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터클과 메시지

'한산'과 '비상선언'

by 노창희

코로나로 인해 개봉이 밀렸던 영화들이 올여름 줄줄이 개봉하면서 한주에 적어도 한편 정도는 보고 싶은 영화들이 개봉하고 있다. 이 중 오늘 얘기하고 싶은 작품은 ‘한산’과 ‘비상선언’이다. 굳이 ‘한산’을 앞에 둔 것은 개봉이 ‘비상선언’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한산’을 보고 내가 다시 꺼내든 텍스트는 김한민 감독의 전작 ‘명량’과 김훈의 『칼의 노래』였다. 두 텍스트를 다시 접하고 내가 ‘한산’에서 느낀 아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한산’은 잘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집중하고자 하는 부분이 명확하고 영화가 화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스펙터클의 품질은 관객이 극장에 들어서기 전에 기대했던 부분을 충분히 충족시켜 줄 만큼 잘 찍었다는 인상을 준다.


영화는 서사다. 그래서 스펙터클을 위해서라도 스펙터클에 몰입하게 해줄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스펙터클에 집중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이순신은 한국인들에게 이름 자체가 개연성이다. 나는 이순신이 등장하는 영상 서사에서 스펙터클을 잘 구현해 내는데 성공한다면 실패하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한산’이 ‘명량’보다 덜 신파적이어서 성공적이었다고 보는 주장에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덜 신파적’이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래서 ‘성공적’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나에게 이순신은 자연인 이순신이라기보다는 『칼의 노래』의 주인공 이순신이다. 이 이순신은 내외부의 적들에 맞서는 절대적 단독자로서의 서늘한 비장미를 가진 인물이다. ‘명량’이나 ‘한산’이나 그 비장미를 구현해 내는 것에 『칼의 노래』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김한민 감독의 목적이 비장미를 구현하는 것에 있는지와는 별개로). ‘한산’에서 내세우고 있는 메시지는 ‘의’와 ‘불의’와의 싸움이다. 『칼의 노래』에는 ‘의’ 앞에 ‘적’이라는 한 글자가 더 붙어서 전쟁의 동기를 설명한다. 나는 임진왜란이 ‘의’와 ‘불의’의 싸움이었다기보다는 ‘적의’와 ‘적의’의 싸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산’의 ‘의’보다 명량이 강조하고 있는 ‘두려움’이 전쟁을 이해하는데 있어 보다 적합한 정서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은 ‘적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를 줄이고 스펙터클의 비중을 높이는 쪽에서는 ‘한산’이 효율적이었으나 개인적으로 스펙터클에 몰입시키기 위한 메시지 측면에서는 ‘명량’에 더 공감하는 쪽이다.


개봉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비상선언’의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훨씬 논쟁적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지점일 것이다. 코로나 이후 개봉을 가장 기다렸던 작품이었던 만큼 기대치가 높았고, 그 기대치보다는 평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해가면서 얘기해 보자면 ‘비상선언’의 후반부는 ‘세월호’부터 ‘코로나’까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드러내 준 사건들과 관련된 은유와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감정 또한 과잉이라고 볼 만한 대목이 많다. 엄청난 몰입감을 제공하는 전반부와 정서적인 톤이 급격히 변화하는 후반부 사이의 정서적 진폭이 큰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의 상당 부분을 덜어내는 것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비상선언’은 오랫동안 극장을 마음 편히 오기 어려웠던 관객들이 느끼고 싶었던 감정을 마음껏 느끼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극 중에서의 출연 비중을 떠나 누군가는 꼭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역할을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세 배우가 극 중에서 해 낸다는 것도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충분한 스펙터클을 제공하면서 절제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미학적으로 훌륭한 덕목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있기 어렵겠지만 메시지 과잉이 꼭 비효율적인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단언하기 어려울 거 같다. 메시지 과잉에 찬성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스펙터클과 메시지를 제공하는 방식에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는 취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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