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실존을 탐구하는 존재로서의 소설가

이승우.『소설가의 귓속말』.

by 노창희

이승우가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불리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작가의 작가라 불리었던 제임스 설터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이 많이 읽히기 바랐다고 알려져 있다. 글을 써서 어딘가 외부로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설터의 욕구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작가, 소설가들의 소설가와 같은 명칭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은 두 가지로 보인다. 우선 훌륭한 작가여야 한다. 두 번째 아주 많이 읽히지 않은 작가여야 한다. 나는 당연히도 첫 번째 이유에서 이승우가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괄호치고’ 보는 태도를 지향하는 소설을 좋아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냐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가가 이승우이다. 그래서 나는 이승우의 소설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읽히기를 바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승우가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불린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은 복잡한 심경이 된다.


『소설가의 귓속말』은 소설가 이승우가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관한 에세이다. 에세이라기 보다는 이승우의 소설론에 가깝다. 소설이 다루는 것은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소설을 통해 다루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복잡해지고 알 수 없는 자(11쪽)”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진화하면서 “자연적 존재의 본능 대신 문화적 존재의 욕망을 택(11쪽)”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자가 되어 버렸다. 이 알 수 없는 자가 되어 버린 인간이 누구인지를 묻는 자가 바로 소설가다.


“소설이 묻고 탐구하는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실존이다. 즉 종(種)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 놓인 개별자의 순간의 선택에 주목하는 것이 소설이다(160쪽).” 좋은 소설은 어찌하는 것이 옳다는 당위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수긍하게 만든다. 창작의 영역뿐 아니라 독서의 영역에서도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소설가는 독자가 쉽게 깨닫기 어려운 문제를 다룬다.

“소설가는 알고 있는 것을 쓰는가. 아니다. 알기를 원하는 것을 쓴다. 그가 알기를 원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17쪽).” 이미 여러 편의 좋은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진 주제를 다시 다루어야 하는 소설가는 알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미학적인 진보를 이루어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쿤데라는 부도덕하다고 지적한다. “밀란 쿤데라에 의하면, 작가의 윤리는 인식의 새로움과 관계되어 있다. 통속적이거나 외설스런 작품을 쓰는 작가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인식의 새로운 차원을 펼쳐 보이지 않는 작가가 부도덕하다. 그는 ‘커튼’이 쳐진 방 안에 대해서만 쓰는 소설을 문제삼는다. 늘 보던 방 안이 아니라 커튼 너머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가의 윤리라고 말한다(129쪽).”


‘알 수 없는 자’인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자가 바로 소설가인 것이다. 소설가가 작품을 쓰는 일이 어려운 일인 것은 알 수 없는 자인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새롭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장르는 예나 지금이나 소설이다. 『소설가의 귓속말』은 그 소설에 대해 다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소설을 계속 읽어 나가고자 하는 독자에게 소설을 쓰는 소설가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일은 긴요하다. 소설가가 쓴 소설론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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