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창희 May 04. 2020

맥루언에 대한 이해

김균, 정연교.『맥루언을 읽는다』.

내가 『미디어의 이해』를 처음 읽은 것은 2017년이다. 미디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석사 과정에 입학한 것이 2006년이니 늦어도 많이 늦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미디어의 이해』를 읽게 된 계기는 제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다양한 담론들이었다. 이러한 논의들은 자연스럽게 결정론과 관련된 혐의를 띄게 된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미디어의 이해』를 읽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 2017년과 비슷한 절차를 밟고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가속화되고 있는 디지털 대전환이 자연스럽게 맥루언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미디어의 이해』를 읽기 전에 『맥루언을 읽는다』를 먼저 읽었다.       


맥루언은 악명 높은 학자다. 그와 관련된 부정적인 인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술결정론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글을 읽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렵다는 것이 갖는 부작용이 읽기 어려운 다른 난해한 학자들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가뜩이나 선명하지 않은 맥루언의 주장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학원에 가서 처음 접한 학자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였으니 맥루언에 대한 내 인식은 처음부터 다소간 편향적으로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텔레비전론』에 나와 있는 윌리엄스의 비판이 정당하지 않다기보다는 맥루언에 대한 직접 경험 없이 비판부터 접하면서 내 인식이 편향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맥루언이 기술결정론자이냐 아니냐 하는 논의는 그리 생산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맥루언은 기술의 변화가 초래한 매체 양식의 변화가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다고 주장하였고, 이 주장에는 반박하기 어려운 통찰이 포함된 것만은 분명하다. 맥루언은 “매체는 콘텐츠보다 중요하고 우선한다(27쪽)”고 생각했다. 여기서 매체가 갖는 의미는 무척 포괄적이지만 지금의 미디어 환경을 고려해 보면 매체를 플랫폼으로 바꾸어 놓으면 이해가 좀 더 용이해 질 것이다. 다만, 매체를 플랫폼으로 바꿀 경우 발생할 위험은 상당히 크다. 맥루언의 주장을 협소하게 혹은 조야하게 이해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문장은 맥루언이 매체와 관련하여 주장했던 핵심이 설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맥루언은 매체에 따라 콘텐츠의 의미가 변한다고 말한다. 스타일이나 효과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자체가 변한다는 것이다. 매체에 의해 콘텐츠가 변했기 때문이다(34쪽).”     


맥루언의 주장 중 일과 여가에 있어 미디어의 중요성이 압도적으로 커진 지금 유념해야 할 지점은 다음의 대목이다. “맥루언은 각 사회의 성격은 그 사회의 주도적인 매체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매체 편향적 의식을 규명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다(56쪽)”고 생각했다. 맥루언 인생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인류에서 가장 중심적인 매체는 텔레비전이었다. 필자가 여러 차례 지적해 왔듯 지금은 텔레비전을 통해 제공되던 동영상을 제공하는 매체가 텔레비전에서 스트리밍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맥루언의 주장은 무척 논쟁적이다. 가령, 맥루언이 얘기한 개념 중 가장 유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핫미디어, 쿨미디어만 해도 그렇다. 맥루언에 따르면 정세도가 높은 매체는 핫미디어이고 정세도가 낮은 매체는 쿨미디어다. 여기서 정세도란 인간의 감각을 얼마만큼 쉽게 집중시킬 수 있느냐를 의미한다. “맥루언에 따르면, 텔레비전이 시청자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이 상대적으로 불분명한 이미지를 전송함으로써 정세도가 낮은 구조적 영향을 발휘(248쪽)”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동영상을 제공하는 품질이 매우 높아진 지금은 물론이고, 1960년대에도 과연 텔레비전이 다른 매체 보다 정세도가 낮은 매체 였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맥루언을 읽는다』는 맥루언의 주요한 사상 뿐 아니라 맥루언의 인생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신비평의 영향, 토론을 즐기는 맥루언의 성향,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형성된 맥루언의 명성 등은 맥루언이라는 학자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하다.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맥루언의 성향과 맥루언의 높아진 명성은 맥루언이라는 학자가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대가가 남긴 주장과 저술들이 놓여 있는 숙명은 그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맥루언 만큼 논쟁적인 학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맥루언을 읽는다』에서 맥루언과 비교할 만한 학자라고 소개되어 있는 마르쿠제, 맥루언과 마찬가지로 영상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보드리야르, 맥루언이 폄하했다고 알려져 있는 데리다 같은 학자들의 주장은 논쟁적일지언정 이들이 거장이라는 것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맥루언은 중요한 학자인지 조차 의문부호가 붙는 학자이다. 『맥루언을 읽는다』는 이렇게 많은 논란을 낳은 맥루언이라는 학자의 책을 바로 읽기 어려운 독자들에게 유용한 입문서가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상서사의 통속성과 형식 실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