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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27장 -4

실험적 미술 -20세기 초

by Homo ludens

[미래파 (Futurism, 1909-1920년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기존 예술의 틀을 깨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등으로 이어지는 구상으로부터의 해방은 전문가들과 예술애호가들에게 서서히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제 예술가들은 또 다른 시도를 위한 투쟁의 대상을 찾아야 했고, 일부 예술가들은 근대 문명의 산업적 산물에서 그 단초를 찾았다. 새로운 시대는 기계문명과 대도시의 발전이 주도했고 이탈리에서 시작된 미래파(Futurism) 예술가들은 두 요소의 특징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도시의 풍경을 그려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Antonio Sant'Elia, 1888-1916)와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 (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와 같은 1909년 2월 20일 미래주의 선언문을 파리에서 공개하며 파괴와 폭력을 통해 사회의 혁명적 전환을 꿈꿨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쟁을 옹호하는 등 자기 파괴적 마조히즘을 통해서만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 내면의 폭력성, 잔인함, 불의, 무자비함, 도덕적 자유, 목적 없음 만이 부조리를 만들어낸 이전 세대의 가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리네티가 미래파 선언문 (Manifesto)에서 보여주듯 기계미학은 고대의 미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로 등장했다.


<폭발적인 숨결을 지닌 뱀을 닮은 커다란 파이프로 차체를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 총알 위를 달리는 듯한 울부짖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나이키보다 더 아름답다... 우리는 일과 쾌락과 소란으로 들뜬 군중의 찬양을 노래할 것이다. 우리는 현대 수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색깔, 다양한 목소리의 혁명의 홍수에 대해 노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밝은 전기 달이 밝히는 무기고와 조선소의 밤의 생동감 넘치는 빛을 노래할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뱀을 소비하는 탐욕스러운 기차역; 나선형의 덩굴손 연기와 함께 구름 속에 매달려 있는 공장들; 거대한 운동선수처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햇빛 아래 칼처럼 번쩍인다. 지평선의 향기를 맡는 모험을 추구하는 증기선; 파이프를 단 거대한 강철마처럼 철로를 따라 쿵쾅거리며 달리는 가슴이 넓은 기관차, 바람에 깃발처럼 프로펠러가 덜거덕거리고 열광적인 군중처럼 박수를 보내는 비행기의 활공 비행.>

왼편: <미래파 건축>, 안토니오 산텔리아, 1914; 오른편: <메트로폴리스>, 프리츠 랑, 1927

안토니오 산텔리아는 근대 문명의 결실인 자동차와 초고층 건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20세기 초반 과밀화된 도시가 가진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과학기술과 문명은 인류의 죄악이 아닌 인류를 구원해 줄 유일한 도구이며, 이것을 위해 미래파 예술가들은 니체가 제시하는 새로운 덕목을 받아들인다. 니체는 이기심, 지배욕, 성욕을 새로운 덕목으로 제시하여 아폴론적 가치, 즉 인간의 이성적 측면만을 강조해 온 비대칭적 도덕에 반대하여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그와 동등하게 평가했다. 이는 인간이 가진 이성적 측면과 비이성적 측면의 균형과 견제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확립해 나갈 수 있다는 철학으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발견과 관계가 깊다. 프로이트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초자아(Superego)에 의해 억압된 원초아(id)의 해방을 통해 자아(ego)는 욕망을 충족시킬 새로운 창조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다. 욕망 없는 자아는 초자아에 억눌려 의지를 상실하게 되고, 욕망만 쫓는 자아는 절제 없는 쾌락에 빠져들게 된다. 미래파 예술가들은 이전 세대의 예술가들이 절대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할 용기가 있었고, 과격해 보이는 그들의 시도는 대도시의 새로운 모습을 구상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은 미래파 예술가들이 꿈꿨던 도시를 그려내기도 했다.

왼편: <공간에서 연속성의 독특한 형태>, 움베르토 보치오니, 1913; 오른편: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No.2>, 마르셀 뒤샹, 1912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1882-1916)는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 1859-1941)의 <물질과 기억(1896)>을 읽고 '내부, 외부, 기억, 감각의 동시성'을 통합하는 예술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입체파의 분절된 평면과 미래파의 속도감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외부와 내부의 필연적 구분, 감각의 철저한 분절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보치오니는 <공간에서 연속성의 독특한 형태>에서 달리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시공간의 상호연관성을 기발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하나의 공간에 대응하는 찰나의 시간에 좌표와 같이 존재한다. 시간의 축이 이동하며 그에 상응하는 공간적 변화를 관찰하게 된다. 하지만 찰나가 아닌 일정 시간의 지속동안의 공간적 대응을 동시에 표현하면 마치 공간 속에서 흐르는 신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때 너무 빠른 속도의 신체는 흐려져서 거의 보이지 않게 될 것이고, 느린 속도의 신체는 상대적으로 선명한 형태를 띨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공간 속에서 물체의 밀도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접근은 보다 직관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보여준다. 마치 잔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한 신체의 연속적 표현은 영화의 프레임과 같이 순간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것과 같다. 뒤샹은 신체의 정확한 묘사보다 추상화된 기하학의 서로 다른 정적인 포즈를 통해 '운동성'을 표현하는데 무게를 두었다. 뒤샹은 이를 "움직임이라는 개념의 시각적 인상"을 재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초현실주의 (Surrealism, 1920년대 - 1950년대)]

프로이트와 니체의 영향으로 새로운 미술의 방향을 이끈 미술사조로 '초현실주의'를 꼽을 수 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무의식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비논리적이거나 꿈과 같은 장면을 주로 그렸다. 초현실주의를 이끈 앙드레 브르통(André Robert Breton, 1896-1966)은 "이전에 모순되었던 꿈과 현실의 조건을 절대적 현실, 혹은 초현실로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놀라움, 예상치 못한 대조와 비논리적 요소를 특징으로 사용했고, 특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작품을 통해 관람자가 철학적 사유를 하게 만드는 "순수한 정신적 자동성"을 이야기했다. 따라서 작품은 부차적일 뿐이고 작가와 관람자 사이의 의도와 해석이라는 관계가 중요하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시인이자 비평가, 작가, 미술 이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이다.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그는 창조적 행위가 이론이 아닌 상상과 직관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폴리네르는 창조행위가 "자신을 중독시킬 염려 없이 마실 수 있는 순수한 원천"인 삶과 자연에 가까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입체파, 미래파, 다다이즘 등의 아방가르드 운동에 관심을 갖던 그는 독특한 시를 창조한다.

왼편: <에펠탑의 칼리그램>, 기욤 아폴리네르, 1918; 오른편: <Il pleut(비)>, 기욤 아폴리네르, 1918

아폴리네르의 시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직관적 이미지를 형식적으로 재현한다. <에펠탑의 칼리그람>은 다음의 내용이 에펠탑의 모양으로 드러나도록 쓰였다.


<Salut monde dont je suis la langue éloquente que sa bouche O Paris tire et tirera toujours aux allemands>

(안녕 세상아, 나는 파리에서 독일을 향해 영원히 내미는 유창한 혀이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은 영국에 이은 산업화의 경쟁 국가였다. 엄청난 규모의 철골구조를 만들어낸 프랑스의 기술 문명의 우위를 위트 있게 표현했다. <Il pleut(비)>에서 아폴리네르는 내리는 비의 형상 그대로 시를 써나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억 속에서 죽은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내린다. 역시 또한 너다. 물방울아, 내 인생의 멋진 만남! 청각의 도시로 이루어진 온 세계에 울려 퍼지는 격분한 구름. 비가 오면 후회하고 경멸하며 옛 음악을 울려라. 위와 아래를 잇는 선의 몰락을 들어라!>


빗소리가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은 대도시의 포장도로에 떨어지는 소리로 인해 더욱 선명해진다. 비는 과거의 언젠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땅을 이어왔다. 아폴리네르는 비의 청각적, 시각적 특징을 이용하여 과거와 현재, 하늘과 땅, 삶과 죽음에 대한 시를 창조했다. 그의 시는 또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조르조 데 키리코 (Giuseppe Maria Alberto Giorgio de Chirico, 1888-1978)]

초현실주의 회화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여겨지는 키리코는 소위 형이상학적 회화(pittura metafisica)의 대표 주자로 간주된다. 키리코는 그리스 출생으로 이탈리아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는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에 심취했고, 철학적 주제를 자신의 작품으로 표현했다. 1905년 아버지의 사망 후 뮌헨으로 이주한 키리코는 이 시기에 아르놀트 뵈클린과 막스 클링어의 작품 등 독일 문화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9년부터 1919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며 소위 '형이상학적 시기'를 보냈다. 그의 작품에 로마의 건축물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시기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로마 아케이드는 운명이다.... 그 목소리는 독특한 로마의 시로 가득 찬 수수께끼로 말한다.>

<시간의 수수께끼>, 조르조 데 키리코, 1910/11

키리코의 그림은 얼핏 보면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일상의 장면 같이 보인다. 하지만 평범한 우리의 주변에 도사리는 부조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수수께끼와 같이 숨겨놓아야만 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총 셋이다. 흰색 천을 두른 인물이 그림의 전면 좌측에 등장한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없다. 누군가는 그를 '오디세우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케이드에는 회색옷을 입은 노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상체를 뒤로 젖히고 서있다. 그는 흰옷을 입은 인물보다 불명확하지만 어쩌면 그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계의 왼쪽 편에는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의 실루엣만이 드러난다. 만약 그가 관찰자 쪽으로 서있다면 흰옷의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일몰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의 수수께끼는 이렇게 인물들의 정체와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불명확함으로 시작된다. 시계탑의 시간이 3시 5분 전을 가리키지만 로마의 어떤 곳에 이 시간에 그림에 드러난 그림자를 드리울 수 없다는 것도 수수께끼이다. 시계가 고장 났거나 화가가 의도적으로 다양한 시간을 한 시점에 공존시켰을 수도 있다. 2017년 푸올로 발다치는 키리코의 예술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작품을 만들 때 작가는 피카소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칸딘스키처럼 추상적인 형태와 색상을 통해 감정 상태를 표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키리코의 열망은 사고나 철학적 개념을 조형 예술의 형태로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키리코가 직접 밝히듯 그는 니체의 철학에서 작품의 기원을 발견한다.


<그런 다음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10월 로마로 향하는 여행 중에 회화로 옮길 수 있는 이상하고, 알려지지 않은, 외로운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명상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첫 번째 회화적 환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림에 보이는 것과 같이 '이상하고, 알려지지 않은, 외로운 것들'은 니체가 주로 변호하는 존재들이다. 니체는 이상한 것들이 다시 일반적인 것으로, 알려지지 않는 것들이 알려지는 것들로, 외로운 것들이 함께하는 것들로 바뀌는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를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의 필연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일상에서 이러한 것들은 그대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 공간적으로 앞에 위치한 흰옷의 인물이 뒤편의 회색옷의 인물보다 크기가 작은 것, 시계 옆의 검은 옷의 인물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작은 것도 일상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인식'은 '모두의 인식'과 전혀 다르다. '인간의 인식적 한계에 대한 자각'은 '인간의 창조성의 근원'이고, 어제의 나는 오늘과 내일의 나에게 끊임없이 되살아나 말을 건다. 니체는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의 가르침을 통해 시간에 종속되어 있는 무기력한 인간을 해방시켰다. 우리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어차피 삶은 영원히 동일하게 반복될 뿐이기에, 이번의 선택은 단 한 번의 유일한 선택이다.


<‘나 이제 죽어 사라지노라. 한순간에 나 무로 돌아가리라. 영혼이란 것도 신체와 마찬가지로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느니.’ 그대는 이렇게 말하리라. ‘그러나 내가 얽혀 있는 원인의 매듭은 다시 돌아오리라. 돌아와 다시 나를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한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키리코가 <시간의 수수께끼>에서 보여주는 세 인물이 만약 동일한 인물의 세 시간성이라면, 이들은 한 공간에 존재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로마를 방문한 20대의 나와 50대의 나, 그리고 죽음을 앞둔 70대의 나는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20대의 내가 "다시 로마를 방문하리라"라고 다짐하는 순간 50대의 내가 로마에 있음의 원인이 될 수 있고, 50대 내가 20대의 나를 회상하며 70대의 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키리코는 시간에 종속된 인간의 무기력함을 역전시켜 보여준다. 회화는 음악과 달리 시간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키리코는 정지된 공간에 다양한 시간을 공존시키는 방법이 또 다른 방법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거리의 신비와 우울>, 조르조 데 키리코, 1914

<거리의 신비와 우울>에서는 키리코의 연출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의 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법은 과장된 투시도의 적용이다. 흰색 건물의 먼 부분은 과도하게 소실점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더욱 기괴한 점은 오른편의 어두운 건물의 소실점은 흰색 건물의 그것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건물은 마치 다른 의식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빛과 어둠,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 위치한 땅에는 굴렁쇠를 굴리는 소녀의 실루엣이 보인다. 소녀는 그림자와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검은 형체를 띠며 두 영역의 좁은 틈 사이로 달려간다. 그녀가 달려가는 곳에서는 마치 거인과 같은 수수께끼의 존재가 다가오고 있다. 일상적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상한 일들이 기묘하게 암시되어 있다.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단서들은 불충분하고 불안을 자아낼 분위기들만이 연출되어 있다. 삶은 이러한 불안들의 연속이며, 불안은 때론 망상으로 사라지기도 하지만, 때론 예상되는 사고와 불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의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불안을 증폭, 조장하는 무리가 광장에서 어두운 그림자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사랑의 찬가>, 조르조 데 키리코, 1914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해에 키리코는 <거리의 신비와 우울>과 함께 <사랑의 찬가>를 완성한다.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쓴 시에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교향곡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안에는 유명한 연인들의 놀란 입맞춤의 웅웅 거림이 담겨 있습니다.

대공포처럼 곧게 뻗은 영웅 이아손의 소중한 외침은 백조의 치명적인 노래

그리고 첫 번째 광선이 움직이지 않는 멤논을 노래하게 만든 승리의 찬가
거기에는 납치 순간의 사비네 그리고 정글의 고양이들의 사랑의 울부짖음

열대 식물에서 솟아나는 수액의 둔탁한 소리

사람들의 지독한 사랑을 구현하는 포병의 천둥소리

생명과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바다

그곳에 탑이 있습니다. 세계의 사랑이라는.>


키리코의 <사랑의 찬가>에는 짝을 잃은 고무장갑과 다프네가 없는 아폴론의 두상이 비현실적 크기로 벽에 매달려있다. 왼편 멀리에는 증기기관차의 실루엣이 보인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열차는 벽에 가로막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아폴리네르의 시는 다양한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연인들의 다정함, 치명적 유혹으로의 이끌림, 영광을 향한 열정, 생존과 안전에 대한 동경, 생명의 근원적 번식, 욕망과 탐욕, 창조의 힘. 키리코는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사랑의 역설적 공존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미술은 관찰자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관찰자가 질문을 걸어올 때 그의 그림은 대답 대신 또 다른 수수께끼를 던진다.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샤갈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던 현 벨라루스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대인으로서 예술가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유대인임을 숨기고 활동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샤갈은 자신이 유대인임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작품에 공개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색채의 마술사'로도 불리는 샤갈에 대해 피카소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마티스가 죽으면 샤갈은 색상이 실제로 무엇인지 이해하는 유일한 화가가 될 것이다.>


<나와 마을>, 마르크 샤갈, 1911

다양한 색의 향연으로 제작된 샤갈의 <나와 마을>에는 그의 어린 시절 고향 비쳅스크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샤갈은 어린 시절 기억의 공간을 소환하기 위해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이 드는 여러 기법을 사용했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입체파의 기법과 같이 분할, 교차, 중첩되어 있다. 미술사학자 호르스트 얀손(Horst Woldemar Janson, 1918-1982)은 샤갈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자연스러운 색상과 크기로 구성하고, 중력 법칙을 초월한 상상적 공간으로 표현한 "입체파 동화"라고 평가했다. 좌측의 염소는 고향의 전원적 기억의 표현이고 녹색 피부의 남자는 샤갈 자신 혹은 신적인 존재라고 해석된다. 이 인물은 왼손에 나무 한그루를 쥐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의 나무'를 상징한다.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여 자신의 종교관을 드러낸다. 마을에는 교회가 보이고 낫을 든 남자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화면의 중심에는 원형의 기하학적 흔적이 남겨져 영원성을 떠오르게 한다. 레오 톨스토이는 누구도 자신의 고향을 뺏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고향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고 했고, 샤갈은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고향을 그의 예술로 영원히 존재하게 했다. 샤갈은 57세에 고향을 떠나 미국에 거주하던 시절 "나의 도시 비쳅스크에게"라는 제목의 서한을 발표한다.


<왜? 왜 나는 오래전에 당신을 떠났을까?... 당신은 생각했습니다. 그 소년은 무언가를 찾고 있고, 하늘에서 별처럼 내려와 지붕 위의 눈처럼 밝고 투명하게 떨어지는 그 특별한 미묘함을 찾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어디서 얻었을까요? 어떻게 그와 같은 소년에게 왔을까요? 그가 왜 우리와 함께, 도시에서, 그의 고향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소년은 "미쳤을" 수도 있지만, 예술을 위해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생각했습니다. "알겠어요, 나는 그 소년의 가슴에 새겨져 있지만, 그는 여전히 '날고' 있고, 그는 여전히 이륙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의 머릿속에는 '바람'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지 않았지만, 당신의 정신과 성찰로 호흡하지 않는 그림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생일>, 마크 샤갈, 1915

샤갈은 고향 비쳅스크에서 자신의 아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 Chagall, 1889-1944)를 만났다. 샤갈은 벨라를 만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고, 그녀의 눈은 나의 것이다. 그녀는 내 어린 시절, 현재,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고, 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샤갈은 벨라의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5년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 몇 주전 생일을 맞이해 <생일>을 그렸다. 벨라는 샤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꽃다발을 꽂으려 창가로 다가가고 있다. 창가의 테이블에는 생일 케이크가 준비되고 있다. 홀쭉한 그녀의 지갑은 가난한 연인의 진솔한 사랑을 의미한다. 벨라에게 키스하는 샤갈의 몸은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꿈속의 움직임을 보인다. 비현실적 포즈와 팔이 없는 신체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샤갈의 이끌림, 운명적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감정의 시각적 투영이다. 방의 분위기와 색채는 마티스를 떠오르게 하는 야수파적, 아르누보적 색과 장식으로 가득하여 두 연인에게 향하는 시각적 몰입을 해치지 않고 따뜻하고 편안한 상상 속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왼편의 열린 창문은 그들의 영원한 행복을 상징한다. 샤갈의 미술은 논리성이나 규칙을 거부한다. 샤갈의 전기를 쓴 재키 불슐레거(Jackie Wullschläger, 1961-)는 이렇게 기술했다.


<세련되고, 불안하고, 유치한 감성, 약간은 낭만적인 기질, 삶에 대한 엄숙한 관점의 특징인 슬픔과 명랑함이 섞인 빛으로 삶을 탐구한다. 그의 상상력, 그의 기질은 의심할 여지없이 라틴계의 엄격한 구성을 금지한다.>


또한 그녀는 샤갈이 현대 미술에 남긴 업적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그의 캔버스에서 우리는 모더니즘의 승리, 내면의 삶을 표현하는 예술의 돌파구를 읽습니다. 그것은... 지난 세기의 상징적 유산 중 하나입니다. 동시에 샤갈은 1914년에서 1945년 사이 유럽 역사의 공포에 개인적으로 휩쓸렸습니다. 세계대전, 혁명, 인종 박해, 수백만 명의 살인과 추방. 많은 주요 예술가가 추상화를 위해 현실을 피했던 시대에 그는 고통과 비극에 대한 경험을 모든 사람이 반응할 수 있는 즉각적이고 단순하며 상징적인 이미지로 압축했습니다.>


시인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는 샤갈을 "이 세계 최고의 이미지 제작자... 그는 자유의 빛으로 우리 세계를 바라보았고, 사랑의 색으로 보았다"라고 말했다.



[르네 마그리트 (Rene François Ghislain Magritte, 1898-1967)]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는 생각하게 만드는 예술을 만들고자 했다. 그의 그림은 철학적 사유를 위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1973년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을 주제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마그리트는 "앎"이라는 것 자체에 질문을 던진 소크라테스와 같이 "알고 있지 않은 것", 즉 "무지"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을 추구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자기 확신에 갇힐 뿐이지만, 알고 있지 않은 것은 자기 극복을 통한 성장을 가능케 한다.


<저는 여기에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그림은 무엇을 상징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지식인"은 "알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묻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이 질문은 이미지에 대한 정확한 수용을 의미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에 대한 해석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볼 때 느끼는 것, 실제로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해당할 것입니다. “무엇이 이 그림을 대표하는지” , 보는 사람, 그림을 대표하는 사람, 그 사람의 감정과 생각이 그림을 대표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비록 특별할지라도 관습이 생각이나 감정의 모호한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 한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표현할 수 없습니다. 생각이나 감정이 생겨나고 이 이미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려진 이미지에서 입니다. 그려진 그림은 생각이나 감정을 나타내지 않지만 감정이나 생각은 그려진 그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왼편: <꿈의 열쇠>, 르네 마그리트, 1935; 오른편: <빠른 희망>, 르네 마그리트, 1927

마그리트는 언어와 사물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삼는다. <꿈의 열쇠>와 <빠른 희망>은 그림과 말이라는 것이 실제 그것에 해당하는 대상과의 우연한 지시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1966)>에서 언어는 개인의 자기 결정이나 주체적 선택의 영역에 있지 않은 "지식"의 영역임을 이야기한다.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범주화"를 통해 만들어진 사물의 정리법을 토대로 했고 그것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배치되었다. 결국 지식, 즉 사물과 언어에 대한 푸코의 철학은 마그리트에게서 시각화된 모습으로 드러났다. 푸코는 <말과 사물>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리게 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인간이 발견하고, 정리하고, 만들어 낸 대부분의 지식은 시대가 지나면 반대를 만나고, 폐기되고, 보존되며 발전해 나가는 변증법적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변화가 거대한 굴곡을 만들 때 우리는 그것을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는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종의 약속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곧 폐기될 예정이다. 마그리트는 '말'을 'the door'라고, '시계'를 'the wind'라고, '물병'을 'the bird'라고, '여행가방'을 'the valise'라고 표기했다. 여기서 '여행가방'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림과 단어가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저것들은 그렇게 불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어의 'gift'는 '선물'이라는 추상적 개념과 대응을 이룬다. 하지만 독일어의 'Gift'는 '독'과 대응을 이룬다. 이 두 단어에 대해 "선물은 때론 독이 될 수도 있다."라는 새로운 지혜를 얻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지혜는 중세 독일어에서 'Gift'의 의미 변화 과정에서 '선물'이 '치명적 선물, 독'으로 바뀐대서 비롯된 결과다. 영어의 'brave'의 경우에도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멋진'의 의미를 가졌었고, '용기 있는'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파생되었다. 이러한 단어의 우연적 변화와 파생의 결과로 '의미'와 '단어', 철학적 용어로 '기의(signifié)'와 '기표(signifiant)'의 결합이 생겨난다. <빠른 희망>에서 마그리트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사물들을 풍경화에 던져놓았다. 여기서 각 단어에 해당하는 사물을 맞혀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좌측의 길쭉한 모양의 사물은 'arbre'로 '나무'를 의미한다. 중앙 윗부분의 'nuage'는 '구름'을 오른편 위의 'village á l'horizon'은 '지평선위의 마을'을 의미한다. 이렇게 기호만으로 구성된 그림과 실제 풍경화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로랭과 푸생의 풍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표를 달고 있지 않다. 문화권에 따라 인물과 주제는 '알 수 없는 것'에 포함될 수도 있고, '명백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이러한 '명백한 것'과 '알 수 없는 것'의 관계는 보다 불명확해졌다. 지시 관계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배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 1929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그는 파이프라는 언어와 실재하는 파이프라는 사물 사이의 관계의 필연적 관계에 의문을 던진다. 마그리트는 사물과 언어 사이의 필연적으로 보이는 단단한 결합에 균열을 낼 뿐 아니라, 재현이라는 회화의 고전적 규범에도 의문을 던진다. 누가 보더라도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 실재하는 사물을 대체할 수 없음을 고발하기 위해 세잔부터 시작된 관점의 다양화, 투시도의 와해는 피카소에 와서 입체적 관점의 재조합으로 또 다른 실마리를 찾았다. 마그리트는 직접적으로 언어 기호를 회화에 삽입하여 중세 이후로 사라졌던 언어와 회화의 화해를 조정한다. 하지만 이 화해는 이전의 관계로의 복귀를 의미하지 않고, 언어의 규정성이 개개인에게서 발생하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수용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부정확해 보이는 인식을 정확한 인식으로 착각한다.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말과 대상' 사이의 관계가 특정 말과 사물에 대한 무시에서 맺어졌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는 말과 대상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세운, 통상 일상적인 삶에서는 무시되어 온 말과 대상의 어떤 성격을 정확히 부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관계의 정립은 '타향으로 보냄' 혹은 '다른 환경에 둠'으로 번역될 수 있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는 방법을 통해 마그리트의 미술에서 표현된다. 푸코에게서 이 개념은 'pense autrement', 즉 '다르게 생각하기' 혹은 '생소하게 만들기'로 사용된다. 우리는 사물, 사람 혹은 사건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려고 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체'는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기를 거부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듯 진리는 '마야의 베일(der Schleier der Maya)' 뒤에 숨어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마그리트의 예술은 우리의 일상적 원리로는 볼 수 없는 기만의 신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데페이즈망'은 사물과 언어의 밀약을 깨뜨리고 보다 무지갯빛의 진리를 바라볼 수 있는 길, 다양성의 길을 향한 모험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Alberto Giacometti, 1901-1966)]

스위스의 예술가 자코메티는 마그리트와 같이 철학을 미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과 관련이 있는 철학자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를 쓴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였다. 1939년 자코메티는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파리의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에서 만났다. 이후 출간된 존재와 무에는 자코메티와 사르트르가 공유한 사상이 일부 포함되었다고 한다. 자코메티는 평생을 현상학(Phénoménologie)에 관심을 가졌고 <존재와 무>의 부제가 <현상학에 대한 에세이>였다. 그는 현상학을 통해 바라본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새로운 예술적 형태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 "현실과 가상, 유형이면서 접근할 수 없는 공간에 있는 상상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왼편: 스위스 100프랑 지폐; 오른편: <걷는 남자 I>, 알베르토 자코메티, 1960

자코메티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걷는 남자 I>이다. 비현실적인 비례에 깡마른 몸의 인체조각은 사람임을 인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유사성만을 보여준다. 이 걷는 남자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작품의 제목에서도 이 남자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사르트르는 서양 철학에서 2500여 년간 지속되던 "목적론적 존재"를 해체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세상에 '내 던져진(기투) 존재'이고 삶의 목적과 의미는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자발적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그 누구도 그의 삶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판단할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니체가 선언한 "신은 죽었다"의 세계에서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의 운명을 자코메티는 깡마른 인간의 걷는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묵묵히 전방을 응시하고 걸어가는 이 남자는 어떠한 영웅적 면모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평범한 남자는 "걸음의 자연스러운 균형"을 통해 "고유한 인간의 생명력"을 드러낸다.

<손가락을 든 남자>, 알베르토 자코메티, 1947

예술 작품을 가격으로 평가하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지만 자코메티의 <손가락을 든 남자>가 2015년 기준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조각품이 된 것은 이 작품의 가치가 대중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가느다란 철사와 같은 두께의 손가락과 팔, 그보다 조금 두꺼운 머리와 가슴, 허리는 허약해 보이는 두 다리 위에 얹혀있다. 그렇다고 이 신체가 균형감을 잃거나 손가락을 든 남자를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자코메티는 초현실주의를 포기했다. 상상력으로 그린 그림의 한계를 자각하고 다시 시각적 세계로 돌아와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데 집중했다. 부식된 것 같은 표면과 늘어난 비례는 쪼그라들어 곧 사라질 것만 같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작품을 "항상 무와 존재의 중간"이라고 평했다. 시간과 문화를 초월한 미니멀한 미학을 지닌 수수께끼 같은 자세의 조각품은 우리에게 '인간'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저 남자는 어느 곳을 가리키고 있을까?", "저 남자의 왼손은 누구를 부르는 손짓인가?"등 무수한 질문을 쏟아낼 수 있다. 미완성으로 보이는 자코메티의 작품은 완전할 수 없는 운명의 인간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강박적 목적론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한다.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Felipe Jacinto Dali i Domènech, 1904-1989)]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는 마그리트, 자코메티와 마찬가지로 다른 분야의 인물과 연결해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접근해 볼 수 있다. 달리는 꿈에 나타나는 무의식의 세계를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소화했다. 1936년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스페인이 내전에 빠지자 달리는 이탈리아와 미국 등을 여행하며 고국을 떠나 있었다. 1938년 7월 19일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달리는 에드워드 제임스와 스테판 츠바이크의 소개로 그토록 염원하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 만날 수 있었다. 이튿날 프로이트는 츠바이크에게 편지를 보낸다.


<참으로 어제 방문객들을 찾아오신 운명에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는 나를 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절대적인 바보들(술의 경우 95%라고 가정하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고 광신적인 눈과 부인할 수 없는 기술적 숙달을 갖춘 젊은 스페인 사람은 나에게 다른 평가를 내리게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달리는 프로이트가 인정한 유일한 무의식의 시각화에 성공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정신분석학을 삶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여기기 이전 프로이트는 인상파와 입체파, 미래파, 점묘화 등의 다양한 아방가르드 회화의 장르를 섭렵했고 1927년 첫 초현실주의 작품 <꿀은 피보다 달콤하다>를 발표한다. 1929년 호앙 미로(Joan Miró, 1893-1983)의 제안으로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입했고 여기서 한스 아를, 앙드레 브르통,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만 레이, 폴 엘뤼아르와 같은 인물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 1931

달리는 꿈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이 무너지는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졌다. 소위 "부드러운 시계" 혹은 "녹는 시계"로 보이는 흘러내리는 시간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제기된 시간의 상대성의 개념에 대해 달리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1930년 <기억의 지속>을 완성하기 1년 전 달리는 "편집증적 비판 방법"을 개발하여 의도적으로 정신병적 환각을 유도했다. 편집증(paranoia)은 마음 혹은 정신(nous)이 밖에 (para)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어로는 정신이상을 뜻한다. 병리학적으로는 심각한 걱정이나 두려움으로 자신이 주변으로부터 피해를 받을 것이라는 의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그림의 배경에는 얼어붙은 듯한 바다와 생명하나 없는 산이 있고, 전면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보인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세계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는 상태로 이와 대비되는 흘러내리는 시계의 모습이 강조된다. 흘러내리는 시계는 달리가 어린 시절 태양 아래에서 녹아서 흘러내리는 카망베르 치즈에 대한 기억에서 유래한다. 주황색의 회중시계 위의 개미떼와 그 옆 시계 위의 파리가 보이는데 이것 역시 동물이나 곤충의 사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패되어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눈을 감고 있는 달리의 얼굴처럼 보이는 괴생명체의 모습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에서 유래한 듯하다. 꿈을 꾸는 듯 잠에 빠져든 달리의 모습을 연상시키면 이 모든 장면은 달리의 꿈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달리가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두려움의 대상, 상황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기억 속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왼편: <코끼리>, 살바도르 달리, 1948; 오른편: <미네르바>,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77

<코끼리>에서는 모순과 불합리한 것들이 공존한다. '무거움'과 '가벼움' (육체와 영혼), '높음'과 '낮음' (영원한 권력과 지혜, 불안정한 기반), '고독'과 '허무', '시간의 왜곡'은 불안정한 균형 상태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인간의 억압된 욕망과 불안은 안정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그것을 지탱할 나약한 자아 사이에서 생겨난다. '지혜'를 뜻하는 미네르바는 인도에서 코끼리로 묘사된다. 아프리카에서도 코끼리는 힘과 권력의 상징을 뜻하는 데 지상 최강의 동물인 코끼리에 인간의 권력욕을 투영한 것이다. 베르니니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떠받치는 코끼리를 조각했고, 이것이 달리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 아래 황량한 땅에서 천사가 인간에게 달려가고 그들 사이에는 영원의 문이 보인다. 달리는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당신의 삶은 무엇으로 지탱되는가? 단단한 기반 위에 있는가? 아니면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가? 안정된 상태를 위해 끝없이 쌓아 올린 욕망의 탑만 바라보다 땅 위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천사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달리는 자신의 편집증적 불안을 예술로 드러내는 것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마주했다. 1983년 그의 친구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 Portolés, 1900-1983)은 "그의 성격의 특정 측면은 혐오스럽고 자기 홍보에 대한 집착, 노출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정한 천재, 작가, 수다쟁이, 비교할 수 없는 사상가"로 달리를 기억했다. 초현실주의의 아버지 앙드레 브르통은 "마음의 창문이 활짝 열린 최초의 사례"로 달리의 예술을 평가했다. 독일 표현주의가 우울하고 비관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방법을 쓴 반면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철학적 고민을 예술로 드러내고 관찰자들을 자신의 고민으로 초대한다.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눈을 돌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내 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기존 미술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 기법, 주제, 대상, 내용 등 다양한 부분에서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키리코, 마그리트, 자코메티, 달리 등의 예술가는 예술을 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의 다양한 학문과 분리된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예술은 예술가들 혹은 그들의 폭넓은 관심 분야를 통해 삶의 여러 영역을 다양하게 비추게 되었다. 특정 권력 집단을 위한 프로파간다에서 소수의 부유층의 기록물로, 종교 집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예술이 이제는 개별 예술가들을 통해 삶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양식을 너머 예술은 예술가의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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