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6일 – 2026년 2월 1일 주간
여전히 추운 한 주였지만, 지난주보다는 달리기 수월한 한 주였다. 혹한이 시작된 이후로는 야외에서는 조깅 페이스로 달리고 있어서 사실 10km 달리기에서 날씨가 아주 큰 변수라고는 할 수 없다. 이번 주도 트레드밀에서 파틀렉 형식으로 나름의 템포런 5km를 두 번 뛰었는데, 다음 주부터는 7km로 늘려볼까 생각 중이다. 토요일에도 날씨가 추웠지만 지난주에 비해 날씨가 포근해서 거리주를 뛰는데 훨씬 편안했다. 처음으로 24km를 6분 22초 페이스로 뛰었다. 날씨가 조금 더 풀리면 점진적으로 거리를 늘려갈 생각이다. 다음 주부터는 야외에서도 하루 정도는 속도를 높여서 뛰어 볼까 한다. 오늘 오랜만에 야외에서 5분 13초 페이스로 뛰었는데 맥박(153bpm)에 비해 체감으로 느껴지는 강도가 힘겨웠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빠르게 뛰는 횟수를 늘려야겠다.
연초마다 하는 다짐 중 하나는 영화를 더 많이 봐야지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극장에는 가지 못하고 있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영화를 IPTV와 OTT를 통해 나름대로 부지런히 챙겨서 보고 있다. 미디어 연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콘텐츠를 보는 경험은 필수적이고, 연구자로서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제일 부족한 부분 중 하나가 충분하지 못한 콘텐츠 소비량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보기는 여전히 비교적 짧은 시간에 가장 수준 높은 영상 관람 경험을 제공한다. 쇼츠와 릴스의 홍수 속에서 업의 미래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도 영화에는 많은 자본과 최고의 인력들이 투입되어 수준 높은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씨네21> 김소미 기자의 영화 에세이 <불이 켜지기 전에>를 읽고 있다. 인상적인 문장들이 많은데 유독 나의 마음을 끈 대목은 다음과 같다. 다소 길지만, 다 인용하고 싶어서 아래의 두 단락을 가져왔다.
“대안 미디어, 크리에이터, 블로거 등 1인 중 매체의 부상 속에서, 1995년에 처음 생겨난 종이 잡지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내가 보존해야 할 유산과 고쳐 쓸 목록을 고민하게 한다. 신뢰받는 레거시미디어의 빛과 그림자는 양면 모두 짙고 쨍하다. 그렇다, 나는 오래된 유산 속에 있다. 귀퉁이 어딘가는 무너져 내리고 또 귀퉁이 어느 쪽은 매일 새로이 생겨나고 있는 이곳에서 보고 쓴다. 어디까지나 여러 사람 중의 한 명으로서.
영화를 보는 일은 엔딩크레디트에 익숙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주연은 아니지만 주인인 사람들을 위한 흑백의 이미지인 엔딩크레디트는 무언가의 완성에 예상보다도 많은 사람이 가담했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보조된 시간이다. 영화잡지에도 그런 페이지가 있다. 감독과 배우, 영화와 산업의 풍경이 주연인 잡지 앞쪽에 깨알같이 적힌 인명의 목록이다. 목요일 새벽, 인쇄소에 전송된 100쪽 안팎의 페이지에 가담한 관점과 손길은 어디까지나 잡지의 뒤편에 보이지 않게 스며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 여러 사람들의 것이다. 나 따위가 한없이 싫고 하찮아서 몸서리쳐지는 날에도 ‘그들 사이의 나’는 건재하게 다음 마감으로 향한다(62-63쪽).”
많은 평범한 이들이 어려서부터 주연이 되지 못한 울분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 욕망은 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하나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삶의 경험이 축적되어 가면서 주연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지나칠 때 나타나게 되는 부작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체험하게 된다. 나 역시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감히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는 제작자들의 경험에 견줄 바는 아니나 대학교 때 교내 방송국에서 라디오 방송 제작을 3년간 해 본 경험이 있는 나도 공동의 창작에서 누군가는 느낄 성취감과 또 다른 누군가가 느낄 상실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체감할 수 있다. 제작 경험이 아니더라도 사회 경험 자체가 주연이 있기 위해서는 주연을 보조하는 조연과 단역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마련이고 이걸 모르는 사회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연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쉽사리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 사회생활에 모든 것을 쏟아야 하는 프로와 직장인들의 애환이다.
날이 추워지면서 나는 평일 새벽에 동네를 달린다. 집 주변에 남산 둘레길과 한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네를 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새벽에도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 영업을 준비하시는 분들도 있고, 출근인지 퇴근인지 추측하기 어려운 분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간혹 느끼는 감정은 힘들게 일상을 영위하는 생활인으로서의 동질감이다. 각자가 맞고 있는 역할에서 주연은 아니더라도 주인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공동체의 일원들을 목격하는 경험이랄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묘한 우수 같은 정서도 느껴질 때가 있다.
새벽에 달리면서 어제의 걱정과 오늘의 불안을 달래는 나는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달리는 일이 매번 주연일 수는 없어도 내 삶과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주인일 수는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찰나에 느끼는 일시적인 경험일지라도 달리면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감각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