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석. 『경계에서의 글쓰기』.
내가 문학에 바라는 극대치는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다. 좋은 문학은 이것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좋은 문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독자에게 삶의 진실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줄 때 문학은 철학이나 사회과학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내가 철학이나 사회과학 책을 읽을 때 바라는 것은 나를 설득시킬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을 획득하는 일이다. 내가 설득당한 이론적 자원은 내가 남을 설득할 때 가장 중요한 논거가 된다. 전자가 중요하냐 후자가 중요하냐는 질문은 나쁜 질문이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그러므로 두 가지 독서 모두 가치로운 동시에 버겁다. 힘들이지 않는 독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두 가지를 벗어나 위안이 필요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독서가 에세이 읽기다.
문제는 에세이를 읽을 때도 나는 위에 설명한 두 가지를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론적 자원을 동원하여 서늘한 감동을 주는 에세이를 선호한다. 좀 더 덜 버거운 방식으로 문학과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 책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에세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경계에서의 글쓰기』는 오민석이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은 책이다. 최근까지 오민석이 쓴 칼럼을 챙겨 읽은 나는 이 책이 내가 기대했던 것을 고스란히 돌려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그의 칼럼들에 나는 매번 설득되었으며 가끔씩 서늘한 감동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비평을 배운 제자다. 그래서 매번 설득당한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얘기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지금 이 순간 선물하고 싶은 책이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경계에서의 글쓰기』가 좋은 책이므로 선물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경계에서의 글쓰기』는 ‘1부 바깥을 사유하라’와 ‘2부 사랑은 의지다’로 구성되어 있고 1부는 4개의 장으로 2부는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에서 인상적인 문장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독후감을 써볼까 한다.
1부 첫 장은 ‘누가 공화국을 어린애로 만드는가’. 올바른 정치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J. Rancière)에 의하면 ‘일치(consensus)’는 정치가 아니라 ‘치안(police)’이다. 그에 의하면 정치란 ‘불일치(dissensus)’를 생산하는 것이고, 다른 견해들 사이의 충돌로 공공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다(42쪽).” 정치에 대한 랑시에르의 견해는 여러모로 새겨 들을 만 하다. 정치가 어려운 것은 불일치를 생산하기 위해 공동체를 위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단위에서의 도덕이 사회 단위에서의 도덕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적 상상력’이 필요하다(49-50쪽).”
1부 두 번째 장은 ‘낡은 신화의 베개에서 코를 고는 사람들’. 대변혁의 시점에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필요하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단독자로서의 고유한 자유를 구가하되 동시에 시스템과의 관계적 상상력을 잘 가동시키는 ‘겹 주체(double subject)’가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61쪽).” 폭력적인 집단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버거운 일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제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공통의 문제’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복수(複數)적 주체”(안토니오 네그리)의 탄생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61쪽).”
1부 세 번째 장은 ‘해서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의 경계’. 대한민국 사회의 성공 이데올로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성공학’이란 정체불명의 담론이 말하는 ‘성공’이 넓은 의미의 ‘훌륭한 삶’이 아니라 대부분 ‘출세’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94쪽).” “성공 이데올로기는 ‘훌륭한 삶’의 척도를 출세로 제한함으로써,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삶의 다양한 가치들을 배제한다(95쪽).” 문제는 이 성공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다중(多衆)의 삶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이다(95쪽).”
1부 네 번째 장은 ‘유쾌한 상대성을 위하여’. 계급 격차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지만 압축적인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에서 그 격차는 더욱 아픈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계급 격차는 당연하게도 권력의 격차로 나타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것은 ‘유쾌한 상대성’이다. “공동체가 탈(脫)권력화되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살아날 때, 평등하고도 효과적이며 평화로운 공동체가 생겨난다. 구성원 중 그 누구도 주변화되거나 억압되지 않은 상태, 그리하여 “유쾌한 상대성”(미하일 바흐친)이 최고조로 구현된 상태야말로 바람직한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137-138쪽).”
2부 첫 번째 장은 ‘사랑의 재발명’. “『존재와 사건』의 저자인 알랭 바디우는 ‘사건(event)’을, 잠재적인 것,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정의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현재’와의 근본적인 ‘결별’이며 “존재의 강밀도(强密度)를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164쪽).” 사랑이 사건이 될 때 우리는 감동을 느낀다. 하지만 타자를 환대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타자들은 나에게 ‘우연히’온다. 타자의 가까이 옴. 이 ‘근접성’이 바로 타자에 대한 책임성을 생산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것은 “사로잡히는 책임, 사로잡힘의 책임”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능동적 지배가 아니라, 타자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 엎드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사랑은 궁극적으로 감성이 아니라 의지이고 고통이다(174쪽).” 하지만 이 어려운 일을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된다. “누가 뭐래도 사랑이 진리이다. 모든 예술과 과학과 정치는 사랑에 복종해야 한다(166쪽).”
2부 두 번째 장은 ‘잘 살 권리와 사회적 사랑’. 사랑에는 여러 층위가 있지만 오민석이 『경계에서의 글쓰기』에서 강조하는 사랑은 사회적 사랑이다. 우리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사회적 사랑이 아닐까 싶다. 최근 몇 년간 여러 가지 잘못된 이념과 행태들에 대한 논의가 대한민국에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금이 사회적 사랑이 싹트는 ‘즈음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수많은 시간의 단위들이 있지만 가장 새롭고 기대로 가득찬 시간은 ‘즈음’의 시간이다(215쪽).” “‘즈음’은 알 수 없는 희망과 꿈과 다른 미래의 시간이다.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나는 지혜의 상징, 미네르바의 부엉이도 황혼 어스름, 즉 ‘즈음’의 시간에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즈음’이 아닌 시간은 없다. 모든 시간은 현재를 뒤로 밀어내며 미래를 앞으로 끌어당기는 어느 ‘즈음’에 있다. 그러니 아무 때나 가슴 저리는 것, 죄는 아니다(216쪽).”
2부 세 번째 장은 ‘내가 밥 딜런을 좋아하는 이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를 우리는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일이 실현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든 현재는 과거의 유토피아였다. 가령 노예제사회에서 볼 때 근대 시민사회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시간을 통해 성취되었다(232쪽).” “이런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유토피아가 실현되어온 역사이고, 사라진 역사다(232쪽).” 오민석은 다시 한 번 관계를 강조한다. 관계가 없다면 공동체의 발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체의 완성은 오로지 환대에 기초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유토피아의 힘이다(234쪽).”
『경계에서의 글쓰기』에서 끊임없이 경계 바깥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스승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에드위드 사이드가 강조한 “경계 너머로 자신을 계속 추방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7쪽)”이고 그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리라. 오민석이 관계를 통한 사회적 사랑을 강조한 이유는 다음의 문장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경계 너머로 자신을 계속 추방하는 것의 최종 목표가 고독한 수도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계를 넘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경계가 마주치는 공간에 다다른다. 그곳이야말로 언어와 생각이 섞이는 곳이고, 사상과 실천이 맞부딪치는 곳이다(7쪽).”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삶을 멈출 수 없다. “세상은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기도(11쪽)”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