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를 지향할 자유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by 노창희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얘기한 취지는 문학이 정치와 관련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학이 사회를 변혁시키기에 과거보다 효율성이 떨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독자가 줄어들었고, 효율성 측면으로 보자면 문학보다 월등한 매체들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감히 이 사상적 거인에게 저항을 해 보자면 나는 아직도 문학이 정치에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큰 정치이건. 작은 정치이건. 나는 개인적으로 정치를 다루는 문학을 좋아한다.


소설은 정치적 입장을 담은 성명서가 아니고, 논리를 설파하는 논문도 아니다. 그럼 소설은 정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나는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가 소설이 정치를 다루는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산부인과 의사인 지수는 선배 희진의 제안으로 낙태죄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 「다른 세계에서도」에서는 낙태죄 합헌불일치가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이 소설은 거기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같은 대의를 가지고도 얼마나 다양한 입장과 시각차가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수는 동생인 해수가 급작스럽게 임신을 하면서 더욱 혼란에 빠진다. 임신중지는 자기결정권가 관련하여 가장 첨예한 문제인데 해수는 부모의 결정을 존중하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과연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를 두고 지수는 고민에 빠진다. 경제적인 안정을 중시하는 해수의 어머니는 임신중지를 하는 편이 좋지 않으냐고 하지만 해수는 임신과 동시에 결혼을 결정한다. 지수는 해수의 임신과 출산이 과연 주체적인 것일지에 대해 소설이 끝날 때까지 답을 찾지 못한다.


해수의 임신과 결혼에 관한 서사와 함께 「다른 세계에서도」를 이끄는 다른 축은 희진이 주도하는 임신중지 운동이다. 실제 사회적인 변화를 바라는 희진은 일반적인 도덕과 반하는 투의 의견 표명을 반대한다. 낙태죄 폐지와 같은 사회적 결정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끄는 집단이 가진 도덕성이 훼손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이다.


현실적인 결정을 이끌어 내야 하는 희진의 입장은 심정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이지만 희진이 얘기하는 도덕성이야말로 희진이 바라는 사회적 변화와는 모순되는 것이다. 희진과 같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기 위한 사회적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여성이 진정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도덕적 우위 확보를 위한 발언의 수위를 조정하거나 특정 입장 표명을 금지하는 행위야 말로 개인의 주체적인 결정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변화를 위한 수단과 관련한 이와 같은 딜레마는 어떠한 정치적 의사결정과 관련해서도 존재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른 세계에서도」는 지수가 아직 태어나지 않을 조카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화자를 활용하고 있다. 이 방식을 택한 이유는 지수가 조카가 실제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 옳은 일인지 정확히 판단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수는 조카가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태어날 지라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없는 지금 이곳을 상상합니다. 당신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동생 해수가 나와 함께 정동길을 걸으며 서로가 꿈꾸었던 미래를 이야기하던 그때와 다름없이, 우리가 나란히 각자의 두 발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말입니다. 당신이 없는 그곳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202쪽).”


작가의 정치적 입장은 작가노트 「각주」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헌법재판소는 통상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릴 때 입법자에게 일정시한까지 해당 조항을 개정할 것을 함께 촉구한다.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헌(2017헌바127)에 대한 전원재판부의 결정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정이 있고 한 해가 지난 지금까지 국회에서 발의된 개정안은 작년 4월 15일,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일부 개정 법률안이 유일하며 집권 여당이나 제1야당 소속 의원의 이름은 공동발의자 명단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조용한 외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많은 사람들이 끝났다고 여겼던 이 싸움은 사실,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206쪽).” 어떠한 싸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충분히 정치적이 될 수 있다. 나는 「다른 세계에서도」를 덮고 나서 낙태죄 합헌불일치를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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