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소설의 기술』.
근대가 합리성에 의해 구축된 체제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으로 요약되는 근대의 발전 이면에는 합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 세계 양 차 대전은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진화만으로는 인간의 역사가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의 도약은 사람들을 전문화된 분야의 동굴로 몰아넣었다. 지식이 진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세계와 자기 자신의 총체성을 잃어버렸고, 이리하여 후설의 제자인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망각’이라는, 거의 마술적이고도 멋있는 표현 속으로 함몰되었다(12쪽).”
쿤데라는 소설이 합리성 이면에 놓여 있는 존재의 망각을 극복하기 위한 매체로서 탄생했다고 말한다. 쿤데라는 그 출발점으로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를 꼽는다. “나에게 있어 근대의 창시자는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세르반테스이기도 한 것이다(13쪽).” 생각하는 인간을 강조하였던 데카르트가 합리성과 이성을 대변한다면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총체성을 재현하고자 했던 장르가 소설이었으며 근대소설의 출발점이 세르반테스라는 것이 쿤데라의 지적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과 과학이 인간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 사살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 망각된 존재를 찾아내려는 유럽의 위대한 예술이 세르반테스와 더불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것이다(13-14쪽).”
인간은 현재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현재에 매몰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보존할 수 없다. 소설은 현재에 매몰되어 있는 인간의 삶을 보존해 주는 역할을 한다. “소설은 근대의 시초부터 줄곧, 그리고 충실히 인간을 따라 다닌다. 후설이 서구 정신의 요체로 간주한 ‘앎에의 열정’이 이제 소설을 사로잡아 소설로 하여금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살피게 하고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켜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보존한다(14쪽).”
소설이 합리성 위에 구축되어 있는 다른 체제들과 비교할 때 갖는 변별성은 세계를 ‘애매성’으로 규정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삶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세르반테스처럼 세계를 애매성으로 이해하고 유일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가공의 자아를 구현해 내는 진실)들의 더미와 맞서야 한다는 것, 따라서 불확실함의 지혜를 유일한 확실성으로 지닌다는 것은 그에 못지않은 큰 힘을 요구한다(16-17쪽).”
소설이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삶이라는 것이 역사라는 것이 복잡하고 객관화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소설은 명제와도 같은 이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문학성을 획득한다. “인간 현상의 상대성과 애매성에 기초한 이 세계의 모델인 소설은 전체주의적 세계와는 양립할 수 없다(27쪽).”
복잡하고도 애매한 영역을 그것도 존재가 망각한 영역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쓰면서 한 번쯤은 되뇌게 될 다음의 문장을 작품으로 구현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부분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 소설은 부도덕한 소설이다.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인 것이다(15쪽).” 문제는 그 앎은 설명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그 앎은 작품에서 정확하게 묘사되어야 하는 영역이지만 정확하다고 상찬받는 작품들조차 왜 정확한지를 밝혀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성공한 글을 우리는 훌륭한 평론이라고 부른다.
‘복잡한 삶의 이면에 망각된 새로운 앎을 발견하는 것’이것이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해 내야만 하는 일이다. 소설가들이 해내야 하는 일은“‘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24쪽).”‘소설의 종언’이라는 풍문은 대한민국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다. 소설이 합리 이면에 놓여 있는 비합리를 포착하고 그리하여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매체라면 과연 소설의 종언을 얘기하는 것은 타당한 일일까? “소설의 존재 이유가 삶의 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간직하고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라면 오늘날 소설의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게 아닐까?(32-33쪽)”
소설의 역할을 우리에게 망각하게 만드는 것은 이 시끄러운 세상 때문이다. 가뜩이나 시끄러운 세상을 더욱 시끄럽게 만들려고 하는 시도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탈진실’, ‘가짜 뉴스’와 같은 말들이 횡횡하는 때에 소설은 과거보다 더욱 필요한 장르일지 모른다. “소설의 정신은 복잡함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독자들에게 “사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라고 말한다. 소설의 영원한 진실은 이것이지만, 묻기도 전에 존재하면서 물음 자체를 없애 버리는 단순하고 성급한 대답들의 시끄러움 때문에 점점 들리지 않는다(33-34쪽).”
쿤데라에 기대어 얘기해 보자면 소설은 세상을 단조롭게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 맞서는 매체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쩔 수 없이 단순하게 얘기되는 세계의 진보 방향과는 궤를 달리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만 소설이 우리의 시대정신과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과, 만일 소설이 아직 찾아지지 않은 것을 계속 찾아 나가고자 한다면, 소설이 소설로서 ‘진보’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세계의 진보에 역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을 것 같다(35쪽).” 이제 더이상 새로운 소설을 내놓지 않을 거장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은 소설이 대변하는 가치뿐이라는 말을 다시 확인하기 위함일 것이다. “나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