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세계’를 망각하지 않기 위한 문학의 자리

이현석. 「이전의 세계」.『문학동네』, 2020년 여름호

by 노창희

그 어느 영역 하나 현재의 재난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나 내가 연구하고 밥벌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미디어 분야 또한 코로나의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슬프게도 재난에도 이해득실은 존재한다. 이현석의 「이전의 세계」를 읽고 나니 지난 반년 정도 내가 코로나에 대해 한 고민은 대부분 내 밥벌이와 연관된 분야의 이해득실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기왕지사 얘기가 나왔으니 내가 얘기한 이해득실을 따져 보자면 이렇다. 전반적으로 미디어 이용량은 늘었다. 이것은 미디어 산업 측면에서 부정적일 수 없다. 하지만 극장, 공연과 같이 단위당 소비 규모가 큰 오프라인 영역들은 직격탄을 맞았고 가장 중요한 재원 중 하나인 광고는 경기침체로 나빠질 수밖에 없으니 미디어 분야 역시 수혜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영역보다 나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득을 보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해’만큼 시급한 것이 있을 수는 없겠으나 인간은 당위와 명분의 존재이다. 당위와 명분이 인간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해 주기도 하고 또 다른 이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광기 어린 집합적 행동으로 다시금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된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윤리적 요청은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재난의 책임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특정 집단의 광기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럼 다른 이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이행해 왔는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재난의 와중에 있다. 재난 이후의 삶을 헤아려 보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일은 재난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지금의 재난은 재난 이전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으며, 어쩌면 재난 이전에 저질렀던 과오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현석은 2년 전에 발표한 자신의 단편 「부태복」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다룬 바 있고, 이를 두고 주변에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을 예견한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고 언급한다. 이현석이 이 사실을 자랑하기 위해 위와 같은 상황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임상의학, 역학(疫學), 보건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지금의 상황은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자신이 발표한 소설과 그에 대한 반응을 얘기한 것이다. 이현석이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바는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어느 정도는 인재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코로나바이러스에 비하면 짧은 기간에 종료된 바이러스들을 겪은 인간사회는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지금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사태가 다시 위중해지기는 했으나 상대적으로 우리가 대처를 잘해온 것도 메르스 사태를 겪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간에게 지나온 경험을 성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한때는 세속화된 사회, 서구 물신주의, 세계화 등에서 원인을 찾았고, 위생과 청결에 관한 생정치학적 비판이 뒤를 이었으나 인구 집단을 특정하기 어려운 2020년 4월 현재의 대유형(pandemic)은 인류의 과오로 인해 인류가 위험에 빠졌다는 생태학적 성찰을 야기하는 모양새다(14쪽).”「이전의 세계」는 이 성찰의 역할을 문학이 수행해야 하며 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2017년 초에 발표되어 각각 두 작가의 작품집에 수록된 권여선의 「손톱」과 임솔아의 「병원」은 국내 의료 체계가 갖는 공공성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준다. 나 역시 두 작품을 읽은 바 있으며 충분히 설득된 바 있다. 두 작품이 가진 미학적 가치가 국내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에 국한되지 않으나 격차의 확대가 생존의 최전선인 의료 영역에 문제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만으로 두 작품은 충분한 인식적 가치를 획득한다. 물론 그러한 인식적 가치를 발생시키는 것과 두 작품이 가진 미학적 가치가 무관할 수 없다.


앞서 내가 내 밥벌이 얘기를 한 것은 문학 역시 미디어의 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용자의 이용량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의 문학은 입지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렇다면 문학은 과연 존재 가치가 없는 매체가 되어 버린 것일까? “우리의 문학은 ‘이전의 세계’끝에서 그 세계를 비판적으로 복기함으로써 ‘이후의 세계’를 상상할 여지를 만들고자 분투하고 있으며, ‘이전의 세계’를 문자로 기억하고 언어로 현존케 함으로써 이후에 도래할 세계에 기여하고 있다(17쪽).”


문학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이 다양한 방식으로 과거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 기능에 있어 문학만큼 적합한 매체 형식을 알지 못하며, 세월호 이후 문단의 움직임은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증 중 하나이다. 이 때문에 「이전의 세계」에서 이현석이 단호하게 견지하고 있는 문학의 역할론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다수가 ‘K’로 시작하는 고양된 자존감에 도취된 사이, 당장 2020년 4월 29일 현재까지 전국의 격리 병상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난 247명의 죽음부터 실시간으로 망각되고 있다. 숫자로 표기된 죽음에 슬픔은 가려지고 애도는 미뤄진다. 죽음에 육박하지 못한 이외의 사안들은 다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들은 그렇게 지금을 잊어간다(19쪽).”


이후의 세계에 우리는 지금의 이 재난이 초래한 끔찍한 결과를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 망각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매개 중 하나가 문학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며, 문학과 관련된 이들 역시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학과 관련된 조소와 조롱에 맞서 싸워야 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이전의 세계’를 기억하고 그 세계를 비판적으로 복기함으로써 온당한 이후를 맞이하려는 문학은 분명,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해 보인다. 그것이 비록 문학만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닐지라도, 언어와 문자로 가려진 부분을 조망하고 들추어내어 타인의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분명 문학이 가진 특별한 강점이므로(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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