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징치적 동물의 길』.
혜성 충돌로 지구가 멸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비상식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할까? 아담 맥케이 감독이 연출한 <돈 룩 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스포일러부터 말씀 드릴테니 이 영화의 결론이 궁금하신 분들은 글 읽기를 멈추시기를. 대응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 각자의 이해관계로 인해 인류는 최악의 선택을 한다(그 선택의 당사자들이 미국인들뿐이라는 설정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하지만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도 미국인들이니 불만을 표하기도 어렵다). 아담 맥케이가 만든 정치적 실험의 무대는 곧바로 현실의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 <돈 룩 업>은 미국뿐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현실도 환기시킨다.
정치판이 공정하고 깨끗하기 어렵다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다. 문제는 더욱더 정치판이 혼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 국가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대륙과 국가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이 횡횡하고 있고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주요한 원인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편향성에 영향을 주는 미디어 환경변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생존 조건의 어려움은 분노를 쌓이게 하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강화해 주는 데이터 기반 맞춤형 서비스는 정보 편식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 편식은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렇게 말해 보자. 그렇다면 정치에 관심을 끄면 되지 않나. 맞는 말이다. 정치 뉴스를 보지 않고 정치 얘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멀리하면 된다. 문제는 그 역시 일종의 정치적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회의와 냉소가 짙어지면 사회의 역동성은 둔화되고 좋은 지도자가 나타나기 어렵다. 이것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정치적 전경이다. 그래서 김영민은 정치를 부정하지도 포기하지도 말라고 얘기한다. “인간이 그저 행복해지는 게 불가능할 때 정치가 시작된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이며, 그 문제를 다루는 정치가 있기(17쪽)”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인가? 김영민의 진단은 다음과 같다. “그 경제 대국이 도달한 지점은 일종의 번 아웃(burn out) 상태다. 사람들은 지쳤고, 싫은 것은 도대체 더 할 수 없다. 현 지점에 오기까지 정말 말 그대로 지치거나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286쪽).” 대한민국을 경제 대국이라고 부르는데 반대하는 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부정할 수 없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 대국이 된 이후 우리의 삶은 과연 나아졌는가? 부의 총량을 떠나 우리 모두 지쳐 있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김영민의 말처럼 번 아웃 상태다.
“산업화의 성장 동력은 고갈되어가고, 민주화의 정치적 상징 자원은 퇴색하고 있으며, 모든 권위는 빠르게 몰락 중이고, 그 몰락을 틈타 사이비 역사 서술이 창궐한다. 소수의 부자와 가난한 노인들이 불안하게 동거하는 소진된 사회가 목전에 있다(286쪽).”안타깝게도 앞의 김영민의 지적에 반론을 제기하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좋은 정치의 부재일 것이다.
그럼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사는 인생이나 마냥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 아니라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다(13쪽).” 많은 이들이 정치에 피로를 느끼는 것은 옳은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쟁 보다는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식의 논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비판했던 상대편의 과오를 내가 저질렀을 때는 다시 태도가 바뀌게 된다. 사실 이것은 정치판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가정에도 학교에도 직장에도 정치는 존재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과오를 돌아보는 성찰적 태도다. 상대방에 대한 비판에 앞서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성찰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치의 양식을 혁신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정치가 무엇인지 아무도 확고하게 말할 수 없을 때 정치인들이 일단 의지해 볼 수 있는 것은 심미적인 과정이다(278쪽).” 정치의 내용 자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동산 문제는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을 것이고, 경제 성장과 공정한 부의 분배는 어느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이뤄내야 할 과업이 될 것이다. 그 과업들을 달성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난한 논의가 불가피하다. 국민이 정치적 과정을 향유 할 수 있는 형식적 변화가 필요하다. 심미적인 과정으로서의 정치가 이뤄질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정치에 대한 피로감은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의 과정을 심미적으로 혁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낡은 정치를 혁신하기 위해 필요한 생각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은 그것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실로, 생각은 침잠이 아니라 모험이며, 그것이야말로 저열함에서 도약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타인의 수단으로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일을 넘어, 타성에 젖지 않은 채, 생각의 모험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터전이 바로 생각의 공화국이다(2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