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더 랍스터>, <킬링 디어>
이번 주에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연출한
<더 랍스터>와 <킬링 디어>를 봤다.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5월이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어디까지 해야 도리를 다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더 랍스터>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라는 것이
과연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콜린 파렐이 분한 데이비드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될 수밖에 없는 호텔로 간다.
이 영화의 제목이 ‘더 랍스터’인 이유는
특정 기간 내에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하는데,
데이비드가 선택한 동물이 랍스터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척하다가 탈출한다.
호텔 맞은편에 있는 것은 사랑을 해서는 안되는 숲.
데이비드는 숲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이로 인해 데이비드가 사랑하는 사람은 끔찍한 처벌을 받게 된다.
인류는 자연 맞은편에 놓여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며
진화해 온 존재다. 그로 인해 문화에 발목이 잡힌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인간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일까?
<더 랍스터>는 인간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관행과 제도들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인 지 묻는다.
<킬링 디어>의 원제는 ‘The killing of a sacred deer’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수사슴을 죽이면서 일어나는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성스러운 사슴을 죽였으므로
누군가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신화와 영화가 갖는 공통점이다.
콜린 파렐이 분한 스티븐은 음주를 하고 수술을 하다가
환자가 죽게 된다. 영화만 보고는 환자의 죽음이 스티븐의 책임인지
마취과 전문인 그의 동료 책임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영화에서는 서로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죽은 환자의 아들인 마틴(배리 케오간 분)이
스티븐에게 접근하면서부터 발생한다.
마틴의 행동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네가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네가 나의 아버지가 되던지
우리 아버지 대신 죽을 희생양을 찾아 죽이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랍스터>와 <킬링 디어> 모두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을 가지고 있다.
<킬링 디어>에서는 마틴의 초월적 능력이 그렇다.
결국 스티븐은 가족 중의 하나를 희생양으로 만든다.
법적인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더라도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를 저지르면서 사는 존재다.
책임이 명백하지 않거나 자신이 한지도 모르는 죄들도 있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희생양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끔찍한 일인데, <킬링 디어>는
그러한 끔찍함을 다루고 있다.
가정의 달도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과도한 책임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 나에게나 다른 가족에게나
최선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