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 서울: 문학과 지성사.
흔히들 20대를 아름다운 시절로 회상한다. 나는 그러한 감상적 인식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20대는 방황과 좌절의 시기이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과 꿈과 사랑의 좌절이 주는 절망감이 약동하는 젊음의 초록빛을 무채색으로 바꾸어 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우리 나이로 서른에 죽은 기형도의 시에 드러나 있는 정서 중 상당수는 삶에 대한 경멸이다. 그는 젊어서 죽었으므로 그의 시 「추억에 대한 경멸」을 빌려 그의 글에 나타난 태도를 청춘에 대한 경멸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가 남긴 글들을 ‘청춘에 대한 경멸의 기록’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찬옥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질투는 나의 힘」에서 느껴지는 것은 열망이 좌절된 청춘에 대한 환멸이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 53쪽)
청춘이 좌절을 수반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기형도의 희망에 대한 인식은 삶에 대한 환멸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위에 인용한 「질투는 나의 힘」에서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라고 한 것이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서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19쪽).”고 한 것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기형도의 희망에 대한 인식 환멸에 가깝다.
「정거장에서의 충고」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53쪽).” 김훈은 이 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미안하지만……”이라는 단서를 앞세우고 노래되어지는 희망은 마침내 희망이 아니다(「오도가도 못하는 정거장」, 『내가 읽은 책과 제상』, 199쪽).”“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49쪽)”
하지만 이 환멸로 가득한 청춘에게도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좌절된 것 같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81쪽)”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빈집」은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81쪽)”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집 앞」에서는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79쪽)”라고 사랑의 상실을 고백하고 있다.
삶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차 있던 기형도는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입 속의 검은 잎』 뒷 표지에 실려 있는 시작 메모에는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있다. 혹시 기형도는 자신을 받아들여야 주지 않는 눈 같은 존재로 자신을 여긴 것이 아닐까? 김훈은 앞에 인용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기형도의 정거장은 세계와 세계가 아닌 것 사이의 접점이다. 그의 정거장은 그 양쪽에 대하여 모두 무의미하고 무력한 공간일 수도 있지만 그 양쪽에 대하여 모두 유효한 의미를 갖는 공간일 수도 있다. 나는 정거장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내 친구에게, 그러지 말고 세계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염치 없는 도덕일 뿐이리라. 그의 정거장 속에서 세계의 안과 밖으로 드나드는 모든 길들이 새롭게 만날 수는 없는 것이며, 내 친구는 이렇게 늙어도 좋을 것인가(202쪽).”
김훈은 기형도가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였으나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발표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기형도는 세상을 등진다. 20여년 전에 삶에 대한 경멸과 환멸로 가득 찬 기형도의 글들을 나는 왜 그렇게도 좋아했던 것일까? 아마도 내 청춘에도 좌절과 환멸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그의 31번째 기일이다. 작년에 그의 기일 30주기 기념으로 시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가 나왔다. 나는 ‘입 속의 검은 잎’ 보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가 기형도 시가 가지고 있는 정서와 보다 더 가깝다고 느낀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20여년 전에 나를 매혹하였던 저 오래된 책을 다시 붙들게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