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계속 쓴다는 것

장강명.『책, 이게 뭐라고』.

by 노창희

내가 처음으로 책이라는 것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20살 때였다. 재수를 거쳐 대충 성적에 맞춰 인문학부에 입학한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찾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국 작가들의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한다. 20대에는 좀 과장하면 한국 작가들이 쓴 소설만 읽었다. 김연수, 김영하, 김훈, 윤대녕, 은희경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대학원에 가고 사회인이 된 이후에는 책이라는 것을 다시 멀리하게 되었다. 책이 다시 너무도 읽고 싶어진 것은 회사에 다니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시기였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이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름대로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시기는 내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 시점들이었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였던 청소년기를 지나고 성인이 된 이후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위를 마치고 앞으로 나는 연구자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고민하던 시기에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 이게 뭐라고』는 소설가 장강명이 쓴 책에 관한 책이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읽고 쓰는 인간 장강명은 어떻게 말하는 인간이 되었는가에 관한 얘기이다. 말하는 인간 장강명은 여전히 읽고 쓰는 일을 더 중시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말하는 일을 병행해야 하다 보니 쓰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우울증까지 얻게 되었다.


책을 읽는 일부터 얘기해보자. 장강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문학(혹은 책)을 읽는 게 좋은 인간이 되는 일과 그리 겹친다고 보지 않는다(155쪽).” 장강명의 지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책을 읽는 일이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는 수많은 조건 중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독서를 많이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좋은 사람이 되는 일과 별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나는 왜 책 읽기 아니 ‘책’에 집착하는가?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인간보다는 책을 많이 사는 인간에 가깝다. 기다리던 책이 집으로 배송되어 그 책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할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낀다. 장강명은 책의 물성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은 독서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충분히 동의한다. 이것은 이성의 영역이다. 하지만 감성의 영역으로 가면 나는 책과 관련된 여러 가지 행위들을 모두 좋아하는 인간이다. 책을 검색하는 것, 책을 주문하는 것, 책을 읽는 것. 앞에 언급한 것 중에 제일 힘든 일은 역시 책을 읽는 것이다. 냉정히 자신을 돌아보면 책을 읽을 때 잠시나마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가 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것은 스노비즘에 가깝다. 실용성이나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한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럼 독서의 효용은 무엇인가? “나는 성실히 읽고 쓰는 사람은 이중 잣대를 버리면서 남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반성하는 인간, 공적인 인간이 된다고 생각한다(49쪽).” 장강명이 쓴 앞의 문장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말하기의 영역은 휘발성이 강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적 대화는 타인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반면,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은 누군가가 ‘공적’으로 발화하는 것이다. 그 공적인 발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공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제 쓴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쓰는 인간 장강명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응원하는 사람 중 하나다(개인적인 인연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작가 장강명의 소설가로서 직업정신과 성실함에 존경심을 느낀다. 장강명의 소설, 논픽션, 에세이를 모두 좋아한다. 사실 장강명이 추구하는 작품세계는 내게 익숙한 것이 아니다. 장강명은 “세계에 맞선다는 기분(192쪽)”으로 장편소설, 논픽션을 쓴다고 얘기한다. 나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작품보다는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는 소설들로 독서를 시작했다. 여전히 후자의 작품들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장강명이 추천한 인생의 책 중에 읽은 책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소설들이 더 필요하다는 장강명의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장강명이 쓴 책을 (공저를 제외하고) 거의 다 샀다(아마 다 샀지 않을까 싶다). 처음 읽은 책은 『한국이 싫어서』였고, 그 이후에 나온 책은 다 사고 거의 읽었다. 배송되어 온 책을 며칠 후면 잘 찾지도 못하는 내가 장강명의 책은 사는 즉시 읽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내가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 준다. 그리고 잘 읽힌다. 『책, 이게 뭐라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쓰는 인간이 어떻게 말하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얘기해보자. 장강명이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에 출연한 계기는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장강명 정도 되는 작가도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조금 서글퍼진다. 순수하게 읽고 쓰는 일로만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는 이제 생계유지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책을 말하기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특강을 하고 방송에 출연하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글을 쓰기 어렵다.


나는 언젠가부터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막연한 바람이었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확고 부당한 당위 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을 찾아 헤매면서 읽고 쓰는 일에 매달릴지 모른다. “마흔세 살 장강명은 매사가 무의미한 듯한 허무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그래서 나는 책에 집착한다. 읽고 쓸 때에는 아무것도 남지 못할 감각의 세계를 떠나 의미와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다(71쪽).” 읽고 쓰는 세계를 동경하거나 그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책, 이게 뭐라고』를 읽고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장강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읽고 쓰는 인간 장강명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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