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가 환기하는 ‘실존’

권여선, 「전갱이의 맛」, 『아직 멀었다는 말』. 파주: 문학동네.

by 노창희

권여선 소설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장치 중 하나는 ‘음식’이다. 권여선의 음식에 관한 묘사는 굳이 소설 전체의 맥락에서 갖는 의미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예외 없이 흥미롭다. 「전갱이의 맛」은 아예 생선 이름이 소설의 제목이다. 권여선 소설에서 음식이 제아무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제목에까지 들어가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전갱이의 맛」은 헤어진 전남편과 우연히 조우한 내가 전갱이라는 처음 듣는 생선을 맛보고 놀라움을 느끼는 이야기다. 그 놀라움은 생선의 맛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만에 해후한 그가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섬세한 배려로 나를 대해 주는 것에서 온 것이다. 신형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미 사랑이 끝났지만 나는 오히려 예전보다 그가 나를 정확하게 사랑해 준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와 헤어진 삼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나를 이렇게 정확하게 사랑해 주는 것일까?


그는 성대 낭종 수술을 받아 말을 하기 힘든 상태였다. 다행히 나와 해후한 시점에서는 짧은 대화는 가능한 상황이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던 그는 논문도 포기하고 비교적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도서관 사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럼 말을 못하는 사이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그는 자연히 다른 감각이 발달하게 된다. 사람들의 말에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느끼게 된 것이다. 말하기를 즐겼던 그는 듣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나의 말에 선선히 수긍하지도 않았다. 나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놀란다. 과연 그는 변한 것이다.


그가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느끼는 바를 명확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타인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내가 느끼는 바나 생각하는 바를 전달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인데 말을 하지 못하니 자기 자신에게 조차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게 된 것. 그는 타인에게 하는 말은 포기가 되어도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고 나에게 얘기한다.


말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표현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기 의해 그는 수화를 배운다. 그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그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삶이, 그의 감정과 기억이 오롯이 담긴 말, 궁극적으로는 말 너머의 말(244쪽).” 하지만 그 말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기억되거나 발견(245쪽)”된다. 간절했던 그 순간의 기억이 나만의 말을 소환해 내는 것이다.


성대 낭종 덕분에 그는 그만의 말을 갖게 되었고, 그의 성대 낭종 수술 덕분에 나도 나만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변화가 나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권여선 소설에서 드물게 있는 헤피엔딩인데, 왠지 모르게 조금 쓸쓸하다. 「전갱이의 맛」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해서 역설적으로 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더 나아가 자신만의 말을 찾는다. 나는 왜 그의 변화에 놀라움을 느끼는가? 이제 그와 나는 더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나의 관계의 부재가 과거에 존재했던 관계의 실존을 환기해 주는 것이다.


부재만이 진정한 실존을 환기시킨다고 얘기한다면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일까? 그럼 이렇게 말을 바꿔 보자. 부재만큼 실존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환기하는 것은 드물다고. 그럼 부재하는 것을 환기시킴으로써 현재의 실존을 들여다보게 하는 가장 좋은 형식은 무엇일까? 아마도 소설일 것이다. 「전갱이의 맛」은 이미 관계가 어긋나 버린 두 남녀가 부재를 통해 실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소설이자 메타소설이다. 소설은 이미 부재한 것을 환기시켜 실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최근 몇 년간 나에게 소설의 이러한 덕목을 잊지 않게 해주는 작가를 한 명만 꼽으라면 바로 권여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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