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석.『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나는 연말이면 동료들과 몇 권씩의 보고서를 마감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연구원이다. 학부 때는 문학을 공부했지만 대학원에 들어가 사회과학의 세계로 입문했다. 나는 여전히 사회과학의 언어가 문학보다 엄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과학과 문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확함을 추구한다. 또한, 사회과학이라고 해서 문학보다 따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에 주어진 텍스트보다 새로워야 하는 것은 사회과학이든 문학이든 마찬가지다. 이미 수없이 많은 훌륭한 텍스트가 쌓여 있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는 일은 항상 버겁다. 하지만 새롭기를 포기하는 글쓰기는 좋은 글쓰기가 될 수 없다.
오민석은 나에게 ‘문학이론’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가르쳐준 스승이다. 그의 수업을 듣고 문학이론의 세계에 매혹된 지도 20여 년이 되어 간다. 페이스북이라는 매체를 통해 스승이 여전히 현역으로서 시와 평론을 발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오랜 공백 끝에 문단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스승이 발표한 책들을 읽는 일처럼 마음에 위안이 되는 일은 드물었다. 개인적인 인연이 가지고 있는 ‘인력(引力)’이 내 마음속에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인의 글이라고 해서 모두 잘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오민석의 신간을 항상 기다리게 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물론 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중단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인간을 다룬다는 것은 문학이 존재하는 한 변하지 않는 사실일 것이다. 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인간의 몸이다. “나와 당신들은 이 ‘슬프고 약한 육체’로 세상을 견딘다(6쪽).” 몸이 있어야 정신이 가동될 수 있으며, 감염병으로 전세계가 신음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느 때 보다 몸의 소중함을 체감하고 있다.
“시는 몸의 떨림을 감각의 언어로 주워 담는다. 그리하여 내 문학과 문학 평론의 중심은 몸의 탐구에 있다.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처받음의 윤리’이다(6쪽).” ‘인간의 몸이 느끼는 고통을 다루는 것’ 그것은 문학이 외면할 수 없는 엄중한 과제일 것이다. 그 몸이 느끼는 고통은 단순히 물리적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차마 언어가 되기 어려운 것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문학이 가진 고유한 사명일 것이다.
상투적인 위로는 진정한 위로일 수 없다. 인간의 몸이 느끼는 개별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고통을 다루는 언어는 그래서 새로워야 한다. “글쓰기는 단순성이 만들어내는 거짓과 권태와 싸운다(4쪽).”『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의 「머리말」은 문학이 인간의 몸과 정신이 느끼는 고통을 새로운 언어로 번역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평론 앞에 실려 있는 제1부 ‘시와 문학에 대한 열다섯 개의 테제’가 있어 무척 반갑다. 은유에 대한 글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부터 읽는다. “은유를 ‘한다’는 것은 한 존재를 다른 존재로 전화시키는 일이며,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로 전이시키는 일(12쪽”이다. 은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투적인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은유는 죽은 일상에 가해지는 폭력의 언어이다(20쪽).”
“언어가 매혹의 주술을 잃을 때 권태가 몰려온다. 껍데기들의 연속체, 반복, 낭비된 시간, 거짓말, 가식의 웃음 혹은 눈물. 글쓰기는 이런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는 것이다(4쪽).” 좋은 문학은 우리를 권태로부터 탈출시킨다.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학과 평론은 세상의 뻔한 생각들, 개 같은 폭력들과 싸우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다. 내 안에 시가 있고, 평론이 있다. 나는 이것들을 껴안고 바닥을 긴다(7쪽).” 모두에게 힘든 겨울이고 나에게도 힘든 겨울이다. 그래도 스승의 글을 읽으며 작지만 소중한 위안을 느낀다. 올겨울은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를 아껴 읽으며 버텨야겠다. 봄은 올 테고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