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존엄함을 스스로 지켜내는 미니멀리즘

권여선.「이모」. 『안녕 주정뱅이』. 파주: 창비.

by 노창희

윤경호 라는 남성적인 이름을 가진 여성의 삶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그녀는 대학 1학년 여름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넘어져 객사하는 바람에 가장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기업 홍보실에 입사해 쉰다섯살에 홀연 사라지기까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2년여간 잠적하여 혼자 살았고, 췌장암에 걸려 석달간 투병하다 죽었다. 이것이 남자 같은 이름을 가진 윤경호, 그녀의 삶이다(87-88쪽).”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췌장암 투병중이라는 시이모의 병문안을 갔다가 의외의 제안을 받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정기적으로 놀러 오라는 것. 그 제안이 더욱 의외인 것은 내가 피붙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네가 글을 쓴다는 것도 좋지만 내 피붙이가 아니라는 게 더 좋다. 피붙이라면 완전히 공평하고 정직해지기는 어렵지(86쪽).”윤경호는 말기암 판정을 받은 후 연명치료를 이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원래의 루틴을 생을 마감하고자 한다.


동생의 도박 빚을 탕감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은 그녀는 쉰다섯살에 잠적하여 작은 집을 얻고 월에 35만원만을 쓰며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단촐 한 삶을 산다. 그리고 혼자 살게 되면서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한다. “요리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요리가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84쪽).”


그녀라고 사랑이 없고 청춘이 없었겠는가. 공부하던 남성과 연애하던 그는 나의 추측에 따르면 아마도 남동생의 도박 빚 탕감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 상황 때문에 희망이 없었기에 그녀에게는 허용된 자유도 없었다.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89-90쪽).”그녀의 짧았던 청춘은 그렇게 사라지고 그녀의 삶에는 어둠이 짙게 드리운다. “병아리 빛깔의 수채화는 대개 그렇고 붉고 어두워져 석양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94쪽).”


대학시절 그녀는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던 남성에게 무의식적으로 담배 불을 붙인 적이 있다. 윤경호는 나에게 그저 귀찮아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얘기하지만 그녀의 삶에 드리운 어둠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증오는 무엇인가(94쪽).”그녀는 이 어두컴컴한 증오를 극복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고통스러운 것보다는 위엄 있게 고독해 지는 편을 선택한다. 그녀는 가족보다 자신이 온라인상에 쓴 문장에 더 애정을 갖는다. 가족은 본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자신이 쓴 문장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였고, 오로지 내가 쓴 글, 내가 만든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우주였으니까(97쪽).”

이 단편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기억과 관련된 다음의 문장은 기억과 관련된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106쪽).”소설은 그 기억에 관한 기록이고, 맥락을 어떻게 옮기느냐에 따라 미학적 가치가 달라지는 예술이다.


나는 윤경호에게 유산을 상속 받고 아득한 감정을 느낀다. “통장에 입금된 여덟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107쪽).”


「이모」는 삶의 위엄이 어떻게 얻어내는지에 대한 한 관점을 보여준다. 공동체나 가족에게 기여하는 삶에도 위엄이 깃들 수 있지만 존엄한 개인으로서 고독을 선택하는 삶 또한 위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경호가 가족과 확보한 거리는 아득하지만 아득한 만큼 그녀의 삶은 위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기형도, 청춘에 대한 경멸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