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놓여 진 삶이 만들어낸 작가의 삶과 작품의 매혹

최민석. 『피츠제럴드 × 최민석』.

by 노창희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내가 ‘피츠제럴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하루키 때문이었다.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은 사람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고 나가사와가 와타나베한테 말할 때 나는 작가가 육성으로 나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으면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상실의 시대』를 읽고『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지만 기대에 한참 못 미쳤고, 스토리조차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교내 라디오에서 책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던 나는 마감에 쫓겨 『위대한 개츠비』편을 녹음해서 내 보냈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방송을 제작했던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던 2013년에 영화가 개봉되었고, 그 참에 김영하가 번역한 판본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었다. 나는 드디어 『위대한 개츠비』에 매료 되었다. 공황을 예언 했다거나 재즈시대 미국의 분위기를 잘 살려 냈다거나 같은 이유로 내가 『위대한 개츠비』에 매료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30대 초반의 나에게는 개츠비를 회상하는 닉의 처연한 시선에 강한 공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최민석의 말대로 나는 닉과 개츠비 둘 다에게 피츠제럴드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으로 넘쳐 나지만 그 욕망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는 것이 바로 30대이다. 개츠비와 닉이기도 하며, 피츠제럴드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다.


똑똑했지만 부유하지도 않았고 계급적으로 상층부에 있지도 않았던 개츠비는 프린스턴으로 진학하게 된다. 이것이 그의 불행의 출발점이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끊임없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성공을 열망한다. 지네브라 킹에게 가난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낙원의 이편』으로 성공을 거두고서야 젤다에게 받아들여 질 수 있었던 피츠제럴드에게 계급이라는 주제는 일생을 두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최민석은 피츠젤러드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피츠제럴드만이, 세상의 불편한 문제를 대담하게 문학적으로 대면했다. 그가 다룬 문학적 주제는 계급이다(14쪽).”


『피츠제럴드 × 최민석』은 작가 최민석이 작가 피츠제럴드의 삶과 작품을 다룬 보고서이자 에세이이다. 이 책이 보고서인 이유는 피츠제럴드의 삶과 작품에 대해 성실히 연구하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에세이인 이유는 최민석 특유의 글맛이 잘 살아있는 에세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 읽히지만 가벼운 책은 아니다. 프롤로그 「피츠제럴드와 나」에서 당시 생활고를 겪고 있던 최민석이 피츠제럴드의 암울했던 생의 후반부를 다루는 대목부터 나는 이 책에 끌리기 시작했다. “그때 성공한 줄로만 알았던 피츠제럴드의 생이 후반부에는 처절하게 추락했으며, 한때는 크래커와 통조림 고기로 버티며 에세이와 단편소설을 닥치는 대로 써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13쪽).”


글쓰는 작업이 혹독한 노동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이제 피츠제럴드와 같이 술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던 작가의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피츠제럴드를 소개해준 하루키와 피츠제럴드는 전혀 닮아 있지 않다. 좋은 글을 쓰려면 하루키와 같이 하루하루 자신의 루틴을 지키면서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못했던 피츠제럴드가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재주와 삶에 대한 비범한 인식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은 그 비범한 인식이 자신이 원했던 것을 성취하지 못했던 것에서 나오는 페이소스에서 온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죽은 후에 크게 성공한 『위대한 개츠비』와 그토록 성공을 갈망했지만 결국은 실패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피츠제럴드의 삶은 페이소스로 가득 찬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고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너무도 매혹적이다. 최민석은 『피츠제럴드 × 최민석』을 통해 그 매혹을 매력적으로 전해준다. 다음의 문단을 옮기며 마친다.

“피츠제럴드에 관한 책을 정리하며, 계급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가 고민하고, 괴로워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유효성은 1920년대와 2010년대라는 시간을 뛰어넘고, 미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을 뛰어넘는다. 피츠제럴드의 삶은 자기 욕망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경우지만, 사실 그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그를 따라가봤을 뿐인데, 과거 미국 사회의 맨얼굴뿐 아니라, 현재 우리 욕망의 이중적 얼굴도 들여다본 기분이 들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고민의 그림자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드리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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