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상실 #퀴어 #창비
내게 박상영의 소설이 퀴어 소설이라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퀴어 소설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박상영 소설이 퀴어 소설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하지만 박상영 소설이 퀴어 소설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박상영의 소설이 퀴어 소설이기 때문에 특별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내게는 다른 이유로 박상영 소설이 특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박상영의 소설에서 느끼는 첫 번째 미덕은 무엇보다 잘 읽힌다는 것이다. 두 번째 미덕은 유머러스하다는 것이다. 이 유머는 내게 익숙한 것이 주는 유머가 아니라 작품이 속해 있는 맥락에서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주는 적정한 수준의 비틀림 때문이다. 적정한 수준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은 그것이 그 유머가 주는 맥락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비틀림이 과도하면 독자가 그것을 유머라고 느낄 근거가 확보되지 않는다. 세 번째 이유가 가장 중요한데 내가 박상영의 소설을 좋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상실의 순간을 성찰한다는 것이다. 상실이 성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며 중·단편 소설에서는 그 순간만을 제대로 포착해도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상영의 소설들은 그 순간을 잘 포착해 낼 뿐 아니라 그 상실이 발생 되는 지점에 대해 특수한 맥락에서 접근했다가 결국은 보편적인 지점으로까지 나아간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포함하여 박상영의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박상영의 모든 화자와 주인공이 작가인 박상영의 페르소나인 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당연한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과 박상영이 얼마나 가까운지 혹은 얼마나 다른지가 궁금하다. 『대도시의 사랑법』에 실린 네 편의 중편을 읽기 위해서 이 궁금증부터 해소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말」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박상영의 답변은 위의 질문이 명확히 해소될 이유가 없는 우문임을 잘 말해 준다.
책에 수록된 네편의 소설 속 화자인 ‘영’은 모두 같은 존재인 동시에 모두 다른 존재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인 동시에 어쩌면 나와는 아주 동떨어진 인물이고,
당신이 잘 알고 있는 누군가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너무 힘겨워 외면하고 싶었던
당신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작가의 말」, 337-338쪽).
「재희」는 동성애자인 영과 이성애자인 재희가 동거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박상영은 끈임없이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데, 재희에 등장하는 다음의 문장만큼 박상영이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를 잘 드러내 주는 문장은 없을 것 같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재희」, 55쪽).
이성애자 여성인 재희와 동성애자 남성인 영은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둘 사이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재희는 결혼하여 영을 떠난다. 당연하게 영은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이 집착일 수밖에 없다면 꼭 사랑을 해야 할까?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자 집착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집착 말고 다른 말로 바꾸어야 한다면 사랑은 꽤 괜찮은 단어가 아닐까? 한 시절을 보내는 마음은 늘 착잡할 수밖에 없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서 영은 세 가지 상실에 직멱한다. 하나는 어머니의 죽음, 5년 전에 헤어진 그로 대변되는 청춘, 그리고 가장 뜨겁고 아름다웠던 그와의 사랑의 기억. 이 세 가지 상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것은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다. 이 상실의 국면은 영을 통째로 바꿔 놓을 것이다. 병이라는 것이 인간을 통째로 바꾸어 버리는 것처럼(178쪽). 더욱 무서운 것은 그 상실 속에 일어난 일들이 앞으로의 삶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내가 아는 우주의 원리는 그것 뿐이다. 영은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규호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다면 사랑은 대상만 바뀌는 것일까? 라캉이 얘기한 것처럼 욕망의 대상은 미끄러져 내려갈 뿐 지속될 수 없는 것일가? 세 가지 상실을 겪는 영은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영은 다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169쪽).
박상영의 등장인물 혹은 작가의 페르소나처럼 등장하는 영에게 “결국에는 자리만 옮긴 채 똑같은 일상이 반복(204쪽)”되는 것은 디폴트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서 차이가 나는 반복이 있다면 사랑이다. 하지만 이 사랑마저도 번번이 좌절된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그 이유가 카일리 때문이다. 카일리가 아니더라도 상영과 규호는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해 섣부르게 얘기할 수는 없다. 결국에는 자리만 옮긴 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될 것을 알지만 그 일상을 견디기 위해 끝내 좌절될 사랑이 대도시의 사랑법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상실에 대한 체감은 상실 이후에 온다.「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상실 이후의 상실에 대해 성찰하는 소설이다. 상실에 대한 체감한 상실 이후에 올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의 문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늦은 우기에도 비는 오고, 다 늦어버린 후에도 눈물은 흐른다(306쪽).
상실 이후에 상실을 애도하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