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종 피산다나쿤 <랑종>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황해>를 무척 좋아한다. 두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드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어차피 저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저기까지 가야만 했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대상은 등장인물들이 아니라 창작자라는 조물주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지한 존재다. 인간이 서사에 매혹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이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되는 길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창작품으로 제한된다. 용한 무당이 앞길을 정확히 예지해 주지 않는 한 인간은 다가올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이 종교를 믿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곡성>과 <황해>를 몇 차례씩 본 입장에서 나홍진이라는 잔인한 조물주는 어떻게 모두가 파멸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에 천착하는 작가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이 미래에 대해 무지하다는 근원적 조건에 대한 나홍진식의 응답일 수도 있을 것이다(이하에는 <랑종>에 대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힌다). 나홍진 감독이 제작한 작품답게 <랑종>은 나홍진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곡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지만 집에 와서 다시 본 작품은 <황해>였다. <곡성>까지 다시 볼 자신은 없었으므로.
<곡성>과 <랑종>을 추동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과 인간의 인생은 이성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엇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후자를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무당이다(랑종은 무당이라는 뜻이다). <곡성>은 효진을 살리려다가 모두가 죽는 얘기고 <랑종>은 밍을 구하려다가 모두가 죽는 얘기다.
무당인 님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무당이 된 것이 아니라 가족력에 의해 무당이 된 사람이다. 페이크 다큐 형식을 취하고 있는 <랑종>의 도입부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님이라는 존재는 무당이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혹은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인생을 은유하는 존재로도 읽을 수 있다.
님의 언니 노이는 바얀 신을 모시는 무당이 되기 싫어 의도적으로 동생인 님에게 그 짐을 떠넘기려고 한다. 심지어 운명을 거슬리기 위해 기독교를 믿는다.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님은 님대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노이는 노이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문제는 남편이 죽은 이후 노이의 딸인 밍에게 신들린 듯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노이와 밍은 처음에는 밍의 증상을 부정하다가 결국 노이에게 밍이 무당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노이는 밍의 증상이 바얀 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고 거절한다. 여기부터 상당 부분은 조카를 구하기 위한 님의 분투를 다룬다. 님은 결국 밍이 기괴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아내는데 실패하고 다른 무당에게 퇴마를 부탁한다.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지 않던 <랑종>이 결국 거대한 비극으로 마무리될 것임을 예감하게 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노이의 죽음이다. 심지어 노이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 <랑종>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바얀 신을 넘어서는 악의 기운이 노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것이라는 추정만 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퇴마는 많은 관객이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거대한 참사로 끝난다. 당연히 <곡성>에서 일광의 굿 장면이 떠오른다. 곡성에서 일광의 굿이 기승전결에서 ‘전’에 해당한다면 <랑종>에서의 퇴마는 ‘결’에 해당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만. 밍이 조상들의 벌을 대신 받는 것이라는 정도로는 <랑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페이크 다큐 <랑종>은 님의 인터뷰를 에필로그로 선택했는데, 나는 이 선택이 마음에 들면서도 일종의 부연설명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다. 님의 인터뷰 내용은 바얀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밍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님에게 남은 것은 결국 자신이 평생 믿어 왔던 바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였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잔혹한 조물주 나홍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절박한 순간에 무당이라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의 힘을 빌려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처한 귀결점은 결국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어이 최악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 나홍진의 작품들을 다시 보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나홍진의 메시지를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