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청년’이 필요한 이유

김선기.『청년팔이 사회』.

by 노창희

몇 달 전 통신비 지원 대상이 16세에서 34세와 65세 이상으로 확정되었다. 구체적인 이유를 학인해 보지 않았으나 여기에서 정부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청년층을 16세에서 34세로 고령층을 65세 이상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을 사회적인 도움이 필요한 취약계층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16세에서 34세가 청년세대인가? “‘청년’이라는 기표는 모호하다(282쪽).”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청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김선기의 『청년팔이 사회』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아니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되묻는 책이다. 문제는‘청년’이라는 사회 범주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는 것이 청년이 아니라 청년 담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유하고자 하는 기성세대라는 것이다. 물론, 기성세대라는 정의도 명확하게 구체화하기는 어렵다.


1990년대 신세대에 관한 논의에서 출발한 청년 담론은 현재의 N포세대까지 흘러왔다. 문제는 여기에서 청년이 주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이 패배하면 20대가 투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된다. 보호하고 지원해 주어야 할 대상이 되면 무엇을 왜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의지박약한 주체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시대공통의 편견이기는 하지만 버릇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단골 메뉴에서 빠지기 어렵다. “‘청년세대’ 담론은 젊은 층 인구를 ‘청소년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이는 결국 청년들을 타자화하게 된다(9쪽).”


김선기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국가를 ‘상상된 공동체’로 본 것처럼 ‘청년’이라는 사회적 범주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본다. 문제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구성된 기표가 각기 다른 사회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전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각 집단의 첨예한 이해가 반영되어있는 “복지 문제나 경제 문제에 관한 각자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120쪽).” 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 범주는 권력이 지배를 행사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행위자들 간의 전략적 게임 및 통치 권력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는 투쟁의 장소다(154-155쪽).” 문제는 흔히 청년으로 호명되는 20대를 전후로 한 세대들이 이 권력에서 아래쪽에 있다는 것이다. 청년 문제를 사회적 쟁점화하는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강한 발언권을 가진 것은 기성세대다. “지금의 청년 담론은 기성세대가 주조하고 소비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다(229쪽).”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집단적 실체로서의 세대가 실재하는 여부가 아니라, 세대 개념이 일상화된 현실 자체다(237쪽).” 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대주의를 보다 정교하게 다루는 것이다. 청년들이 왜 편의적으로 호출되고 있는지 그것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보다 세심하게 들여 다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성의 ‘청년’담론을 넘어 새로운 ‘청년’담론을 조직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탈-청년’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청년팔이 사회’를 극복하는 길이다(289쪽).”


청년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탈-청년’을 생각해 볼 것은 제안하는 김선기의 『청년팔이 사회』는 청년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익할 것이다. “과거의 규범을 따라 청년기의 생애 과업을 결정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준을 발명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216쪽).” 앞의 문장이 갖는 유효기간은 아마도 영원한 현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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