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 담대한 낙관주의로

문유석 (2017).『개인주의자 선언』. 파주: 문학동네.

by 노창희

『개인주의자 선언』의 한 축이 대한민국의 야만적인 집단주의를 넘어서 합리적 개인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다른 한 축은 대한민국에 팽배해 있는 선과 악의 극단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선과 악에 정답은 있을 수 없다. 내가 믿는 것이 선이니 네가 믿는 것은 악이라는 식으로 편을 가르는 문화가 문제라는 것이다.


문유석이 대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에는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을 설명하기가 비교적 명확했다. 탄압하던 쪽과 탄압받던 쪽이 서로의 경계를 가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세상에 정답이 정해져 있다고 믿지 않았던 문유석은 그 당시부터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분법이 불편했던 듯하다. “1980년대에는 많은 사람이 세상에 정답이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선의를 가지고 헌신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선악과 옳고 그림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옳은 가시밭길을 선택하느냐 비겁한 안락함을 선택하느냐의 윤리적 결단만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202쪽).”


선과 악을 구분하기가 본질적으로 어렵다는 보편적인 명제를 차치하고서라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1980년대에 비해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명쾌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쉽게 말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202쪽).”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과거보다 더 편을 가늠하고자 사회적 욕망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접근이 아닌 이념을 기반으로 한 편 가르기는 위험할 수밖에 없다. 이념이라는 것 자체가 도그마 될 가능성을 크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이란 신념의 체계이기에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 이념 간 갈등은 혁명운동과 전쟁을 일으키며 수천만 단위 희생을 낳았다(208쪽).”


각자가 가진 경험과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편견에 따라 편을 가르는 상황에서 이것이 유발하는 사회적 비용은 너무도 크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은 비극이다(201쪽).”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유석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인간의 이기심,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일단 인정하고 그걸 출발점으로 타협할 지점을 찾는 냉정함이 현실적이다(203-204쪽).” 물론, 이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비합리성을 가리기 위해 합리성에 기대는 본성이 더 강한 동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현실을 비관하기만 할 수는 없다. “역사의 두 측면을 있었던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얼마든지 지금 현재 우리가 겪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림자를 강조하기 위해 빛을 애써 지울 필요도 없고, 빛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 있는 것을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다(201쪽).” 문유석은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면서도 낙관주의를 포기하지 말 것을 권한다. “도그마에 빠지지 말고, 유토피아적 환상을 경계하며, 더디더라도 분명히 내일은 오늘보다 낫게 만들 수 있다는 담대한 낙관주의를 가지고서 말이다(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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