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을 담아낸 서늘한 비장미

케이트 쇼트랜드 <블랙 위도우>

by 노창희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하 엔드게임>이 장대한 서사의 끝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엔드게임>은 하나의 쉼표에 불과했음을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그다지 오랜 시차를 두지 않고 증명했다. 마블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뿐 더러 마블의 영리하기 그지없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마블이 만들어 놓은 성좌를 기다리는 수많은 팬들의 대열에 아주 뒤늦게 합류했다. 마블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이용자를 포획하는 효과가 있다. 처음부터 마블 유니버스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뒤늦게 마블의 세계에 동참한 이들도 결국 앞의 서사들을 챙겨 보게끔 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관객들에게 엄청난 기회비용을 유발하는 셈이고,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이 유니버스를 구축하기 위해 디즈니 역시 어마어마한 기회비용을 쏟아부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블랙 위도우>에 대한 기대치는 별로 높지 않았고, 코로나 상황도 좋지 않은데 예매 취소를 해야 하나 고민 끝에 그래도 가서 보기로 했다. 초반 30분만으로 영화는 이미 나의 기대치를 한참 넘어섰다(물론 초반 30분이 가장 좋았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스칼렛 요한슨이 분한 블랙 위도우라는 영화 역사상 손에 꼽히는 여성 히어로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배치된 작품이니 젠더 감수성이 영화를 보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지 않기는 어렵다. 하지만 <블랙위도우>가 담아내고 있는 중요한 시대적 화두는 바로 가스라이팅이다(이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힌다).


필자에게 그런 능력도 없거니와 <블랙 위도우>를 보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블랙 위도우 나타샤가 어벤져스의 일원이라는 것 그리고 현재 어벤져스 간에 불화가 있다는 것 정도다. <엔드게임>에서 블랙 위도우가 죽었다는 사실 정도도 알기는 알아야겠다(물론, 다른 마블의 작품만큼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너무 큰 부담을 가지고 볼 필요는 없다는 말이고, 독립된 서사로도 충분히 감상할 만한 작품이라는 얘기다). 영화는 가족의 단란한 풍경으로 시작한다. 이때부터 레이첼 와이즈라는 당대 가장 뛰어난 여성 연기자 중 한 명이 등장한다. <블랙 위도우>에 등장하는 세 명의 훌륭한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 플로렌스 퓨, 레이첼 와이즈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감상할 이유는 충분하다.

나타샤가 러시아 공작원의 딸이라는 배경에서부터 <블랙 위도우>는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냉전이라는 역사적 배경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심리를 조종하려는 시도들이 자행되어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 대결의 과정에서 심해졌던 엄숙주의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문제는 이제 다른 방식의 심리조작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스라이팅이 중요한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더불어 데이터 기반 맞춤형 서비스로 인해 내 취향이 추천 시스템에 영향을 받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은 인간의 고유한 주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해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 분)는 위도우들을 심리적으로 조작해서 세계를 배후에서 조정하려고 하는데, 심리조작 된 상태를 바로 잡는 해독제 때문에 위협을 느낀다. 쫓기고 있던 나타샤는 우연히 이 해독제의 존재를 알게 되고 어릴 적 헤어졌던 옐레나(플로렌스 뷰 분)를 만난다. 드레이코프에게 버려져 있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아버지 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 분)을 탈출시키고 어머니 멜리나(레이첼 와이즈 분)를 찾아가 드레이코프가 있는 레드룸을 찾아가 공격한다는 것이 서사의 얼개다. 드레이코프를 찾아가는 목적은 복수와 드레이코프에 의해 가스라이팅 당한 위도우들에게 해독제를 주는 것이다. 레드룸을 찾아간 이후에는 스포일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이지만 보는 재미가 쏠쏠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블랙 위도우>를 압도하는 정서는 서늘한 비장미다. 그것은 나타샤가 가진 개인 이력,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와 연출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아우라다. 이 비장미만으로 두 시간 반을 채워갈 수는 없다. 레드 가디언과 플로렌스 퓨가 주도하는 유머도 <블랙 위도우>를 지탱하는 주요한 축이다. <블랙 위도우>는 관객을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않고 많이 늘어지지도 않는다.


오락 영화가 반드시 시대정신을 구현할 필요는 없다. 어떤 관객에게는 의미를 부여하는 오락 영화 자체가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마블이 구축한 유니버스는 다른 오락 영화와는 달라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또, 이제까지 마블이 구축한 세계를 탐험하느라 많은 기회비용을 감내한 이용자들은 단순한 재미 이상의 무엇을 기대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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