다.


[에른스트 바를라흐(Ernst Heinrich Barlach, 1870-1938)]

바를라흐는 독일의 표현주의 조각가로 1906년 러시아로 여행하던 중 러시아 농민과 민속 예술에 대한 인상이 영향을 크게 주었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과 생활 조건 및 삶에 대한 태도를 면밀히 관찰했고 그들의 삶의 전반적인 변화를 기도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상황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열악한 노동자들의 환경의 개선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독일 뿐 아니라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산업화를 통해 발생한 프롤레타리아의 불행한 삶과 공동체의 분열의 조짐에 대한 절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쟁 지지로 이어졌다. 바를라흐도 1차 세계대전을 지지했었다. 하지만 직접 전쟁에 참전 한 이후 지지를 철회하고 반전 운동에 동참했다. 그의 작품에서 1914년 전후로 자신의 관점의 변화가 도드라진다. 

<복수자>, 에른스트 바를라흐, 1914

<복수자>는 역동적인 인물의 구도가 특징이다. 두 손으로 무기를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듯한 역동적 움직임은 그의 앞을 가로막는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그의 바람은 전투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왼편: 막데부르크의 조각상, 에른스트 바를라흐, 1929; 오른편: <부유하는 남자>, 에른스트 바를라흐, 1927

막데부르크의 조각상에서 십자가들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사제복을 입은 인물의 왼편에는 군인이 오른편에는 또 다른 사제가 서있다. 십자가의 아래에는 전쟁으로 죽은 군인의 시체와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두 인물이 양 옆에 위치한다. 기도하는 그의 어머니와 두 손으로 괴로움을 표현하는 그의 아버지는 특정 군인이 아닌 독일 사회의 아버지와 어머니, 나아가 전쟁으로 고통받는 전 세계의 어머니와 아버지다. 십자가에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1차 세계대전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부유하는 남자>는 전쟁을 겪는 동안 느꼈던 바를라흐의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가 느낀 전쟁의 시간에 대한 느낌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나에게 있어 전쟁 중에 시간은 멈춰 있었습니다그것은 지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그 시간은 떠다녔습니다이 느낌에 대해 빈 공간을 부유하는 형상으로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전쟁은 지상의 어떤 시간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것에 속할 수도 없다. 그 시간 동안 느꼈던 자신의 과거의 신념에 대한 반성은 전쟁을 대하는 근본적인 입장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캐테 콜비츠의 '성찰'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고, 그녀가 보여준 포용적 사랑에 대해 감동했다.


<캐테 콜비츠의 얼굴이 의도치 않게 천사의 얼굴로 들어왔습니다그런 것을 의도했다면 아마 실패했을 겁니다.>


그는 의도치 않게 떠오른 콜비츠의 모습이 자신의 조각에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두 조각가의 작품이 우리에게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화된 형태가 주는 집약적 감각에 있다.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단지 하나의 감정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러한 단순성의 효과는 표현주의 조각의 방식이 상상력의 빈곤이 아닌 감각의 집중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에밀 놀데(Hans Emil Nolde, 1867-1956)]

다리파의 일원으로 1937년 나치에 의해 '퇴폐 예술(entartete Kunst)'로 분류되어 작품을 몰수당하기도 했던 에밀 놀데는 인종주의자, 반유대주의자, 나치 열혈 지지자라는 의외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왜곡한 세계관 때문에 작품 자체에 대한 낮은 평가는 피할 수 없었다. 종교에 심취했던 그는 시대착오적 경건주의에 빠져있었고 1911년 이후 어둡고 불길한 톤의 표현이 도드라져 그의 부인조차 그림을 보는데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거칠게 춤추는 아이들>, 에밀 놀데, 1909

놀데는 초기에 인상주의에 심취했다. 밝은 색을 주로 사용한 고조된 순간의 감정 표현은 생동감 있는 움직임을 포착하기에 적합했다. 거친 붓터치와 색채면의 분할은 극적인 감정을 전달하기에 적합했고, 이러한 기법은 고흐에 대한 그의 관심이 드러난 것이다. 1909년 독이 든 물을 마신 후 놀데는 임사체험을 하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는 종교적 주제를 묘사하는 것에 집중한다. 

<선지자>, 에밀 놀데, 1912

목판화로 만들어진 <선지자>는 표현주의 화가들이 내세우는 '단순성'에 대한 추구와 예술가의 감정에 대한 직접적, 직관적 전달이 잘 드러난다. 선지자의 비참한 모습을 디테일한 묘사 없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구상의 정점에 도달했던 사실주의 화가들과 자연과 빛에 대한 '인상'을 기록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한 곳에 표현주의 예술가들은 '단순성'을 이용해 도달했고, 그들의 시도는 '추상미술'로 향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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