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역사소설’이라는 장르

김훈.『하얼빈』.

by 노창희

이 글은 『하얼빈』에 관한 독후감이라기보다는 『하얼빈』을 읽고, 그 전에 『칼의 노래』를 읽고 실제 역사를 다룬 김훈 소설에 대한 나의 인식에 관한 글에 가깝다. 내가 『칼의 노래』를 처음 읽은 것은 2004년이었다. 처음으로 접한 김훈의 문장을 읽고 느낀 감정은 ‘전율’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 이후로도 그런 전율을 준 문장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현의 노래』에서는 『칼의 노래』와 비슷한 정서적 움직임을 느끼지 못했고, 한동안 나는 김훈이라는 작가가 더 잘 어울리는 장르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와 같은 산문이라고 생각했다.

김한민 감독이 연출한 <한산>을 보고, 다시 <명량>을 찾아본 것이 『칼의 노래』를 재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칼의 노래』를 원작으로 삼은 영상 서사가 아니더라도 나는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순신에 입각해서 영상 서사를 보게 되는데 김한민 감독이 연출한 <한산>은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비장미가 충분히 표현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감독의 연출 의도는 따로 있을 것이므로 이것이 <한산>이라는 영상 서사가 가지고 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발산하는 비장미는 ‘적’으로 가득한 세상에 혼자 맞서는 고독한 단독자가 발산하는 아우라에서 나온다. <한산>에서 이순신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 전쟁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칼의 노래』의 이순신에게는 조국의 수뇌부인 조정도 자신의 편이 아니므로 자신을 둘러싼 싸움은 다만 ‘적의’와 ‘적의’의 싸움일 뿐이다. 김훈은 이와 같은 세상의 난맥상을 『칼의 노래』에서 ‘무내용’으로 규정한다. 이순신이 이 ‘무내용’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칼뿐이다.


김훈은 리얼리즘적 측면에서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데 관심이 있는 작가는 아니다. 김훈은 역사적 딜레마에 처한 개인에 집중한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 소설의 배경이 된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반드시 덧붙인다. 『하얼빈』에서도 「후기·주석」을 통해 소설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김훈의 역사소설에 등장하는 ‘후기’나 ‘연보’는 그 자체로 문학적 성격을 갖는 글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김훈은 역사에 관심이 많은 작가지만 김훈의 소설에서 역사적 맥락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다.


『하얼빈』에 묘사된 안중근의 내면은 『칼의 노래』에서 그려진 이순신의 내면에 비하면 할당된 지면과 비중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아우라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것은 안중근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의 특수성과 무관하게 김훈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김훈에게 역사적 야만성과 맞서는 개인은 철저히 단독자이다. 이것은 김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도 연관되어 있다. 김훈이 소설가로 본격적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가 된 『칼의 노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했다는 작가의 비장한 자기 고백으로 시작된다. 김훈 소설에는 역사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나 사회적 해석이 담겨 있다기보다는 세계의 비참함과 야만성이 전제되어 있다. 이순신이나 안중근은 비극적인 세계에 홀로 맞서는 예외적인 개인이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작가의 말」, 305쪽).”


김훈의 역사소설에 독자들이 공감하는 이유는 영웅으로서의 이순신이나 안중근이 아니라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개인일 것이다. 이 부분은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김훈의 역사소설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나는 여전히 김훈의 역사소설이 나오면 사서 읽는다. 김훈 특유의 문체와 정서가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 놓였을 때 느껴지는 비장미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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