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칼의 노래』 ‘책머리에’
나는 김훈의 책을 군대에 있을 때 처음 읽었다. 그것도 중대에 배급된 책으로. 요즘 군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 군대는 자대에 있는 책을 먼저 선택해서 읽을 수 있는 것도 큰 권력이었다. 갓 상병을 달았던 나는 중대에 보급되는 책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보급되는 책 중 내 마음에 드는 책을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지금이나 그때나 그 책들이 어떠한 경위로 선택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군대 가기 전에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꽤 자주 갔었는데, 가판대에 놓여 있는『칼의 노래』를 자주 봤지만 그 책이 왠지 내키지 않았다. 제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지금은 ‘칼의 노래’만큼 탁월한 제목 선택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이지만). 더구나 이순신에 대해서라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당시 나는 소초로 파견을 앞두고 있었다. 삼척에 있는 해안 GOP는 적막하고 적요로운 곳이었다. 그곳에 가면 점호도 받지 않았고, 야간 경계를 서는 일을 제외하면 종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칼의 노래』를 들고 간 것은 제목이 주는 비장미와 소초의 적요로움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책을 펼치고 다음의 첫 문단을 읽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칼의 노래』, 파주: 문학동네, 6쪽, 이하에는 쪽수만 인용).”
하루하루 시간을 죽이며, 눈을 치우거나 책을 읽거나 밤에 하염없이 오징어 배들이 내뿜는 불빛을 제외하면 공포가 느껴질 만큼 고요한 밤바다를 바라보며 야간 경계를 서던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저 단락에 포함된 문장들은 그야말로 전율을 느끼게 했다. 김훈이 저 책을 쓰던 정황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저 문단 속에서 그는 당대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발적으로 혼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였다. 정의로운 자들과 이제 막 작별한 그는 초야에서 혼자 살기로 결정했다. 『칼의 노래』의 1인칭 화자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의 가면을 쓴 김훈이라고 봐야 한다. 저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향후 김훈이라는 글쟁이가 어떠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지를 집약적으로 요약해 준다. 그는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임을 선언한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그가 그러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그는 여전히 희망 없는 세상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현역으로 남아 있다.
김훈이라는 자연인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인상은 단독자라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다니는 직장과 불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서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혼자이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했으므로 ‘적막’을 느껴야 했던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6쪽).”
자발적으로 격리되기를 택한 인간에게도 연민이라는 감정은 쉽사리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연민은 정의와 대의 같은 가치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실존과 관련된 감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인간에게조차 우리는 어느 순간 연민을 느낀다. 그 연민의 감정이 김훈이 얘기하는 사랑과 관련이 있는 걸까? 나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극단적으로 얘기해 본다면 연민조차 없는 세계는 그야말로 희망을 잃어버린 황폐한 세계이다.
‘칼’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 『칼의 노래』에서 칼은 무서운 말의 대극에 놓여 있는 메타포이다. 물론, 메타포이기 이전에 이 소설에서 언어 다음으로 강력한 기능을 하는 것이 칼이다. 하지만 『칼의 노래』에서 칼은 결코 언어를 능가하지 못하고 항상 언어에 미만한다. 이순신은 말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채 백의종군하지만 칼의 현실에는 절대적으로 무능한 왕은 다시 그의 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이순신을 복권시킨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7쪽).”
아마도 김훈은 당시 언어의 무서움에 치를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골똘히 이순신의 칼을 보고 문득 서글퍼졌을 것이다. 평생 글로 밥벌이를 했던 사람에게 말의 무서움과 그것이 초래하는 곤란함은 항상 버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왜 김훈에게 사랑은 불가능성의 영역일까? 사랑은 내가 긍정하고 싶은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적어도 『칼의 노래』에 놓여 있는 맥락만을 놓고 보자면 그는 긍정하고 싶은 대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연민은 느낀다. 전체적인 세계를 조망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있어도 개별적 인간을 김훈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역사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테제와도 같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7쪽).”
김훈은 끝끝내 연민은 떨쳐 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사랑은 왜 불가능성에 대한 사랑인가? 구조적으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편의 문제인가 특수의 문제인가? 김훈의 글에는 보편과 특수 모두를 관통하는 불가능성에 대한 분노와 적의 그리고 회한이 가득하다. 그는 끝내 연민까지는 탈탈 털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 그 불가능성에 대한 글을 써내고 있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7쪽).”
‘희망 없는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아득한 적을 맞이하는 태도로서의 삶’은 『칼의 노래』를 포함한 김훈의 많은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태도이다. 세상이 잘못되어서도 개별적 실존은 포기할 수 없다. 그 개별적 실존의 고귀함을 포기하지 않은 그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글을 쓴다. 다행이다. 부디 오래 쓰시기를.