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가치와 정치적 의견표명의 공존은 가능한가?

신형철.「시적 시민성의 범주론」.『창작과 비평』.

by 노창희

1. 다시 소환되는 의문이 아닌 언제나 존재해야 할 의문


문학 특히, 시와 관련된 평단에서“미학적 아름다움과 정치적 의견표명이 공존하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가장 뜨겁게 제기되었던 것은 2010년대 전후이다. 왜 이 질문을 다시 소환하느냐고 묻는다면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미학적으로 아름다우면서 정치적으로 훌륭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일은 모든 예술작품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경지이다. 이 글의 목적은 문학 텍스트의 논의를 영상 서사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하나의 조건이 더 필요하다. 미학적으로 아름다우면서 정치적으로 훌륭한 메시지를 담아냄과 동시에 오락적인 가치를 지니는 영상 서사는 과연 가능한가라는 것이 이 글이 검토하고자 하는 의문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가능하지만 어렵고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가 많은 의문이다. 아니 과제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의문이다.


나는 위의 단락에서 가능하다고 한 두가지 답변 중 한 가지도 얘기하지 않았다. 답변을 유보하는 이유는 다음의 글을 소개하기 위해서다. 바로 신형철이 『창작과 비평』 2021년 봄호에 게재한 「시적 시민성의 범주론」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이 신형철의 글이다. 어설프게 설명하기보다 다음의 문장을 인용해 본다. “아직은 막연한 대로 이를 ‘시적 시민성의 범주’라고 명명해보려 한다. 2010년 초반의 ‘시와 정치’를 주제로 한 논의에서 “시인과 시민 간 연결의 결여 자체를 더 사유했어야 했다”라는 지적은 옳기 때문에 그 ‘연결’작업을 계속해야 한다(344쪽).”


위의 문장은 같은 지면에 11년 전에 신형철이 발표한 「가능한 불가능」과 연장 선상에 있다. 두 글의 차이를 논의하는 것은 이 글의 취지와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나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이제 첫 번째 답변을 하자면 텍스트에서 미학과 정치의 공존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은 11년 전에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전통예술이건 대중문화이건 간에 텍스트가 생산되는 한에서는 언제든 고민을 해야 하는 주제라는 것이다.


“자명했던 모든 개념들에 빗금을 쳐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일수록, 그러니까 자명한 규칙 아래로 개별 사례를 흡수하는 ‘규정적 판단’이 아니라 개별 사례에서 규칙을 도출해야 하는 ‘반성적 판단’이 필요한 시대일수록, 존재를 건 물음의 가치는 귀해 진다(357쪽).” 정치적 상황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피하고 싶지만, 지금의 정치적 현실은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기인 것 만큼은 분명하다. 위에 인용했던 것처럼 지금은 “자명했던 모든 개념들에 빗금을 쳐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이기 대문에 텍스트가 가진 미학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 그리고 오락적 기능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가진 중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2. <기생충>의 정치적 의미


<기생충>은 미학적 가치와 정치적인 메시지 그리고 오락적인 재미까지 갖춘 영상서사에 있어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 만하다. 모범적인 사례라고 해서 <기생충>을 어떤 전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생충>을 사례로 든 이유는 영상서사에서 미학적 가치, 정치적인 메시지, 오락적인 재미까지 갖추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봉준호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든 <기생충>은 계급의 문제를 다룬다. 기생충은 지상에 사는 갑과 지하에 사는 을의 갈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반지하와 지하에 사는 을과 병의 갈등을 다룬다. <기생충>이 문제적인 것은 병과 을의 갈등으로 인해 갑이 중대한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동익(이선균 분)이 죽었다고 해서 동익의 가족 전체가 파멸의 길을 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하지만 중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문제는 기택(송강호 분)이 선택한 방법은 혁명이 아니라 테러였다는 것이다. 테러는 타격을 줄 수 있을 지언정 자신이 놓여 있는 사회적 위치를 바꾸지는 못한다. 결국 기택은 다시는 사회적 존재로 복원되기 어려운 위치로 전락한 채 숨어 사는 길을 택한다.


<기생충>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공간의 점유권으로 상징되는(사실, 공간에 대한 점유권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단순히 상징적 일 수만은 없는 문제다.) 계급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다. <기생충>은‘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사회적 구조가 지속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에 대해 미학적 가치가 있다 없다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듯하다.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작품에 대해 오락적 가치를 운운하는 일 역시 그렇다.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했으니 <기생충>이 내가 얘기한 세 가지 조건 즉, 미학적 가치, 정치적 메시지, 오락적 가치를 모두 충족시키는 작품이라는 것에는 더 이상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 하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또 다른 <기생충>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메시지가 담긴 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중성을 갖춘 작품이다.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3. <기생충>이 가지 않은 길과 영상서사가 지향해야 할 가치


<기생충>은 회의주의적인 텍스트다. 우리는 기우(최우식 분)가 기택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기생충>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서사가 아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냉혹하게 환기하는 서사이고, 이 자체로 훌륭한 정치적 메시지라고 앞서 말했다.


<기생충>이 좋은 작품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기생충>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면서 미학적이고 재밌는 영상서사는 가능할 것인가? 당대의 영상서사가 추구해야 할 대안적 정치성 혹은 정치적 대안은 무엇이 가능할까? 이 글은 이것이 무엇일지 신형철의 글에 기대에 묻는 것에 그치고자 한다.


아도르노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고 불리는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답게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했다(마틴 제이.『변증법적 상상력』. 파주: 동녘, 노명우 옮김, 513쪽 재인용). 아도르노의 문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을 것으나 앞서 인용한 문장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서사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대적 상황에 맞는 정치적 지향성을 담아 내는 일은 문학을 포함한 모든 텍스트가 한 번쯤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는 중대한 과제다.


2010년대를 전후로 시와 정치에 관한 평단의 지향성은“시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면서 미학적 퇴행을 견제하려 했다(342쪽).”「시적 시민성의 범주론」에서 신형철이 하고자 한 일은 “시민성을 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의미까지는 아니고, 시가 시민성을 사유할 수 있는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미적인) 범주를 만들어보자는(365쪽)” 것이었다.


신형철은 백낙청(백낙청, 「시민문학론」(1969),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인간 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이 시민의식의 동의어로 제시한 ‘사랑’을 언급하면서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무엇일지 묻고는 글을 마친다. 신형철의 글 역시 시론(試論) 이상의 성격을 가지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필자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의문의 난해성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이 정도의 시론이나마 제기한 것은 신형철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필요한 가치는 복수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무엇을 지해야해야 하며, 이것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지, 거기다가 어떻게 오락성을 가미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은 앞으로 계속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의문을 회피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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