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 미술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고전 모더니즘을 이끈 중요한 예술가로 알려진 마티스는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1880-1954)과 함께 인상주의를 벗어나 20세기 최초의 예술 운동인 야수파(Fauvism)의 선구자이다. 그는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목욕하는 세 사람>을 구입할 정도로 세잔에게서 새로운 미술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카미유 피사로의 조언에 따라 윌리엄 터너를 연구하기 위해 런던 여행 감행하기도 했다. 1905년 살롱에 전시한 그의 작품에 비평가들은 르네상스 스타일의 조각과 비교하여 '야생 동물'과 같다는 조롱 섞인 비평을 했고, 이것이 그를 "야수파"로 불리게 했다.
야수파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작품은 <모자를 쓴 여인>이다. 기존의 초상화의 틀을 깬 이 작품은 독일의 표현주의에서도 발견되는 비현실적 색채의 이용이 눈에 띈다. 또한 세잔이 발견한 평면적 색면의 사용을 통한 기존 회화의 틀을 깨는 시도가 마티스에게서도 발견된다. 마티스는 인상주의자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인상파의 그림은 모순된 인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을 원하고,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형태를 단순화하여 내부 균형을 이루고 싶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 여전히 남아있는 원근법과 입체감에 대해 마티스는 새로운 미술로의 탄생에 그것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혼란스러운 19세기말의 유럽을 살던 마티스는 고갱이 지적하는 문명의 폭력과 야만성에 대한 지적에 공감했다. 원시적 삶에서 마티스는 생명력과 집단적 화합을 발견했고, <춤>에서는 그의 희망적 인류애가 드러난다.
<이것은 진정한 원시적이며 진정한 민속 예술입니다. 이것이 예술 탐구의 근원입니다. 오늘날의 예술가는 바로 이곳, 원시 예술의 대상에서 영감을 얻어야 합니다.>
1911년 10월 27일 신문 인터뷰에서 마티스는 예술 탐구의 근원을 원시 예술에서 발견하고자 함을 밝힌다. 그리고 문명에 지쳐버린 인류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긴다.
<균형 잡힌 때 없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이에게 휴식 같은 그림을…>
마티스에게 영향을 준 또 하나의 문명은 일본이다. 일본 판화는 서구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고, 미술, 조각, 건축, 장식 등에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다. 마티스 회화의 평면성은 세잔과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탄생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이전 회화에서 부정되던 결과물을 탄생시켰다.
일명 '붉은 방'이라 불리는 <디저트: 붉은색의 조화>는 원래 의뢰인의 요구로 '녹색의 조화'로 계획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완성한 후 만족하지 못한 화가는 붉은색을 위에 덧칠했고, 그 결과에 만족했다. 의뢰인 역시 붉은색의 강렬함이 마음에 들었고, <춤>의 두 번째 버전을 의뢰했다. 마티스가 붉게 칠한 내부 공간은 평면적이다. 명암과 원근법이 거의 사라진 공간은 색채 그 자체가 주는 강렬함과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선의 운동성만이 느껴진다. 푸른색의 아라베스크 문양은 붉은 방에서 그 역동성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창 밖의 녹색 자연은 붉은색의 채도를 더욱 밝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준다. 1951년 마티스는 어린 시절 미술 교육을 받던 순간을 기억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술학교 선생님들은 '자연에 충실하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내 경력 전반에 걸쳐 나는 복종할 수 없는 이러한 태도에 반항해 왔습니다. 이 대결은 자연스러운 모방을 넘어 표현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했던 나의 길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어 그러한 전환은 점묘법과 야수주의였습니다.”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이다. 코코슈카는 대표적인 팜므파탈 '알마 말러(Alma Mahler, 1879-1964)'와의 사랑으로 인생과 예술에 큰 변화를 겪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부인이었던 알마는 1911년 말러가 죽은 해 코코슈카와 친분을 쌓게 된다. 1912년부터 둘은 연인으로 발전해 함께 지내게 된다. 그녀에 대한 강렬한 소유욕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성취되지 못한 사랑에 아파하며 <바람의 신부(폭풍)>를 그리게 된다.
그림에서 코코슈카와 알마는 나란히 누운 채 거센 비바람과 밤하늘 아래에서 함께 하고 있다. 알마는 곤히 잠들어있고 코코슈카는 그녀를 놓칠세라 근심에 쌓여 있는 듯하다. 두 손을 불안감에 꼭 붙잡고 생각에 잠겨있는 코코슈카는 거칠고 어두운 색채로 표현되어 있고, 편안히 잠든 알마는 부드럽고 밝은 빛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마음의 불일치는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다. 뭉크와 같이 코코슈카의 일상은 폭풍우와 같은 긴장감이 넘치는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코코슈카는 이 작품을 자신의 내면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은 느리게 하지만 성공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형형색색의 빛과 물의 탑, 산과 번개와 달이 반짝이는 반원의 가장자리에서 우리 둘은 끝없는 고요함으로 바다를 껴안고 있다.>
코코슈카는 1909년 단독 공연되는 최초의 표현주의 드라마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의 포스터를 제작했다. 코코슈카는 1917년 이 작품의 대본 수정 작업도 맡았는데 성별 관계에 대한 생각을 남성과 여성 간의 싸움으로 표현했다. 작품에는 남자가 속해있는 전사의 무리와 여성이 속한 소녀무리가 등장한다. 여자의 탑으로 향하는 전사들과 소녀들을 서로에 대해 정복자와 위험한 동물이라고 비유한다. 여자는 남자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음을 느끼고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의미인 낙인을 찍기를 명령한다. 이에 여자는 남자를 찌르고 전사들은 남자를 모르는 이라고 부정하고 소녀들과 함께 남자를 탑에 가둔다. 남자가 탑에서 서서히 회복하자 여자는 힘을 잃는다. 여자는 남자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남자는 한 번의 손짓으로 여자를 죽인다. 포스터의 양쪽 윗부분에는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고, 약해진 남성을 마녀와 같이 그려진 여성이 억압하고 있다. 두 이성 사이의 관계는 한쪽이 약해지면 다른 한쪽은 강해지고, 약해진 상대를 원하지만, 상대가 강해지면 두려워진다. 이러한 이성적 관계의 폭력성은 코코슈카에게는 민감한 주제였다. 직접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관계 상의 우위에 따라 우울증과 정신 질환까지 겪었던 화가에게 1915년 알마와의 관계가 끝난 후 우울한 자신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꿈틀거리는 불안함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20세기 초반 새로운 미술을 향한 움직임은 독일의 뮌헨에서도 일어난다. 뮌헨의 젊은 예술가들은 1909년 '뮌헨 신예술가 협회(NKVM, Neue Künstler-Vereinigung München)'를 결성한다. 1911년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1916)는 협회가 정해놓은 그림의 크기에 맞지 않는 작품에 제출했다는 이유로 출품을 거부당하게 된다.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는 협회의 경직된 규칙에 불만을 가진 그는 친구 칸딘스키와 함께 협회를 탈퇴하고 '청기사파'를 만든다. 둘 모두 말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붙여진 별칭이지만 이 그룹은 결속력이나 구속력이 강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트 마케, 알프레드 쿠빈,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 파울 클레, 아놀트 쇤베르크 등의 예술가들이 이들과 한시적으로 함께 했었다. 그들의 목표는 "예술 형식 간의 동등한 권리 달성"이었고, 그것은 "다양성의 내적 공통성을 보여주기 위해" 시도되었다.
마르크는 기존 회화가 사용하던 색채에 전혀 얽매이지 않았다. 마르크가 사용하는 색채는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규정에 의해 사용된다. 마르크가 아우구스트 마케에게 1910년 12월 12일에 보낸 편지에 자세한 설명이 되어있다.
<파란색은 남성적 원칙, 엄격함, 정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노란색은 여성적 원리이며 부드럽고 쾌활하며 관능적입니다. 빨간색은 물질이고, 잔인하고 무겁고, 항상 다른 두 편이 싸워 극복해야 하는 색입니다! 섞을 것이냐? 예를 들어, 진지하고 영적인 파란색과 빨간색을 섞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픔이 더해질 정도로 파란색이 증가하고, 보라색의 보색인 조화로운 노란색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됩니다. [...] 빨간색과 노란색을 혼합하여 주황색을 만들면 수동적이고 여성적인 노란색에 거대하고 감각적인 힘을 부여하여 시원하고 영적인 파란색이 필수 불가결한 파란색이 되고 남성과 파란색이 즉시 자동으로 주황색의 다음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색상은 서로 사랑합니다. 파란색과 주황색, 매우 축제와 같은 소리입니다. 하지만 이제 파란색과 노란색을 섞어서 녹색을 만든다면 물질이자 지구인 빨간색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특징인 '창조주로서의 예술가'의 조건은 스스로 자신의 작품 속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터너와 세잔, 인상주의자, 고흐, 고갱 등이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던 관점에서 나아간 성취이다.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청기사파 활동을 한 대표적 화가 칸딘스키는 화가일 뿐 아니라 이론가로서도 활동했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교사를 맡아서 새로운 미술을 향하는 후학 양성과 이론적 완결성에도 힘썼다. 표현주의로 시작한 그는 추상 미술의 선구자로 이름을 남겼다. 마르크와 같이 칸딘스키도 자신만의 색채에 대한 규칙이 있다. 파란색은 차가움, 하늘, 초자연적, 무한함과 고요함, 동심원을 뜻하고, 노란색은 따뜻함, 흙빛, 거슬리는 것, 공격성, 기이함을 뜻한다. 검은색은 어두움을, 흰색은 밝음을 뜻한다. 칸딘스키는 다양한 감각적 인상을 병합하는 공감각(synaesthesia)적 표현을 회화에서 시도했다. 특히 음악과 미술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는 칸딘스키라는 화가의 이름을 남기는 가장 큰 업적이다. 그는 "즉흥 연주(improvisation)"가 내면의 본성이 드러나는 무의식적이고 갑작스러운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외부 자연의 "인상"을 의식적 작용에 의한 정교화 과정인 "구성"을 통해 "색상 소리"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색상 교향곡"의 창작 방법이다.
1926년에 출간된 <점과 선에서 면으로>에서 칸딘스키는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제시한다.
<점은 원초적인 요소, 즉 빈 표면을 비옥하게 하는 것이다. 수평은 차갑고 지지하는 기반이며 조용하고 ‘검은색’이다. 수직은 활동적이고 따뜻하며 ‘흰색’이다. 자유로운 직선은 ‘파란색‘ 과 ‘노란색‘ 으로 움직일 수 있다. 면 자체는 아래쪽은 무겁고, 위쪽은 가볍고, 왼쪽은 ‘먼 거리’처럼, 오른쪽은 ‘집’처럼‘.>
<사인>에서 이 원칙들은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구성된다. <구성 VIII>은 칸딘스키의 음악적 회화로 가장 유명하다. 형태는 피아노 건반을, 밝은 노란색은 높은 트럼펫 톤을, 하늘색은 플루트를, 진한 파란색은 첼로를, 더 진한 파란색은 더블베이스 음색을, 깊고 엄숙한 파란색은 오르간 소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약속에 의해 구성된 회화는 악보에 약속된 기호로 쓰인 음악의 연주와 다르지 않다. 2008년 렌바흐에서 열린 전시 리뷰에서 미술사학자 미하엘 슈티츠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그림의 음악적 가치는 작품을 볼 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칸딘스키는 색깔을 들었다. ‘구성 VIII’과 같은 제목은 당혹감을 나타내는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정신’을 그리려는 칸딘스키의 노력을 나타낸다. 물체는 거의 필연적으로 해체되어야 했고 그 길은 추상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암울한 유럽, 특히 독일 사회에 그의 시도는 종말론적 사태 속에서의 희망을 선포하는 교향곡과 같았다. 밝고 경쾌하며 리드미컬한 칸딘스키의 미술 언어는 혼란스러운 현실에서도 규칙과 템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희망을 응원했다. 칸딘스키의 초기 미술에도 추상화의 요소들이 보인다.
칸딘스키는 서구의 영향을 받은 과학과 이성의 눈으로 자신의 고향 러시아를 바라보기를 거부했다. 아직 근대성에 훼손되지 않은 러시아의 고유한 성질에 주목했다. 1889년 법학도 시절 전통적인 법률 시스템을 연구하기 위해 우랄 산맥을 여행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린다. 당시 머물며 경험한 목가적 자연과 전통적인 복장의 사람들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다채로운 살아있는 그림처럼' 보였다. 키스하는 부부, 십자가를 든 신부,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 술래잡기하는 연인 등 구상적 요소가 그림 전면에 위치하는 반면, 강가에 있는 사람들은 점과 같이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뒤편에 펼쳐진 자연에 대한 묘사 역시 간단한 색채면을 통한 추상화된 표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해에 그려진 <두 소녀>는 수채화로 그려진 단순화된 패턴의 의상과 단일 색면의 사용을 통한 명암의 부재가 눈에 띈다.
칸딘스키의 추상으로의 이행은 구성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과 스터디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구상 VII의 스터디를 보면 남성의 얼굴, 토네이도, 원형 탑, 모래시계 등의 구상적 형상이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도적인 기하학 테두리와 불규칙한 선형의 구불거림은 <구성 VII>에서는 색면으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하학적 형태는 게슈탈트 원리처럼 어떠한 구상적 형태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기존의 회화들과 비교한다면 정확한 구상적 확신이 제거되었음은 물론이고, 원근법, 명암 등의 고전적 회화 원리는 분명히 극복되었다. 칸딘스키의 <구성 VIII>은 기존 회화의 틀을 벗어난 데에 그치지 않고, 기하학적 구성과 색면의 배치만을 통해 리듬감과 운율, 시각적 아름다움까지 동시에 실현했기 때문에 추상회화로서의 온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표현주의의 낭만적이고 자기 연민적 표현에 불만을 사진 예술가들은 "보이는 세계로의 복귀"를 이야기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냉정하고 잔인하게 보여주었고, 사실, 사물을 뜻하는 독일어 Sache를 이용하여 새로운 사실적 표현을 시도했다. 그들은 주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에 발생한 사태들을 주요 주제로 삼았다. 자본주의적 대량 생산의 효율성과 안정성, 개성과 편안함에 대한 사고가 인물에 드러나는 이인법(Depersonalisierung)을 사용했다. 이인법은 단순화된 인물의 기하학적 표현과 기계적으로 변형된 신체를 그리는 기법이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부정적이고 날카로운 회화적 표현으로 드러나는데 대표 작가인 게오그르 그로스(George Grosz, 1893-1959)는 자신의 작품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 그림은 내 절망, 증오, 환멸을 표현했습니다. 술 취한 사람, 구토하는 사람, 주먹을 꽉 쥐고 달을 저주하는 사람을 그렸습니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손에서 피를 씻는 남자를 그렸습니다.... 텅 빈 거리를 미친 듯이 도망치는 외로운 작은 남자들을 그렸습니다. 임대 주택의 횡단면을 그렸습니다. 한 창문을 통해 아내를 공격하는 남자가 보였고, 다른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세 번째 창문에는 파리가 떼 지어 다니는 자살자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코가 없는 군인, 갑각류와 같은 강철 팔을 가진 전쟁 불구자, 말 담요로 만든 조끼에 난폭한 보병을 집어넣는 두 명의 의료 군인을 그렸습니다. 군 복무를 위해 시험을 보는 신병 복장을 한 해골을 그렸습니다. 또한 시를 썼습니다. “
<일식>에서는 정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테이블이 보인다. 십자훈장과 월계관을 쓴 1차 세계대전의 총사령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는 목이 없는 대신들 앞에 피로 물든 칼을 내세워 자신의 정책을 강요한다. 힌덴부르크의 귀에 속삭이는 이는 손이 무기를 쥔 무기상인들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지속시키려 한다. 차안대를 한 당나귀는 빈 여물통으로 다가가고 그 끝은 죽은 해골이 의미하는 죽음이 있다. 이는 맹목적으로 명령을 따르는 군인과 시민을 의미한다. 화면 왼쪽 위의 붉은 일식의 표면으로 은은하게 달러 표시가 드러난다. 밝은 태양 빛을 가린 광기 어린 달은 전쟁과 혼란을 불러오고, 그 내면에 숨겨진 것은 돈에 대한 야욕이라는 메타퍼다.
오토 딕스(1891-1969)의 <스카트하는 사람들>은 대표적인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작품이다. 신즉물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하는 미술의 흐름으로 현실에 대한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던 표현주의(Expressionismus)와 달리 현실을 있는 적나라하게 그린다. 현실의 이러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딕스의 작품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모습을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다.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지속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은 엄청난 수의 상이용사가 발생했다. 150만 명의 군인들이 신체 손상을 입었고 그 가운데 80만에 가까운 수의 병사가 신체의 일부를 상실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사회에 유용한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어졌다.
스카트는 독일에서 당시 유행하던 카드게임의 이름이다. 왼편의 사람은 오른쪽 얼굴에 큰 부상을 입고 오른팔이 없어서 오른발로 카드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오른편의 사람은 아래턱이 대체되어 있고 오른팔 부분은 나무 혹은 금속 물질로 만든 기계팔로 끼워져 있다. 그의 왼손은 화상을 입은 듯 붉게 부풀이 있고 코는 떨어져 나가 안대와 같이 생긴 것으로 가려져있다. 뒤편의 사람은 양다리가 테이블 다리와 같은 것으로 끼워져 있고 팔이 없어 입으로 카드를 물고 게임을 하고 있다. 화가는 이 상이용사들의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우리 앞에 드러낸다. 이 무관심함은 비정한 현실에서 자신의 내면만을 관조하며 침잠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자들보다 친절하다. 그들을 사회의 바깥으로 숨겨, 없는 듯한 존재로 만들지 않고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자들이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의 장애를 지닌 자들이다.
프리랜서 화가이자 박물관 큐레이터의 아들로 태어나 7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그림 실력을 인정받은 피카소는 14세에 카탈루냐 왕립 아카데미 '라 로차'에 단번에 입학한다. 16세에는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교수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학교를 떠나 프라도 미술관과 살롱을 방문했다. 1900년 절친 카사게마스와 파리를 여행하며 세잔, 드가, 보나르, 로트렉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01년 마드리드로 돌아온 피카소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친구 카사게마스가 댄서 가르갈로와의 사랑에 실패하자 스스로에게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마드리드에서 예술 잡지의 발간을 시도했으나 재정적 문제로 폐간해야 했고, 피카소는 파리를 재방문한다. 절친의 상실과 경제적 문제는 그의 작품에서 우울한 분위기로 나타나는데, 청색이 주를 이루는 1901년에서 1904년 사이를 '청색시대'라고 일컫는다.
<La vie>, 즉 인생이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남성의 얼굴은 원래 피카소 자신의 모습이었으나, 이후 카사게마스의 얼굴로 바꾸었다. 22세의 피카소에게 있어서 이 시기에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던 유일한 사람이 어머니였고, 자신이 위안을 받던 것은 매음굴이었다. 카사게마스는 피카소와 함께 매음굴을 자주 다녔는데, 발기불능으로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한다. 로트렉과 마찬가지로 피카소 역시 이 시기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다. 그림의 가운데 아랫부분에 주저앉은 여인의 모습은 고흐가 남긴 <슬픔>에 대한 오마주다. 우울증에 시달린 고흐에 대한 피카소의 오마주이자 우울 속에서 창조적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위안일 수 있다. 화면 속 남성의 손짓은 어머니의 접근을 막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모티브는 예수가 부활하자 처음 그를 발견한 막달레나 마리아가 그에게 손을 뻗으려는 것을 막으며 했던 요한복음 20장 17절의 "나를 만지지 말라(noli me tangere)"는 구절을 시사한다. 어머니로부터 태어났고 보호를 받았으나, 그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복합적 감정을 예술가로서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연관시켰다. 예술가는 이전 시대의 예술가들에 대한 학습과 유산으로 시작되지만 그들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만의 예술을 찾아가야 하는 창조적 고뇌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이다.
또 다른 청색시대의 작품으로 <늙은 기타리스트>가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늙은 기타리스트의 힘없이 늘어진 신체와 창백한 피부와 청색의 톤은 나이 든 예술가의 삶의 마지막 여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연주하는 기타는 생명의 색채를 띠고 있다. 나이 든 예술가에게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증명해 주는 것은 그의 예술뿐임을 자각하는 것은 힘든 시기의 피카소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안일지 모른다. 이 작품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되는 작품은 조지 프레드릭 왓츠의 <희망>이다. 맹인 여인이 행성에 홀로 기력 없이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그녀에게 음악은 끝도 없는 공허의 시간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피카소는 초상화에서도 혁신적 변화를 이끌어 낸다. 비평가 조나단 존스는 <거트루드 슈타인의 초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르네상스 이래로 여성 묘사는 아름다움의 이상과 제한된 사회적 역할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피카소의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는 이 모든 것을 뒤집습니다. 스타인은 서양 미술이 이전에 여성을 가둬두었던 제한적인 범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녀는 늙지도 젊지도 않고, 성적이지도 복종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녀의 돌 같은 얼굴은 그녀를 지상에서 새로운 무언가로 만듭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배합니다.>
슈타인의 얼굴은 유난히 각지고 딱딱하게 그려졌다. 마치 아프리카나 고대 스페인의 조각된 가면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시도는 입체파(큐비즘)로 이어지는 단계적 변화의 단계로 보인다. 슈타인은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 만족하는 평가를 내렸다.
<나는 내 초상화에 만족했고 지금도 만족합니다. 나에게 그것은 나이고,
그것은 항상 나인 나의 유일한 재현물입니다. 나에게 있어서요.>
피카소의 입체파는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시작되었다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바르셀로나의 매음굴의 여성들을 모델로 그렸으나 일부 얼굴은 스페인 가면과 아프리카 가면의 특징을 보인다. 여성들의 신체는 조각난 듯 분리되어 있고, 작품 어느 곳에서도 원근법과 명암 기법은 발견되지 않는다. 피카소는 원시주의가 "매혹적이고 심지어 야만적인 힘을 통해 독창적 예술적 양식을 해방"하도록 이끌었다고 했다.
피카소는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는데 이전 예술가들의 공로를 이어받고, 조합한다. 고갱의 원시 여성에 대한 묘사는 <아비뇽의 처녀들>의 여성의 두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투박하고 원초적인 힘을 가능하게 했다. 세잔에게서는 색면을 통한 구성과 원근법, 명암의 제거, 그리고 인체의 비례의 왜곡을 가져왔다. 또한 엘 그레코에게서는 격정적 분위기와 늘어진 신체를 통한 인물들의 배치를 가져왔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완성되기 2년 전 피카소는 <누드>를 통해 이러한 인물들의 자세와 배치를 연구했다.
피카소는 마티스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1906년 당시 마티스는 현대 회와의 새로운 운동을 이끌었다는 '악명'과 탁월함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완성되자 당시 회화계는 충격에 휩싸였고, 피카소는 논란의 중심에 떠올랐다. 피카소의 작품은 마티스가 받던 전통에 대한 공격이라는 타이틀을 모조리 앗아갔다. 마티스의 <삶의 행복>은 당시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시냑으로부터 극렬한 비난을 받는다.
<지금까지 내가 좋아했던 마티스의 시도는 개에게로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2.5미터의 캔버스 위에 엄지손가락만큼 두꺼운 선으로 이상한 캐릭터들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것을 평평하고 잘 정의된 색조로 덮었는데, 그것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역겹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경쟁자 피카소에게 충격을 주고 <아비뇽의 처녀들>의 작업에 동기를 부여했다. 그림의 가운데에는 마티스 자신의 <춤>을 삽입하여 원시성과 문명에 대한 해방감을 강조한다.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나체 상태로 자연에서의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다채로운 색채와 자유로운 포즈는 기존의 회화에 얽매이지 않는 마티스의 또 다른 시도였다.
피카소는 사물의 본질을 그리는데 하나의 관점으로는 구현하기 힘들다는 것에 착안해 추상으로의 진전을 선언한다. 그는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는 단순화 과정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해 나갔다. 피카소는 스스로 자신에게 한 번의 붓질만 허락해도 모든 사물을 그려낼 수 있다고 말했다. 개를 그린 피카소의 크로키는 한붓그리기를 통해 누구나가 연상할 수 있는 형태의 씨앗을 제공한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관찰자의 상상력의 씨앗을 제공하고 관찰자는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을 통해 그것을 완성한다. 이것이 추상의 제작과 감상의 과정이다.
피카소는 이제 완전히 입체파의 길로 들어선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남아있던 구상적 외곽선조차 이제 분절되고, 조각나고, 위치가 바뀌는 등의 가공과정을 겪는다. <만돌린을 든 소녀>에서 소녀의 표정과 감정을 드러나지 않는다. 정확한 신체를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의 <아비뇽의 처녀들>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아봐 준 미술 수집가 칸바일러의 초상은 신체의 윤곽조차 가늠할 수 없다. 거트루드 슈타인의 초상에서 시작된 피카소의 탐구는 전통 초상화를 전면적으로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피카소는 플라톤이 비판하는 회화의 한계, 즉 하나의 관점이 사물 전체를 표상할 수 없음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차원 화면에 여러 관점을 동시에 그려내는 입체적 시각을 '구축'하여 천 개의 눈으로 관찰한 대상을 재조합하는 방식이다.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실험한 예술가는 이제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1937년 스페인은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유린된다. 내전 상태에 빠진 스페인은 동서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그 와중에 프랑코는 독일의 나치에게 스페인 동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폭격을 요청한다.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던 나치에게는 무기를 시험할 좋은 기회였고 게르니카는 화염에 휩싸이며 주민의 1/3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게 된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참상을 고발하고, 이러한 전쟁의 원흉을 한 인물이 아닌 상징적 동물을 통해 드러낸다.
<... 이 황소는 황소이고 이 말은 말이에요... 내 그림 속의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매우 사실일 수 있지만, 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닙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와 결론은 나도 얻었지만,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얻은 것입니다. 나는 그림을 그림으로 만듭니다. 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립니다.>
피카소는 대상을 그려 완성된 생각을 전달하지 않는다. 본능적, 무의식적 연관을 통해 대상의 상징성을 그려내지만 모든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문법은 아닐지도 모른다. 스페인의 투우 문화에서 자란 피카소에게 황소는 광기와 본능, 폭력성의 상징이고 인간은 그것의 통제를 통해 평화를 구축한다. 하지만 황소에 짓밟힌 어머니와 아이는 무기력하게 눈물을 흘릴 뿐이다. 루폴드 아른하임은 다음과 같이 이 장면을 해석한다.
<여성과 어린이는 게르니카를 무고하고 무방비 상태의 희생자인 인간의 이미지로 만든다. 또한 여성과 어린이는 피카소에 의해 종종 인류의 완벽함으로 표현되었다. 피카소의 관점에서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공격은 인류의 핵심을 겨냥한 것이다.>
피카소의 미술 언어가 모든 이들에게 분명히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는 인류의 평화와 약자의 인권에 대한 보편적 메시지를 그 속에 담았다.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고야가 프랑스 점령군이 스페인 반군을 학살하는 것을 비판한 그림의 구도를 참고한 것으로 보아 피카소가 한국전쟁, 즉 6.25를 주제로 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피카소가 미군의 개입을 비판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남침을 승인했던 스탈린과 북한을 대규모로 지원한 마오쩌뚱을 혐오한 걸로 보아 전쟁 자체가 일으키는 학살 자체를 주제로 삼았음은 틀림이 없다. 피카소는 전쟁을 통해 발생하는 폭력과 인권 유린에 반대한 정치적 태도를 분명히 하는 예술가였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사상적 견해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고, 그것이 현실을 딛고 존재하는 예술가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난 입체적 시각에서는 분명한 인류의 적은 존재한다. 그것은 폭력과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