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에 대한 ‘경의’로서의 ‘애도’

권여선. 「기억의 왈츠」

by 노창희

연말연시가 되면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잘 맞이하자는 마음에서 좋은 단편을 만나고 싶다. 40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청춘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해가 바뀌고 나이가 하나 더 추가되게 되면 청춘이라는 단어는 더욱 범상치 않게 다가온다. 2022년을 전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청춘하면 떠오르는 소설 중 하나는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 실린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다. 인상적인 문장이 워낙 많은 소설이지만 가장 애잔한 한 문단을 빌려와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비하고 있다. 내 생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78쪽).”

연말이 되어 읽을 소설을 찾던 와중에 권여선의 김유정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했고, 반가운 마음에 바로 작품집을 주문했다. 「기억의 왈츠」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얼마 전 동생 부부와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에 다녀온 후부터 나는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청춘의 한 시절을 자꾸 되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13쪽).” 「사랑을 믿다」가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것이 2008년이니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다시 절반을 돌아온 셈이다. 그 사이에 청춘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청춘에 대한 서글픈 애도를 표하던 작가는 이제 청춘에 대해 무어라고 할 것인가?


우연히 숲속 식당에 갔던 나는 경서와 사귀면서 경서가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사십여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35살에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옛사랑을 돌아보는 것이 청춘에 만종을 울리는 일이었다면 환갑이 지나 기억에서 오랫동안 사라졌던 아니 그때는 알 수가 없었던 선물 같은 마음을 확인하는 것은 기억이 주는 축복일 수도 있으리라. 경서는 일부러 무내용한 채 살고 있었던 내게 무내용으로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줬다. 그건 욕망이라고 혹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서와 만나던 나는 누구에게도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당시 내게 경서를 향한 특별한 감정과 욕망이 결여되어 있었던 건 맞다. 경서에 대한 연애 감정이나 욕망이 없었던 것 어쩔 수 없다. 문제는 내가 지키는 줄도 모르고 지키려 했던 무내용이다(45-46쪽).”


나의 인생은 사십여 년 전의 짧은 연애를 잊기에 충분히 신산했다. 대학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오빠와는 유산 문제로 의절했다. 그러나 그때 경서가 준 마음을 잊고 산 것, 아니 경서가 준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라봤던 무지함 혹은 비윤리성에 대해 나는 자신을 용서하기 어렵다. 지금이나 경서를 만나던 때나 청력이 좋지 않았던 나는 어쩌면 무내용한 삶을 지향했다기보다는 그저 둔감한 쪽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가 자신이 지향하던 무내용을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방치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일 수도 있다. 일기까지 보내면서 자신의 진정성을 전달하려 했던 경서에 비해 나는 환경의 황폐함을 핑계로 삶 자체를 스스로 내동댕이쳐 버린 채 살아 왔던 것이다. 삶을 여유롭게 반추할 수 있게 된 아니 무내용하고자 했던 삶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지금 경서가 준 것이 나의 삶의 무내용을 무언가로 채워준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뜻밖의 별자리를 만들면서 내 정신은 깊은 어둠과 무지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났다(40쪽).” 자신은 철저하게 무내용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런 자신을 통해 의미를 찾으려 했던 존재가 있었다는 기억 자체가 기억의 왈츠가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기억의 왈츠」에 대해 애기한다면 너무 낭만적인 독해가 될까? “코로나로 수능이 연기되어 12월 3일에 실시된다는 뉴스였는데 화면에 뜬 1 2 3이란 숫자를 보고 나는 외우기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하나 둘 셋, 왈츠, 그런 말이 쓰여 있던 편지가 생각났다(48쪽).”


어쩌면 청춘의 와중에 있는 이는 상실에 민감하거나 아예 둔감할 수 있다. 하지만 청춘을 한참 지나 더이상 청춘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단계에 진입한 이에게 청춘은 완전히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서 현재의 자신의 삶을 비추어주는 별빛이 되어 줄 수 있다. 기억이 별빛이 되어 돌아올 때 인간 다시 한번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장은 유년기에만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므로.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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