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저버리는 ‘다가오는 것들’

황정은. 『연년세세』.

by 노창희

네이버 국어사전에 ‘연년세세(年年歲歲)’를 검색하면 “여러 해를 거듭하여 계속 이어짐”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성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년세세』는「파묘」, 「하고 싶은 말」, 「무명」, 「다가오는 것들」 이렇게 4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 연작소설이다.


“사는 동안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작가의 말」, 184쪽).”‘순자씨에게’로 시작되는 『연년세세』는 순자로 불리었던 이순일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순일이 왜 순자로 불리게 되었는지 나와 있는 「무명(無名)」에 대해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이순일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조부 밑에서 자라다가 고모를 따라 김포군 송정리로 간다. 이순일은 실질적으로 고모 가족에 의해 착취당한다. 고모의 대가족을 부양하고 고모가 시키는 일을 한다. “하루가 매우 번잡하면서도 고요하게 지나갔다. 얕은 그릇에 담긴 채 양달에 놓인 물처럼 시간이 증발해버렸다(119쪽).” 거기서 자신과 같이 순자로 불리는 친구를 만난다. 순자의 뜻은 무엇일까? “순할 순(順)에 놈 자(者)인가?(123쪽)”


이순일은 고모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한중언과 결혼한다. 한중언의 호적으로 본인을 입적 시키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이순일이라는 것을 안다. 드디어 본인의 이름을 찾은 것이다. 한중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보통의 한국남자다. 이순일은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 장녀인 한영진이 주인공처럼 보이는 「하고 싶은 말」에 대해 얘기해 보자.


한영진은 첫째 딸로 실질적으로 이순일의 역할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이불을 파는 한영진은 생활력이 강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실질적으로 가족의 가계를 책임지고 있다. “한영진은 가족을 담당했다(57쪽).” 김원상과 결혼한 이후에는 김원상의 집에 이순일과 한중언 부부가 들어와서 한영진의 두 아이와 가족 살림을 챙겨 줬다. 이순일은 고단한 삶을 계속 이어진다.


가장으로서 삶을 감당하던 한영진은 출산을 경험하면서 모성이라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벽에 간호사가 혼곤히 잠든 한영진을 깨워 수유실로 들여보낸 뒤 가슴에 아기를 안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73쪽).”(…)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73쪽).” 직접 묘사되지는 않으나 한영진은 출산을 겪으면서 이순일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한영진은 자신에게 가계를 책임지게 한 이순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끝내 하지 못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83쪽).” 이순일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너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어(84쪽).”

한세진은 둘째 딸이다. 한세진은 한영진과 달리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세진은 연극을 하고 있다. 바쁜 언니와 뉴질랜드에 가 있는 막내 남동생 한만수를 대신해 이순일의 친정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순일의 외조부 성묘에 동행한다. 「파묘」는 오르막을 올라 성묘를 갈 건강 상태가 아닌 이순일이 외조부의 묘를 파묘하는 얘기이다. 이순일은 한세진에게 살림을 물려받으라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짐을 덜고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의 일을 한세진에게 맡기려는 것 같다. 당연히 한세진은 거부한다. 성묘를 오기 싫어하는 한중언의 태도에서 가족 부양의 의무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 있는 한만수의 태도에서 이순일의 가족이 전통적인 한국적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만수의 무지에서 강화길의 「음복」에 나타난 남편의 무지가 떠올랐다.


한만수가 한국에 잠깐 귀국했을 때 한만수는 촛불집회를 접한다. 「파묘」에는 『디디의 우산』과 같이 촛불집회를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촛불집회를 대하는 한세진과 한만수의 시각 차이를 보여준다. 한만수는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며 한세진을 비판한다.


이처럼 앞으로도 가족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이들의 이해(利害)는 각기 갈린다. 그럼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함께해 나갈 것인가? 나는 미아 한센뢰베의 <다가오는 것들>을 좋아한다. 이 영화를 여러 번 봤다. <다가오는 것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탈리의 선택과 태도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것들」의 제목은 미아 한센뢰베의 <다가오는 것들>에서 따온 것 같다.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 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182쪽).”


<다가오는 것들>에서 나탈리는 다른 여자 때문에 자신을 떠난 남편으로 인해 맞은 인생의 위기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으로 극복한다. 읽고 쓰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 자신들의 이해에 매몰되어 있는 이순일의 가족에게는 기대를 저버리는 일들이 계속 발생할 것이다. 나탈리가 겪은 것처럼. 그럼 그들은 어떻게 남은 생을 감당할 것인가? 다가오는 것들이 좋은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인가? 황정은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182쪽).” 나는 다시 한번 또 이렇게 황정은에게 설득되고 만다. 「다가오는 것들」은 묘한 위안을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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