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임과 고독, 편집의 윤리: 은희경『빛의 과거』

#은희경 #빛의 과거 #편집의 윤리

by 노창희

2005년: ‘냉소’와 ‘순정’ 사이

내가 은희경을 직접 본 것은 두 번이다. 두 번째는『태연한 인생』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있었던 독자와의 만남 시간이었는데 <미드나잇 인 파리>를 작가와 독자가 같이 보고 작품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되었다.『태연한 인생』과 <미드나잇 인 파리>가 각각 2012년 출간되었고, 개봉되었으니 2012년이었을 것이다.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없다.

은희경을 처음으로 직접 본 것은 2005년 내가 다니고 있었던 학교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때였다. 내가 은희경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듣고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심상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이때였다. 강연자와 청중의 입장이었으므로 일방적으로 강연을 들은 것뿐이었지만 작품에 대한 신뢰에 더불어 자연인에 대한 신뢰도 형성되었고, 그 믿음은 그 이후 14년간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 출간된『빛의 과거』를 읽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추천사에 있는 신형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번에도 이변은 없었다. 다시 한 번 신형철의 표현을 빌리면 은희경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은 뉴스가 되지만 ‘좋다’는 사실은 뉴스가 될 수 없다.

2005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희경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냉소’였다. 그녀를 직접 보기 전까지 나는 당연하게도 은희경이라는 작가에 대해 냉소라는 단어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직접 본 그녀의 모습은 냉소와 위악과 같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고, 오히려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이때 들은 것인지 팟캐스트에서 들은 것인지 내 기억을 정확히 신뢰할 수 없는데, 아마도 이때 처음 들었다고 기억되는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의 소설을 읽고 혼자 외롭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가정도 꾸리고 그렇게 정상적으로 잘살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항의를 독자로부터 받았다는 것. 물론, 이 에피소드의 줄거리에 대한 내 기억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순정’이었다. 본인은 냉소적인 작품을 써 왔지만 ‘냉소’보다는 ‘순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 내가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강연이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14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여 정리해 보면 이렇다. 당시의 나는 인생에 대해 냉소와 순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내가 읽었던 은희경의 작품들은 냉소라는 관점에서 인생에 대해 거리를 두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실제로 만난 은희경은 순정이라는 가치에 빛을 던져 주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삶은 냉소와 순정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제서야 조금씩 알기 시작했던 것이리라. 은희경의 소설들은 20대의 내 삶에서 일종의 지침서였다. 이 역시 일정 부분 포장된 기억일 수밖에 없을 터.

돌이켜 보면 냉소와 순정 사이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다른 버전으로 인생에 대한 은희경이 내게 준 가르침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형중이 2005년 발표한 은희경론의 제목이 ‘냉정과 열정 사이’였다. 냉소와 순정 사이이든 냉정과 열정 사이이든 균형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균형감각이 물리적으로 절반씩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은희경의 소설이 가르쳐 준 것이니 내 20대에 은희경이 준 가르침은 실로 막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여기에는 왜곡되고 과장된 내 편집술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식의 영역이라 나조차 어찌할 수 없다.


1977년에서 2017년까지: 섞임과 고독 그리고 오해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9쪽).”라는 첫 문장은 이 소설을 다 읽고 다시 그 문장에 대해 곱씹어 생각해 보는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시사적이다. 가장 오래된 친구는 보통 가장 친한 친구가 될 가능성을 높이기 마련인데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밝히고 소설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짐작이 가능한 것처럼 서술자인 김유경과 서술의 대상이 되는 김희진은 오래된 친구이긴 하나 마냥 가깝기만 한 사이는 아니다. 『빛의 과거』는 김유경과 김희진이 서로 공유한 과거를 어떻게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지에 관한 소설이다. 이 서사는 개인의 기억과 소설 그리고 매체의 본질적 성격이 결국 소스로 주어진 기억이나 정보를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한 김유경에게 기숙사라는 공간은 완전히 이질적인 타인과 섞이는 공간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문장 “군대의 비극은 섞인다는 것(25쪽)”을 인용하면서 김유경은 타인과 섞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얘기한다. 김유경의 입장에서 서술된 기숙사의 인물들은 당연하게도 개별적으로 다르고 그 다름에는 비극적인 요소마저 들어 있다. “개별적인 ‘다름’은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다름은 개인성의 독립이지만 섞임이 그 종합은 아니기 때문이다(28쪽).” 섞임이 종합이 아니기에 각자의 고독은 그대로 존중되지 않는다. 기숙사에서 함께하는 기숙생들은 이해하기보다는 오해하는 방식으로 함께 한다.

이 소설은 김유경의 과거에 대한 서술과 소설가인 김희진의 자전적인 소설『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에 담겨 있는 기억이 대결하는 양상으로 펼쳐진다. 분량으로 보면 서술자인 김유경의 기억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가 김희진 입장에서 편집된 1977년이라면 『빛의 과거』에 담겨 있는 김유경의 서술은 김유경의 입장에서 편집된 1977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서사는 경합한다. “그녀는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늘 남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은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거나 우월감에 취한 게 아니라 단지 남에게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일 수도 있다(194).”와 같은 문장은 김희진의 기억에 대한 김유경의 항변이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김유경의 편을 들게 되지만, 어쩔 수 없이 김유경의 관점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된다.

김유경이 기숙사에서 나오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진 김유경과 김희진은 김유경이 직장에서 다시 만나면서 관계가 이어지게 된다. 김희진이 직장 내의 스캔들로 회사를 그만두고 난 이후에도 종종 연락하는 사이로 지낸다. 김유경은 김희진을 자신과의 관계에서 항상 우위를 점해야 만족하는 캐릭터로 그린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황을 왜곡하고 그에 맞춰 자의적인 논리를 갖다 붙이곤 하는데 스스로가 거기에 기꺼이 설득되었기 때문에 죄책감 같은 건 남기지 않았다(275쪽).” 그런데 과연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김희진일 뿐일가? 김유경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연루되어 있는 결과를 자신에 유리하게 편집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빠질 수 있는 손쉬운 편집의 유혹이 아닐까?

2019년: 편집의 윤리에 관하여

타인과 함께 공유한 공간 속에서 섞이기가 어려운 만큼 타인과 공유한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시간은 타인과 공유한 것이라는 점에서 내 마음대로 없앨 수도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타인과 함께 한 것인 이상 과거에 대한 저작권은 나 혼자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편집된 기억만을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여러 사람과 공유한 시간이므로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18쪽).”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를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되, 그렇게 편집된 과거를 진짜 내 모습이라고 온전히 수긍하고 긍정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이 소설이 환기하는 것이 편집의 윤리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편집된 과거의 기억이 옳다고 타인을 설득하기는 어렵다. 쉽지는 않겠지만 각자의 기억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오히려 과거를 보다 더 잘 긍정하는 길일 수 있겠다. “우리 둘 중 누구의 기억이 틀린 것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라는 말처럼(337쪽).” 이 소설이 과거에 빛을 던지는 방식은 나와 다른 타인의 기억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끝내 만져보지 못할 빛(339쪽)”이라도 과거가 빛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기억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상투적인 교훈처럼 들리지 않고, 지나간 청춘을 되돌아보는 이의 회한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미학적 완성도 때문일 것이다.

‘편집’이라고 하는 것에도 윤리가 존재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수없이 많은 정보가 떠돌아다니는 시대가 되었고, 진실은 오히려 규명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자신이 이미 뱉어 놓은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내놓는 것도 어렵지 않은 매체 환경이 구축되어 있다. 무수한 정보와 말이 떠돌아 다니는 매체 환경에서 유념하게 할 것은 인간의 기억, 매체의 본질은 과거와 현재 주어진 정보를 편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어진 과거와 정보를 편집하여 내놓은 것이 매체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렇다면 편집될 수밖에 없으므로 어느 정도의 왜곡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편집으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할 때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2019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매우 혼란스럽다. 그 혼란의 중심에 같은 사실을 두고 갈등을 벌이는 편집술이라는 것이 놓여 있다. 이미 존재하는 과거와 그 과거와 관련된 정보를 두고 벌어지는 이 편집의 싸움에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낄 지경이다. 김유경은 김희진의 기억이 자신의 기억과 다를 수도 있음을 깨닫는데 4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언론을 통해 정보를 접하는 일반 독자는 팩트의 진위를 확인하는데 4분을 할애하기도 어렵다. 편집의 윤리가 필요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내 입장에서 정보를 편집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게 편집되어 세상에 돌아다닐 말은 회수하기 어렵다. 꼭 언론이 아니더라도 말이라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유통되기 쉬운 매체 환경에서 누구라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편집의 윤리일 것이다. 그저 재밌게만 읽어도 충분히 많은 것을 주는 독서의 즐거움과 더불어 소설과 매체의 본질적 속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해주는 소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은희경의 소설이라면 내게는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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