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흘러가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

권여선.「봄밤」.『안녕 주정뱅이』. 파주: 창비.

by 노창희

사업을 하던 수환은 거래처 때문에 부도를 맞고 위장이혼한 아내가 집과 재산을 모두 팔아 잠적해 버리는 바람에 황폐한 삶을 살게 된다. 중학교 교사였던 영경은 서른둘에 결혼을 하지만 1년 반만에 이혼하고 백일 된 아들을 시부모와 남편에게 부당하게 빼앗기고 알콜 중독에 빠진다. 알콜 중독으로 정상적인 근무가 어려워진 영경은 학교 일을 그만둔다. 영경과 수환은 마흔 셋의 봄밤에 각자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만나 연인이 된다.


하지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이들에게 허용된 행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영경의 아파트에서 동거하던 수환은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리지만 신용불량자 신분으로 의료보험을 적용받지 못해서 치료를 미루다가 치명적인 상태가 된다. 뒤늦게 영경과의 결혼을 통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되지만 이미 상태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나빠진 뒤였다. 그 사이에 영경의 알콜 중독도 심각해진다. 수환은 치료를 받는 대신 요양원으로 가는 편을 택하고 영경도 요양원에 따라 들어온다. 이들은 요양원에서 알류 커플(알코올 중독과 류머티즘 커플)로 불린다.


요양원에서 술을 마실 수 없었던 영경은 가끔씩 술을 마시고 돌아온다. 영경은 금단 증상을 견디지 못하고 모텔에서 술을 마시다가 정신을 잃고 그 사이에 증상이 심해진 수환은 사망한다. 영경은 수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수환의 장례까지 치러진 후 돌아온 영경은 알콜성 치매에 걸리고 수환도 기억해 내지 못한다. 작가가 이 두 커플에게 부여한 마지막 행운은 영경이 수환의 죽음을 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봄밤」에는 중요한 레퍼런스 두 가지 등장한다. 톨스토이의 『부활』과 아마도 이 단편의 모티프가 되었을 김수영의 「봄밤」이다. 『부활』이 이 단편에 등장한 이유는 분자와 분모에 대한 비유가 『부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분자와 분모로 사람의 가치에 대해 설명한다. 분자가 아무리 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만큼 분모가 크다면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는 힘들다. 수환은 자신이 영경에게 줄 수 있는 분자는 없고 분모만 무한대로 큰 존재라고 자책한다. 그런 그가 영경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영경이 좋아하는 술을 자신의 의지대로 마실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수환 자신의 상태도 심각하지만 영경이 더이상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하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수환은 영경에게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앉는다. 그것만이 자신이 늘려 줄 수 있는 분자라도 되는 것처럼.


영경은 모텔에서 술을 마시며 김수영의 「봄밤」을 되뇌인다. 봄밤은 영경이 수환을 만나 사랑에 빠진 시기이기도 하지만, 영경은 수환과 보내는 시간이 서둘러 가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애써 자신에게 다음의 구절을 되뇌인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33쪽).” 그 사이 수환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영경은 그 사실을 모른 채 기억의 정지 상태인 삶을 맞이하게 된다.


「봄밤」에서 작가가 영경과 수환에게 허용한 시간은 12년이지만 수환의 죽음과 영경의 치매로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은 12년이 아니라 무한해진다. 다소 작위적인 이 소설의 결말이 인상적인 이유는 수환과 영경이 보내온 삶이 그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가끔은 애타게 저 구절을 되뇌이게 된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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