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통과 고독을 넘어 너에게로

최은영.『밝은 밤』.

by 노창희

최은영의 첫 장편이 어떤 소설일지 궁금했다. 『밝은 밤』을 읽고 바로 떠올린 것은 「쇼코의 미소」였다. 비슷한 고통과 고독을 느끼는 존재들이 결국 너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밖으로 밀어내 버리는 이야기. 이렇게 쓰고 나니 너무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평범한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미묘한 속내를 잘 그려내는 것이 좋은 소설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다. 「쇼코의 미소」에 많은 독자가 공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주인공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후 외조모인 영옥이 살고 있는 회령에 있는 연구소에 취업하면서 회령으로 내려가게 된다. 외조모는 엄마인 미선과 연락을 하지 않고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밝은 밤』에서는 외조모와 미선과의 갈등이 미선과 나와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외조모는 미선에게 견디는 방식의 삶을 강요하고 미선은 지연에게 견디는 방식을 강요한다. 이 잘못된 유전은 영옥, 미선, 지연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영옥, 미선, 지연은 모두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겪었다. 셋은 닮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닮아있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지점이 『밝은 밤』이 「쇼코의 미소」와 닮은 부분이다.


『밝은 밤』에서는 두 개의 큰 상실이 다루어진다. 하나는 어려서 죽은 지연의 언니다. 미선은 죽은 지연의 언니를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없었던 사람 취급하지만 지연은 환영처럼 나타나는 언니가 자신과 언제나 함께 있다고 믿는다. 또 하나는 증조할머니의 은인인 새비 아저씨다. 새비 아저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피폭을 당한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새비 아저씨는 『밝은 밤』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남성 캐릭터이기도 하다.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130쪽).”


새비 아저씨는 원폭이라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평생 믿어 왔던 신을 부정하면서 죽어간다. 『밝은 밤』은 끔찍한 존재인 인간이 타인에게 고통만 주는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가를 새비 아저씨라는 존재를 통해 묻는다. 지연은 끝내 기억되고 싶지 않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되묻는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82쪽).” 그런 지연에게 삶은 견디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려웠다.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 더미처럼 느껴진 것은(156쪽).”

『밝은 밤』에서 영옥, 미선, 지연 세 모녀는 끝내 불화하지만 지연은 영옥의 옛 기억을 편지를 통해 접하면서 새비 아저씨의 딸인 희자를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그 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학자의 길을 택한 희자는 독일에서 지연의 연락을 받고는 영옥을 만나기로 한다. 『밝은 밤』이 지연에게 드리우는 빛은 충분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신을 잠시나마 긍정하게 만든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것은 결국 자신을 긍정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나를 너무 쉽게 버렸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애들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래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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