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라는 족쇄와 공간이라는 매혹

테일러 쉐리던 <윈드 리버>,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

by 노창희

이번 주에 본 영화는 당대 가장 뛰어난 각본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테일러 쉐리던이 연출한

<윈드 리버>와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테일러 쉐리던 감독이 각본을 쓴 작품 중

처음 본 작품은 <로스트 인 더스트>였다.

어찌 보면 밋밋한 영화지만

황량한 사막에서 펼쳐지는

두 형제의 은행털이 얘기에 나도 모르게

몰입되었던 영화다.


테일러 쉐리던 감독이 연출한 영화들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다.

<로스트 인 더스트>에 등장하는 형제들의 은행털이는

사법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당연히 엄청난 범죄지만

자본주의로 인해 상실된 것들에 대한 복수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고 보기 어렵다.


텍사스의 유전지대를 배경으로 삼았던 <로스트 인 더스트>와

마찬가지로 <윈드 리버>는 와이오밍에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윈드 리버>에서 발생하는 인디언 살인사건이라는 비극은

결국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와이오밍이 가지고 있는

공간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족쇄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고향에서 탈출하지 못한 이들은

고향을 원망하면서 살아가고 고향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난 이들은 고향을 변화시킨 것들을 원망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거대한 시대적 변화 앞에서 경계에 내몰린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노매드랜드>와 <힐빌리의 노래> 역시

고향이라는 족쇄가 한 개인에게 얼마나 잔혹한

비극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향이라는 족쇄가 개인에게 비극으로 작용하다면

공간이라는 메타포는 서사적으로 굉장히 매혹적이다.

테일러 쉐리던이라는 이야기꾼은 공간이 가지고 있는

사회구조적 모순을 사막과 설원이라는 배경을 활용해서

처연하게 보여준다.

사막과 설원은 시간이 앗아가 버린 것들 앞에서

남겨진 쓸쓸한 자연이다.

자연을 변화시킨 인류의 진화는 비가역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나는 테일러 쉐리던 감독이 <로스트 인 더스트>와 <윈드 리버> 같은

작품을 계속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로스트 인 더스트>와 <윈드 리버>가

우회적으로 사회구조를 비판한다면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은 회계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범죄로 시작한다.

그럭저럭 재밌게 봤지만

자신의 실수로 아이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소방관이 아이를 구한다는 설정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테일러 쉐리던 감독의 전작들과 결이 많이 다르게 느껴져서 아쉬웠다.

나는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강남 한복판에서

자랐고, 그래서 강남이라는 공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그곳을 향해 출근하기는 하지만.

하지만 강남을 다룬 서사들에는 매혹을 느낀다.

고향이라는 족쇄가 서사로 만들어지는 건

창작자나 수용자 입장에서 승화의 효과를 갖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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