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곡.『관종의 시대』.
“주체는 시대의 산물이고,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주체의 형태가 있다(14쪽).”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규정하는 주체가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주체로 살아가고 있는가? 김곡은 지난 시대의 주체를 ‘존재’로 규정하는 반면, 지금 시대에 사는 우리는 주체 자체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관종은 지난 세기의 주체와는 전혀 다른 주체다. 그는 아예 주체가 아니다. 주체는 최소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관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16쪽).” 그럼 존재는 무엇이 되었는가? 김곡에 따르면“오늘날 ‘존재’는 ‘관심’이라는 새로운 술어에 완전히 대체(7쪽)”되었다.
존재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사라진 것은 타자다. “관종의 시대는 타자 학살의 시대다. 관종은 그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8쪽).” 김곡은 『관종의 시대』에서 관종을 편집증적 상태에 빠진 존재라고 규정한다. 관종은 “존재와 관심을 맞바꾸는 데 어떤 저항도 못 느끼는 편집증적 상태다(29쪽).” 지난 시대에 주체가 존재로서 수치심을 느끼는 존재였다면 현시대의 관종은 수치심을 모른다는 것이 김곡의 진단이다. “관종은 편집증자로서 관심의 패러다임에 속한다. 그는 노출증자다. 그는 수치심을 모른다. 그가 먼저 반복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과시되고 전시되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27쪽).”
“존재의 세기는 적어도 분노의 시대였다. 이번 세기는 혐오의 시대다(83쪽).” 타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혐오’가 남는다. “혐오는 타자의 소거를 통한 관심의 전유다(30쪽).” 타인에 대한 혐오는 그를 통해 자아를 팽창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악플은 세계를 반사회적으로 폐기하고 자아를 낭만적으로 팽창시킨다(75쪽).” 혐오는 자아를 팽창시키는 반면 존재는 소거한다고 김곡은 얘기한다. “‘무시(無視)’의 뜻 그대로, 혐오는 존재를 없는 것으로 보고 또 없애려는 충동이다. 분노가 존재의 투쟁인 반면, 혐오는 “존재의 무화”다(84쪽).”
미디어 환경은 관심의 패러다임이 자리 잡는데 효율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물론, 미디어 환경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 미디어 환경을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 활용하는 것이 문제다. “그는 관심의 과잉 공급과 그로 인해 보장되는 가상적 정체성을 방해하는 모든 대상과 사회를 ‘차단(block)’한다. 언팔하고 친구삭제한다(185쪽).” 취향 공동체를 강화시켜 주는 데 최적화되어 가고 있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혐오와 정치적 분극화를 강화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의 세계는 취향에 따라 계정과 채널이 분류되며, 각각 안에서는 취향에 배반되지 않는 모든 말과 행동들이 허용된다(146쪽).”
김곡의 진단은 파격적이고 다소 극단적이다. 하지만 나는 『관종의 시대』에 적혀 있는 문장들에 자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관종의 시대에 다시금 타자를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 관종이다. 당신도 관종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관종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하나의 ‘증상’이다(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