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어져 버린 현실을 대하는 태도로서의 글쓰기

이승우 『캉탕』

by 노창희

문학적 언어의 기능은 무엇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문학적 언어의 기능이 존재한다. 나한테 중요한 문학적 언어의 기능 중 하나는 현실이 낯설어 지는 순간 그 현실을 ’괄호‘ 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이 나에게 낯설어 진 이유는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이 그 자체로 문학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자기를 객체로, 남으로, 낯선 이로 만드는 것과 같다(66쪽).” 여기서 언어는 그냥 언어가 아니라 문학적 언어다. 낯설어져 버린 현실을 다루는 이승우의 태도는 구도자에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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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은 한중수가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한중수는 경제적 도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한중수가 벌어온 돈을 탕진하는 아버지와 다투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한 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한중수는 이로 인해 이명증을 겪게 되고 친구인 정신과 의사 J는 가급적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 있을 것을 권한다. 그곳이 이 책의 제목인 대서양에 있는 항구 도시 캉탕이다.


캉탕에는 젊은 시절 항해를 하며 떠돌다가 캉탕에서 아내가 되는 냐야를 만나 정착해 핍이 된 최기남이 있다. 이 소설은 최기남의 삶에 큰 영향을 준 『모비딕』에서 핍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서술하면서 마친다. 핍은 고래를 쫓다가 바다에 빠진다. 핍은 구조되지만 백치가 되어 버리고 만다. 『모비딕』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핍이 영혼을 익사시킨 채 유한한 육체만 살아남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캉탕』에서는 백치가 된 핍의 영혼이 이 일을 계기로 구출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소설을 마친다.


핍이 물에 빠졌다가 구출된 것을 계기로 영혼을 되찾았다면 그 이유는 더 이상 고래를 잡는 여정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고래는 신이 되려는 욕망을 가진 자를 유인하는 신화적 동물(39쪽)”이다. 그렇다면 신이 되려는 미망을 버릴 때만 구원받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한중수가 미망에 빠져나오기 위해 캉탕을 찾은 것이라면 문제는 보다 간단하다. 하지만 한중수는 미망이 아니라 과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영혼을 다친 자이다. 여기서 한중수는 타나엘이라는 역시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괴로워하는 선교사를 만난다. 타나엘은 헤어진 연인의 실종과 관련된 혐의 때문에 선교사라는 신분을 박탈 당한다. 과거에 사로 잡혀 있다는 면에서 한중수와 타나엘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둘 사이의 또다른 공통점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타나엘은 계속 글을 쓰고 있고 타나엘에 따르면 한중수는 “말을 하는 방식으로(140쪽)” 자기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한중수와 타나엘은 왜 계속 글을 쓰고 있는가? 낯설어져 버린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캉탕』에서 한중수가 구원받는 것에 성공했다면 그것은 다른 데에 성공한 것이 이나라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대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신화적인 서사를 가진 이 소설에서 이지은(「’이야기‘의 공간과 걷는 인간」)이 해설을 통해 밝힌 것처럼 한중수는 “타나엘의 희생에 의해 구원(231쪽)” 받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상처 입힌 과거가 계속 머리를 쳐 들고 튀어 나올 때 그것을 대면하는 한 방식은 그 과거로 인해 종종 낯설어 지는 현실을 ’괄호‘치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그럴 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는 길을 글쓰기가 제공해 준다고 읽었다. 문학의 기능이 무엇인지 시사해주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리고 이승우의 소설이라면 그길이 고통스럽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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