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천.『사람에 대한 예의』.
대한민국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나라다. 물론, 대한민국만 이상한 나라인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공동체는 이상하다. 이상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비상식적인 일이 여전히 일어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처럼 역동적으로 이상한 나라는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사회적인 감수성이 빠르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가장 강렬한 감정이 ‘증오’라는 것이다. 그 증오를 부추기는 것은 사회적인 불안이다.
권석천은 『사람에 대한 예의』에서 “사회적인 감정(6쪽)”에 주목한다. 사회적인 변화가 빠른 대한민국에서 인간의 감정에 주목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저널리스트로서 한 사회에서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집합적인 감정인 사회적인 감정에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 저널리즘 현실에서 인간 자체에 주목하는 보도는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예의』 혹은 권석천이라는 저널리스트가 지향하는 태도 중에 가장 공감되는 부분은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16-17쪽).” 많은 갈등이 이 인식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발생한다. 나는, 우리는 절대 틀렸을 리 없다는 오만과 자기기만이 더 큰 증오와 더 큰 분열을 불러일으킨다. “늘 눈앞을 가로막는 적(敵)은 자기연민이다(323쪽).” 자기에 대한 연민보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지는 것이 사회적인 감정이 건강해지는 길이다. “우린 하얀 도화지 위에서 일하는 게 아니다. ‘복잡하게 나쁜 사람’인 내가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는 것이다(218쪽).” 부족한 우리가 같이 최악의 길을 피해 같이 가보자는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공유될 필요가 있다.
서로가 불완전하다는 인식 속에서 새로운 정의를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정의(定義)는 끊임없이 새롭게 정의(定意)되어야 한다(316-317쪽).” 법 논리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국민들이 사법부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법 논리가 국민의 감정을 정확히 대변하려고 노력할 때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경감되기 시작할 것이다. “법 논리와 법 감정은 서로 연결돼 있고, 함께 진화해야 한다. 법 감정은 앞서가는데 법 논리가 제자리걸음을 한다면 그 사회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법 논리는 어떻게든 법 감정을 설득해 편차를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318쪽).”
“정의는 늘 불완전하고 삐걱거리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숨 쉰다. 완전한 인간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향해야 하는 건 결과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정의다(320쪽).”이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 문학과 저널리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을 의심해보게 하는 것, 낯선 눈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문학이 지닌 힘(245쪽)”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다. “저널리즘도 결국 사람에 대한 예의를 묻고, 따지고, 주장하는 일(323쪽)”이라고 독자들이 느끼기 시작할 때 저널리즘에 대한 신뢰도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어려운 일이고 답도 없는 일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어렵고 나도 그 일에 미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적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