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를 포기하는 방식의 승리

김유원.『불펜의 시간』.

by 노창희

김유원의 『불펜의 시간』은 야구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야구는 승리와 패배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사로잡혀 있는 세계를 은유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앞의 문장을 적어 놓고 보니 은유라는 표현이 적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승부 조작이 횡횡하고 언론과 구단이 결탁하여 정확한 진실을 밝혀내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개인들은 자발적인 패배를 선택한다는 것이 『불펜의 시간』의 얼개다.


오랜 야구팬으로서『불펜의 시간』이 묘사하고 있는 야구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실체적 진실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핍진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 명의 중심인물인 혁오, 기현의 선택은 현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관찰자로서 기능하고 있는 준삼이라는 역할은 반드시 필요한 등장인물이었을까 라는 의구심도 떨치기 어렵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러 볼을 던지는 혁오의 선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축복받은 재능과 엄청난 노력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에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중학교 때부터 촉망받는 야구 선수였던 혁오는 승승장구하면서 프로에 입단하지만 엄마 친구의 아들인 진호의 죽음으로 트라우마가 생겨 스트라이크를 제대로 던지지 못한다. 야구 선수였던 진호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혁오에게 질투를 느끼고 적개심을 드러낸다. 혁오는 고등학교 마지막 시합에서 어김없이 적개심을 드러내는 진호를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잡아낸다. 문제는 운동선수였던 어머니의 충고를 어기고 패배한 진호의 눈을 바라보고 만 것. 진호는 혁오에게 느끼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로 추정되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게 된다. 혁오는 프로 입단 후 진호가 떠올라서 볼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다가 한 이닝을 완벽하게 던진 후 다음 이닝에서 일부로 볼넷을 주는 기이한 방식으로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한다.


준삼은 중학교 시절 혁오와 함께 야구를 했던 동창으로 지금은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다. 구조조정의 바람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는 준삼은 혁오가 왜 볼을 던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스포츠 신문 기자인 기현은 한 회를 잘 던지고 반드시 볼넷을 주는 혁오가 승부 조작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취재하지만 혁오가 볼넷을 던지는 진짜 이유를 알고는 기자 일을 그만두게 된다.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펜의 시간』은 다음과 같은 미덕을 지닌 소설이다. 첫 번째 잘 읽힌다. 나는 『불펜의 시간』을 짧은 시간에 통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주요한 부분을 책을 다시 들춰 보지 않고도 기억할 수 있었다. 서사가 간단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잘 읽히는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불펜의 시간』은 패배하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없는 이들이 선택한 패배의 방식을 승리의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다고 보여준다.


『불펜의 시간』에서 불펜이 의미하는 바는 첫 번째 선발투수가 될 수 없는 이들이 처한 상황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선발투수가 되지 못한 채 불펜에서 쓸쓸히 출전기회를 기다리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불펜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다음 등판기회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불펜의 시간』은 체제를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패배하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얘기한다. 그것도 승리의 한 방식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작가의 다음 소설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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