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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Dec 18. 2024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 27장 -3

실험적 미술 -20세기 초

[파울 클레 (Paul Ernst Klee, 1879-1940)]

클레는 음악 교사 아버지 한스 빌헬름 클레(Hans Wilhelm Klee, 1849-1940)와 스위스의 가수인 어머니이다 마리 클레(Ida Marie Klee, 1855-1921) 사이에서 태어났다. 클레는 음악뿐 아니라 그림과 시에도 관심이 많았다. 미술 공부를 위해 1898년 뮌헨으로 떠났으나 뮌헨 미술 아카데미의 입학에 실패하고 사립학교를 다니며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클레의 예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1902년 이탈리아로의 여행이었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건축물의 수학적 구조의 비례가 주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나폴리 수족관에서의 경험은 클레가 자연물의 환상적인 형태와 화려한 색채에 관심을 갖게 했다. 또한 시에나에서의 고딕 예술과의 만남은 그의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1년 뮌헨에서 알프레드 쿠빈과 아우구스트 마케, 바실리 칸딘스키와 만나 '청기사파'의 편집팀에 합류한다. 1914년 루이 모이예(Louis Moilliet, 1880-1962), 아우구스트 마케(1887-1914)와 함께 튀니지로 3주간의 연구를 위한 여행을 떠난다. 클레는 일기에서 그곳에서의 경험을 남긴다.


<어두운 힘을 지닌 태양. 땅에서 색채의 다채로운 선명함은 밝은 미래를 약속한다.>


클레는 프랑스의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1941)의 색채에 대한 이해의 영향을 받았다.

<시내를 향한 창문>, 로베르 들로네, 1912

오르피즘(Orphism)으로 불리는 들로네의 색채이론은 색상의 동비 대비의 법칙을 이용해 광학적 지각의 적절한 인식을 회화의 주요 요소로 사용했다.


<예술이 은근함의 한계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우리의 조화로운 시각, 즉 명료함에 의지해야 한다. 명료함이란 비율의 균형이 있는 색채이다. 비율의 균형은 한 가지 행위에 동시에 연관된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다.  이 행위는 빛의 조화롭고 동시적인 움직임으로, 유일한 현실이기도 하다.>


클레는 튀니지를 여행하던 1914년 4월 16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색이 나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녀(색)를 쫓아갈 필요가 없다. 그녀가 나를 영원히 가졌음을 나는 안다. 이것이 행복한 시간의 의미라는 것을 안다. 나와 색은 하나다. 나는 화가다.>


클레는 색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통해 다양한 미술적 실험을 한다.

<고양이와 새>, 파울 클레, 1928

클레가 바우하우스 교사로 일하던 1928년 흥미로운 작품 <고양이와 새>를 그린다. 단순화된 고양이의 형태는 재현에 대한 해방을 의미한다. 고양이의 얼굴은 비대칭이며 눈과 눈 사이는 점으로 존재하며 고양이의 코는 상징적 기호인 하트모양을 띤다. 붉은색으로 표현된 하트에 대응하는 이마의 새 역시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부릅뜬 고양이의 눈은 무엇을 응시하는지 관찰자에게 어떠한 단서도 제공되지 않는다. 추측건대 평소 고양이를 좋아하던 클레가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관찰하다가 고양이가 새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머릿속에 새에 대한 애정을 갖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야콥 폰 윅스퀼(Jakob Johann Baron von Uexküll, 1864-1944)은 생물학적 기호와 의사소통 과정을 이해하는 생물기호학을 연구했는데 그 주제 가운데 하나가 모든 동물에게는 '주관적 시간과 공간, 즉 영적인 '내면세계(Innenwelt)'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독일의 많은 표현주의 예술가들은 그의 연구를 환영했다. 클레는 분명하고 선명한 색채를 피하고 모호하고 몽환적 분위기를 주는 색의 연출을 통해 고양이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듯하다. 마르셀 뒤샹은 1949년 클레의 미술이 가지고 있는 평범하고 순진한 표현은 다른 예술가들의 창작을 위한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클레의 그림을 보고 처음 느낀 반응은 매우 기쁜 발견이었습니다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처럼 그림을 그려보려고 했거나 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그의 작품 대부분은 첫눈에 보면 어린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순진한 표현을 보여줍니다. […] 두 번째 분석에서는 사고의 큰 성숙함을 기반으로 하는 기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유화로 개인적인 방법을 그리는 수채화를 다루는 데 대한 깊은 이해는 장식적인 모양으로 구조화되어 클레를 현대 미술에서 돋보이게 하고 비교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반면에 그의 실험은 지난 30년 동안 많은 다른 예술가가 회화의 가장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창작을 위한 기반으로 채택했습니다그의 극도의 생산성은 보통 그렇듯이 반복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그는 말할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의 클레는 결코 다른 클레가 되지 못했습니다.>


<Tod und Feuer(죽음과 불)>, 파울 클레, 1940

클레는 말년에 상형문자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림과 글이 가지고 있는 기호학적 유사성은 세잔 이후부터 줄곧 극복해 온 회화의 재현적 기능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되었다. <죽음과 불>에서 사람과 같은 두 형상이 등장한다. 화면 가운데 위치한 얼굴 속에서 우리는 알파벳 'T, o, d'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클레는 독일어로 죽음을 뜻하는 'Tod'를 언어의 형태 그대로 회화의 어휘로 사용했다. 또한 이 형상이 손으로 황금색 구슬을 든 모습에서도 같은 알파벳들을 만들어 조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른쪽 뒤편에 있는 추상화된 사람에게서도 각진 'D'를 염두에 둔다면 또다시 'T.O.D'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집트의 '사자의 서'를 떠올려보면 황금 구슬 혹은 횃불을 든 창백한 얼굴의 죽음의 신이 인간을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장면을 그려볼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예술가는 인간의 창조와 필연적 죽음이라는 슬픔을 자신의 동굴에 벽화와 같이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Angelus Novus (새로운 천사)>, 파울 클레, 1920

클레의 <앙겔루스 노부스>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벤야민은 일찍부터 클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20년 벤야민의 아내 도라(Dora)는 클레의 작품 한 점을 선물하는데 벤야민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기뻐했다. 1921년 클레의 전시회를 방문한 벤야민은 1920년에 그려진 <앙겔루스 노부스>를 1,000마르크에 구입했다. 


<클레의 Angelus Novus라는 그림은 마치 자신이 굳게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모습의 천사를 보여준다그의 눈은 응시하고입은 벌리고날개는 펼쳐져 있다이것이 역사의 천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그의 얼굴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우리가 일련의 사건을 인식하는 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잔해를 쌓고 그의 발 앞에 던지는 단 하나의 재앙을 본다천사는 머물러서 죽은 자를 깨우고부서진 것을 온전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낙원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다폭풍은 그의 날개에 너무나 격렬하게 걸려서 천사가 더 이상 날개를 감을 수 없다폭풍은 저항할 수 없이 그를 등을 돌린 미래로 밀어 넣고그의 앞에 쌓인 잔해 더미는 하늘로 치솟는다이 폭풍을 우리는 진보라고 부른다.>


벤야민은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이 천사의 그림에서 '역사적 진보'를 읽었다. 이제 미술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 특히 철학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투영할 해석의 객체를 제공하는 미디어로서의 가능성을 열었다. 아방가르드의 여러 예술가는 철학자들이 설명하는 글로 쓰인 철학보다 앞선 눈에 보이는 철학을 그려나갔다.


[콘스탄틴 브랑쿠시 (Constantin Brâncuși, 1876-1957)]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인 조각가 브랑쿠시는 오귀스트 로댕의 자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청동, 대리석, 나무, 석고 등의 재료를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인 'taille directe(직접 깎기)' 기법을 사용하여 추상적인 형태로 조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는 자신의 추상적 조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형태를 하나의 형태로 요약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마드무아젤 포가니 I, II>, 콘스탄틴 브랑쿠시 1912/20

브랑쿠시는 1910년 당시 파리에서 수학 중이던 헝가리 출신의 여류화가 마기트 포가니(Margit Pogany)를 만난다. 브랑쿠시가 보낸 편지에 따르면 둘은 연인 관계로 지내다가 오랜 시간의 우정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브랑쿠시는 1912년 흰색 대리석 조각으로 1920년에 다시 메탈로 포가니의 모습을 작품에 남긴다. 작품을 위해 포가니는 브랑쿠시 앞에 수차례 모델로 서야 했고, 훗날 포가니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Once I had to sit for my hands but the pose was quite different to that of the present bust, he only wanted to learn them by heart as he already knew my head by heart.”

(언젠가 나는 내 손을 위해 앉아야 했다하지만 포즈는 지금의 흉상과는 꽤 달랐다그는 단지 그가 마음으로 내 두상을 알았던 것과 같이 그것들을 알기를 원했다.)


브랑쿠시는 눈앞에 있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다른 추상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인식 과정, 즉 환원적 과정을 통해 대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표현만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피카소가 그랬듯 아프리카를 비롯한 원시의 예술적 표현에서 영감을 얻었다.

왼편: <하얀 흑인 여자>, 콘스탄틴 브랑쿠시, 1928; 오른편: <공간에서의 새>, 콘스탄틴 브랑쿠시, 1928

1928년 브랑쿠시는 인상적인 두 작품을 내놓는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하얀 흑인 여자>는 가장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특정 부류의 인물을 조각해 낸다. 흑인 여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브랑쿠시는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색상을 초월한 인지를 이끌어냈다. 브랑쿠시는 가장 단순한 형태 그 자체만으로 색과 구체적 묘사를 초월하는 지시관계를 형성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작품 <공간에서의 새>는 브랑쿠시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마치 새의 깃털 모양인 듯도 하고, 유선형의 날렵한 새의 몸통을 추상화한 듯한 형태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새의 움직임을 포착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브랑쿠시는 같은 시리즈의 작품을 1923년에서 1940에 걸쳐 대리석으로 7 작품, 청동 조각으로 9 작품 등으로 제작했다. 1926년 10월 이 작품은 브랑쿠시의 다른 19개의 작품과 함께 뉴욕 항구로 향했다. 이 작품들은 마르셀 뒤샹의 작품과 함께 뉴욕과 시카고에서 전시될 예정이었는데, 문제는 세관에서 발생했다. 당시 미국은 예술품의 국가 간 이동에는 세금이 책정되지 않지만, 공산품의 경우에는 달랐다. 문제는 이 작품들을 법적 기준에서 '예술품'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였다. 당시 세관 감정사 중 한 사람이 "만약 그것이 예술이라면 앞으로 저는 벽돌공이 될 겁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답은 판사의 손에 달려있었고 당시 판사 와이어트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현재 고려 중인 대상은 아름답고 윤곽이 대칭적이며이를 새와 연관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기에 즐겁고 매우 장식적입니다그리고 이것이 전문 조각가의 원래 제작물이며위에 언급한 당국에 따르면 실제로 조각품이자 예술 작품이라는 증거를 바탕으로 우리는 변론을 지지하고 무료입장이 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이 사건은 비구상적 추상이 예술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법적으로 인용한 최초의 법원 판결이다. 판결문과 같이 '아름답고', '대칭적이며', '보기에 즐겁고 장식적'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대상을 재현한 것이든 아니든 우리는 예술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왼편: <키스> 지옥의 문 일부, 오귀스트 로댕, 1882; 오른편: <키스>, 콘스탄틴 브랑쿠시, 1907-08

두 연인의 사랑의 절정을 그리는 <키스>라는 주제는 회화에서 못지않게 조각에서도 인기 있는 주제였다. 로댕은 <지옥의 문>의 일부에서 키스하는 연인의 모습을 격정적으로 담아냈다. 이러한 구상적 표현을 통한 '사랑'이라는 추상적 감정의 전달은 어떠한 포즈와 디테일의 섬세함을 발견하고 배치하는지가 핵심인 듯했다. 하지만 브랑쿠시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격정적 감정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포괄적인 함의를 담아냈다. 두 사람의 포옹과 키스는 두 신체의 가장 직접적인 만남을 의미한다. 가장 가까워지려는 둘의 끌림은 가장 많은 신체 면적의 합치를 바라게 만들고 눈과 눈, 입술과 입술, 가슴과 가슴의 마주침을 그리워한다. 브랑쿠시의 조각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은 '군더더기'이며 그것을 가능한 한 제거한 것이 추상으로의 길이다.


[피에트 몬드리안 (Pieter Cornelius Mondrian, 1872-1944)]

앞서 보았던 칸딘스키의 추상을 '따뜻한 추상'이라고 말한다면, 네덜란드 출신의 예술가 몬드리안의 추상은 '차가운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08년 고흐와 야수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는 1911년부터 조르주 브라크와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 활동을 하기도 한다. 1917년 '양식'을 뜻하는 잡지 <De Stijl>의 창간과 함께 네덜란드의 모더니즘 예술을 이끈 그는 1920년부터 신조형주의에 착안한 기하학적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데 스틸' 잡지와 예술운동을 함께 이끈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 1883-1931)는 몬드리안과 신조형주의라고 부르는 비구상적 형태의 미술을 시도했다. 그들은 '보편적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공식 어휘를 정립한다. 그것은 삼원색(primary colors)인 빨강, 노랑, 파랑과 두 가지 기본선인 수직과 수평이다. 몬드리안은 스스로 자신의 미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평면에 선과 색 조합을 구성하여최고의 인식으로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자연(또는 내가 보는 것)은 나에게 영감을 주고모든 화가와 마찬가지로 나를 감정 상태에 두어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만나는 진실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서 모든 것을 추상화하여 사물의 근본(여전히 외부 기초!)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나는 계산이 아닌 의식으로 구성된 수평 및 수직선을 통해높은 직관에 이끌리고조화와 리듬으로 이끌리면이러한 기본적인 아름다움의 형태가 필요하다면 다른 직접적인 선이나 곡선으로 보완되어,  진실만큼이나 강력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왼편: <윌로우 그로브: 빛과 그림자의 인상>, 1905; 가운데: <저녁: 붉은 나무>, 1908-10; 오른편: <회색 나무>, 피에트 몬드리안, 1911

몬드리안은 나무 연작을 통해 추상화에 도달하는 자신의 사고 과정을 보여준다. <윌로우 글로브: 빛과 그림자의 인상>은 인상주의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눈에 띄는 부분은 수직선과 수평선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제목에서처럼 추상화로 넘어가는 과정에 인상주의가 영향을 강하게 주었다. 인상주의는 사물에 대한 정밀한 재현의 의무감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고 몬드리안의 추상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게 해 주었다. <저녁: 붉은 나무>는 야수파의 영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단색과 평면적인 배경과 선적인 장식성이 강조된 나무는 마티스가 추구하던 새로운 미술의 단편이다. <회색 나무>에 이르러서는 나무의 형태가 기하학적으로 분해되고 정리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색채를 제거함으로써 형태적 단순성에 주목할 수 있다. 이러한 추상과정은 몬드리안이 스스로 밝히듯 '일반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이다. '일반적 아름다움'이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그것은 색과 형태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대상의 단순화 과정을 말한다.

왼편: <생강 단지가 있는 정물 II>, 1912; 오른편: <구성 XIV>, 피에트 몬드리안, 1913

<생강 냄비가 있는 정물 II>은 입체파적 구성이 언뜻 비친다. 하지만 <구성 XIX>으로의 이행을 본다면 입체파에 남아있는 구상적 사물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볼 수 있다. 몬드리안은 정물을 구성하는 여러 객채와 배경을 수평, 수직, 대각선의 단순 선으로 환원시키고 중앙에 위치한 옥색의 단지가 그림의 다른 부분보다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몬드리안은 객채가 가지고 있는 위계를 점점 무너뜨리려 했고, 점차적으로 위계의 완전한 와해로 나아간다.

왼편: <색칠된 부분이 있는 타원의 구성 I>, 1914; 오른편: <선이 있는 구성>, 피에트 몬드리안, 1917

몬드리안은 환원환 형태를 수직, 수평의 요소로 정리하고 다양한 색채를 소위 삼원색이라 불리는 빨강, 파랑, 노랑으로 환원시킨다. <선이 있는 구성>에서 예술가는 사물에 대한 추상이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줄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흩어지고 분절된 선들의 향연은 구상적 회화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선언한다.

<빨강, 노랑, 파랑, 검정의 구성>, 피에트 몬드리안, 1921

"순수 추상 예술은 자연주의적 외관에서 벗어나 완전히 해방된다그것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조화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를 만든다동등한 관계의 실현은 삶에 가장 중요하다"


몬드리안을 상징하는 작품 <빨강, 노랑, 파랑, 검정의 구성>은 나무에서 시작한 구상에서의 탈출 과정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제 화면에서 지배적인 형태와 색채는 의미를 상실했다. 수평선과 수직선, 빨강, 파랑, 노랑, 검정의 요소 사이에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의 구분은 없다. 미술이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을 위한' 역할을 해오다가 이제 '스스로를 위한'(l'art pour l'art), 다시 말해 재현의 대상에 대한 종속관계가 끊어진 단계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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